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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35화 (35/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35화

* * *

‘다행이다.’

에드워드는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제네비브가 완벽한 컷시(Curtsy)를 하고 나서야 밀포드 씨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밀포드 씨가 형형한 눈으로 자신을 볼 때, 에드워드는 불안감 대신 그가 제네비브에게 특별히 관심을 안 뒀다는 사실에 더 안심했다.

그가 올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 자신이 파인트리 서클 행사에 불참했던 지난 몇 년 동안, 밀포드 씨는 언제나 행사에 가기 전 세인트 존 칼리지에 방문했으니까.

‘하지만, 첫날부터 오실 줄은…….’

언질이라도 했더라면 밀포드 씨가 제네비브를 만나는 일만큼은 막았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가죠.”

밀포드 씨가 떫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답답할 정도로 느린 걸음걸이를 보며 에드워드는 그를 앞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야 했다.

대신, 에드워드는 방의 마지막 모습을 곰곰이 생각했다. 갖고 온 짐은 낡은 트렁크 가방 하나였지만, 그마저도 밀포드 씨의 신경을 어떻게 거스를지 모르는 일이었다.

에드워드는 밀포드 씨가 제 방 꼴을 보고 한숨을 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그려 낼 수 있었다.

‘얼마 안 걸리는데.’

에드워드는 먼저 방에 들어가, 트집 잡힐 요소들을 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밀포드 씨는 자신을 무시하는 (이를테면 그를 앞질러 간다거나 하는) 행위를 싫어했다.

지금 에드워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밀포드 씨가 침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기를 절실하게 바라는 것뿐이었다.

머지않은 거리를 한참이나 걷고 나서야 두 사람은 에드워드의 방 앞에 멈췄다. 문 앞에 새긴 호실을 확인한 밀포드 씨가 자연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철컥.

하지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

“제가…….”

불쾌함이 가득 들어찬 그의 시선을 보며, 에드워드는 문을 열어 주고자 손을 뻗었다.

“됐습니다.”

철썩!

그러자마자 밀포드 씨가 에드워드의 손등을 때렸다. 그가 낀 반지에 맞아 손등이 금세 부었다.

‘왼손이어서 다행이지.’

에드워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아래로 공손하게 모았다.

또다시 맞으면 어쩌나, 에드워드는 밀포드 씨의 눈치를 보며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밀포드 씨는 안주머니에서 어떻게 구한 건지 모를 열쇠를 꺼냈다.

“쯔쯧.”

혀를 찬 밀포드 씨가 열쇠를 돌리자, 문은 곧바로 열렸다.

방 안으로 들어선 에드워드는 붉어진 손등을 문지르며 이곳저곳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불씨가 약해진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고, 소파 위 쿠션 모양을 다시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밀포드 씨는 저택 식솔이나 할 법한 행동을 하는 에드워드를 감상하듯 가만히 서 있었다.

방이 어느 정도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고서야 그는 천천히 찬장으로 향했다. 그가 손을 들어 찬장 위를 한 번 쓸자, 옅은 먼지가 흰색 장갑 위로 묻어났다.

밀포드 씨가 한심하다는 듯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쯔쯧.”

그는 에드워드가 준비한 소파가 아닌, 벽난로 옆 마호가니 의자에 앉았다.

“벌써 이곳이 편해진 모양입니다?”

밀포드 씨가 테라스 문을 닫는 에드워드를 구경하며 비꼬았다. 에드워드는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제네비브 달링이라…….”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안심한 게 얼마나 지났다고. 에드워드는 태연한 체하면서 밀포드 씨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긴 지팡이가 맞은편 의자를 가볍게 두들겼다. 앉아도 된다는 조용한 허락인 동시에 명령이었다.

에드워드는 몸가짐에 집중하며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에 등이 닿지 않도록 허리를 꼿꼿하게 펴곤 그의 눈을 어색하게 피했다.

“달링씩이나 되는 사람이 어쩌다 황자님을 알게 된 건지…….”

밀포드 씨가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어조로 말했다.

초면인 사람의 단점을 늘어놓는 건(대개는 그런 사람 같은 기질이 보이니 조심해야 한다는 암시로 매듭을 지었다) 밀포드 씨의 오래된 취미 생활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에드워드가 불편해질 상황을 벗어나는 법을 모색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과연 다르긴 하더군요. 달링 가문의 외동딸이 영특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때문에, 이어진 문장은 에드워드를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가 심했지요. 아직 어린 학생을 사교계에서 만난 사람처럼 대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다음에 만난다면 정식으로 사과라도 해야겠군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통 그답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아주 오랜만에 밀포드 씨와 의견이 일치했음을 느꼈다.

“……당최 요즘은 칼리지에서 뭘 가르치는 건지, 인사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지천에 널렸는데, 달링 양은 교육을 제대로 받았더군요.”

물론 안 했으면 하는 말들도 있었지만, 에드워드는 밀포드 씨가 원하는 대로 대체로 공감하며 동조했다.

“그런데…….”

밀포드 씨가 말끝을 흐렸다.

