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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36화 (36/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36화

그날, 에드워드는 잠을 설쳤다. 기숙사 침대보다 안락하고, 저택보다 사치스러운 잠자리가 이렇게 불편할 줄 몰랐다.

‘황자님. 제발 주제 파악이라는 걸 하십시오.’

‘황자님 같은 사람이 달링 양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민폐라는 걸 모르시나요?’

‘다행히 멍청하진 않으시니, 해야 할 일이 뭔지 알 거라고 믿습니다.’

귓가에선 밀포드 씨가 한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에드워드는 그가 한 말을 조목조목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에드워드는 반박할 거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지난밤 들은 말은 무력할 정도로 옳은 말투성이다.

“해야 할 일…….”

에드워드는 밀포드 씨가 떠나기 전에 한 말을 곱씹었다.

눈에 띄지 말고, 처신을 잘하여라.

예선전에서 탈락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 그러니까, 오늘 출전 포기 의사를 밝히라는 뜻이었다.

밀포드 씨의 속뜻을 간파하는 건 쉽다. 언제나 자신이 가장 하기 싫은 최악의 선택지를 고르면 됐다.

그가 바라고 예상한 것보다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내면 밀포드 씨는 더 기뻐하고, 한동안 관대해지는 것으로 에드워드는 짧지만 평화로운 순간을 보낼 수 있다.

‘대타로…… 콜린스가 들어오겠지.’

다시 주전 자리를 꿰찼을 때 찰스가 얼마나 거들먹거릴지 궁금했다.

에드워드는 어쩌면 그렇게까지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펜싱 클럽에 가입하고, 주전 목록에 이름을 올린 것도 결국 마이언 아카데미에 오기 위함 아닌가.

에드워드는 이미 그 목적을 달성했다. 세인트 존 칼리지와 달리, 낯설고 맑았던 하늘이 그 증거였다.

되레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밀포드 씨의 기분이 나아지면 이곳에 있는 동안 눈치를 적게 볼 수 있고, 눈에 띄는 위험을 피할 수 있으니까.

“……이게 맞는 거지.”

그렇게 에드워드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 * *

하늘에 여명이 밝아 올 무렵, 에드워드는 무작정 방을 나와 펜싱 경기장으로 향했다.

길은 전해 들은 대로 복잡했다. 같은 모양의 기둥과 아까 본 것 같은 풍경이 반복되니 헷갈렸지만, 안내문을 참고하니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되도록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스미스 감독이나 알렌 코치를 볼 면목이 없었다.

“언제 오시지…….”

에드워드는 작게 중얼거리며 방황하듯이 복도를 서성거렸다.

째깍째깍, 일정한 간격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손목 시곗바늘 소리에 맞춰 목적 없이 돌아다니던 그의 발이 야외 복도에 길게 나열된 캐비닛 앞에서 멈추었다.

트로피 캐비닛이었다.

지금껏 마이언 아카데미 펜싱 클럽에서 순위권 안에 든 학생들의 트로피를 중심에 두고, 관련 신문 기사와 해당 경기에서 사용한 장비가 자랑스럽게 전시되었다.

트로피 표면에 새겨진 숫자는 언제 수상한 것인지를 가르쳐 줬다. 가장 오래된 것은 몇 세기 전 것이었다.

“…….”

유명한 이름도 몇 보였다. 서넛은 이제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위인이었고, 한둘은 통치학과 정치학 교재에서 읽은 적 있는 익숙한 이름이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시간은 현재와 가까워졌다. 트로피 모양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크고 작은 변동이 있었지만, 전부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녹슨 곳이 하나 없었다.

어느덧 트로피를 수상한 시간대는 일 년 전에 도달했다.

테오도르 우드빌.

우승 트로피 위에 익숙한 이름이 공용어로 새겨져 있었다.

‘선배의 전 약혼자…….’

에드워드는 어제저녁에 본 테오도르를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랑 어울린다는 뜻이겠지.’

만찬 때 테오도르는 매사 적극적이었다. 제네비브와 대화도 잘 통하는 것 같았고, 문장 하나 제대로 말하는 것조차 오래 걸리는 자신과 반대로 유창하게 말했다.

에드워드는 감히 자신을 제네비브와 동위 선상에 두는 염치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제네비브와 ‘격이 맞는 사람’은 테오도르 같은 사람일 거라고, 밀포드 씨가 짚어 주기도 전에 든 생각이었다.

테오도르의 이름을 새긴 트로피를 중심으로 시합 당시 그가 사용했던 장비와 여러 신문 기사가 스크랩 되었다.

개중에는 <더 칼리지>도 있었다. 장문으로 길게 쓰인 다른 신문들과 다르게 <더 칼리지>는 바우트 진행 상황만 깔끔하게 기록했다.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동정심이 느껴질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승리였다.

다른 칼럼은 경기 내용을 보다 더 자세히 다뤘다. 기사의 마지막 줄은 [테오도르 우드빌은 제622회 파인트리 서클 여름 스포츠 대회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여 준 선수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로써 그는 파인트리 서클 대회가 개편된 이후, 마이언 