“황자님이 그 달링 양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에드워드가 애써 외면한, 그리고 잊으려고 했던 부분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심장을 철렁거리게 만드는 데엔 그 짧은 질문 하나면 충분했다.

“달링 가문의 영애가 황실에서 인정조차 못 받아서 평민 행세나 하는 서자와 붙어 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귀족들 사이에서 어떤 말들이 오갈지…… 벌써 걱정이 드는군요. 슬프게도 달링 양의 예법 선생께선 격에 맞는 사람과 어울려야 한다는 건 알려 주지 않은 모양입니다.”

밀포드 씨는 대답을 기대하고 말한 게 아니었는지 에드워드의 말을 기다리는 대신 담배를 꺼냈다. 가느다란 궐련을 입에 물고, 그 끝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한 모금 들이켜자, 줄곧 평온함을 유지하던 밀포드 씨의 이마가 구겨졌다. 그가 연기를 뱉으며 지팡이로 에드워드의 왼쪽 바짓단을 들었다.

“…….”

차가운 금속이 발목에 닿았다.

“이런 황자님이…….”

마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비웃듯, 그가 지팡이 끝으로 바닥에 끌리는 바짓단을 들추듯 쿡쿡 찔렀다.

“그런 분과?”

그가 즐거운 목소리로 조롱의 말을 내뱉었다.

“황자님. 제발 주제 파악이라는 걸 하십시오.”

밀포드 씨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떨군 채 여전히 지팡이에 눌린 제 바짓단을 보았다.

“황자님 같은 사람이 달링 양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민폐라는 걸 모르시나요? 황자님이 옆에 있으면 달링 양의 평판만 깎인다는 걸, 정말 알려 드려야 아는 건지?”

밀포드 씨는 이 당연한 사실조차 모르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하기야, 이런 기본적인 사교술도 모르는 사람이—.”

쿵! 쿵!

그의 억하심정이 담긴 지팡이가 발등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바짓가랑이를 찔렀다.

“—만찬에 가기까지 했으니, 알 턱이 없겠죠.”

밀포드 씨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서렸다.

“……죄송합니다.”

에드워드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줬다.

밀포드 씨가 일부러 자신에게 큰 옷을 줬다는 건 진작에 알았다.

‘첫날 만찬에 이걸 입고 가야 할 거다’라는 편지가 동봉된 정장이 자신의 체격과 맞지 않는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연회에 가지 말라는 은유, 어쩌면 노골적인 명령. 누가 봐도 잘 차려입은 제네비브, 그리고 제대로 된 정장 한 벌조차 없는 자신.

밀포드 씨가 한 말대로였다. 애써 모르는 척했지만, 제네비브와 자신이 같은 선상에 놓이지 않았다는 건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걸 아는 사람이 대회에 출전을 합니까?”

밀포드 씨의 목소리가 에드워드를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에드워드는 놀라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말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는 밀포드 씨에게 놀란 것도 잠시, 에드워드는 곧 수긍했다.

‘왜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굳이 보고하지 않더라도 밀포드 씨는 자신이 행한 행동이나 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말들을 기억하곤 했다.

에드워드는 체념하며 그가 다음으로 할 말을 기다렸다.

“황자님,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황자님이 살아 계시는 이유는 하나라고…… 눈에 띄지 않아서라는 걸요. 제가 황자님을 도울 수 있는 건 ‘눈에 띄지 않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죽고 싶어서 작정한 사람 같군요.”

밀포드 씨가 말을 이어 갔다.

“황자님의 후견인이 되는 것으로 제가 얼마나 많은 혜택을 포기해야 했는지 알 턱이 없겠죠. 그렇게 죽고 싶으면 차라리 말씀하십시오.”

에드워드는 답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드셨습니까.”

에드워드는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제 손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밀포드 씨에게 맞은 왼쪽 손등은 가라앉을 기미를 안 보였다.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런 에드워드를 본 밀포드 씨는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저었다. 후, 한숨 소리와 함께 매캐한 담배 연기가 방을 채웠다.

곧, 타오르는 벽난로에 담배를 버린 밀포드 씨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이렇게 행동하면 상대가 황자님을 다른 눈으로 보리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는 주어 없이 이야기했지만, 에드워드는 그가 제네비브를 가리켰다는 걸 쉬이 알았다.

에드워드는 밀포드 씨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하지만, 또 의문이 들었다.

정말 아닐까?

밀포드 씨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의 황자님은 불쌍한 평민 장학생 처지이니 어쩌면 동정을 보이는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간 황자님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요.”

“…….”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까먹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그 말을 끝으로 용건은 끝났다는 듯, 아니면 더 시간을 소요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밀포드 씨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출구에 다다른 그가 때마침 생각났다는 양 덧붙였다.

“다행히 멍청하진 않으시니, 해야 할 일이 뭔지 알 거라고 믿습니다.”

달칵.

그 말을 끝으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에드워드는 느리게 고개를 올려, 밀포드 씨가 떠난 문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즐겁게 즐겼던 만찬이, 조용히 바라보던 밤하늘이, 슬프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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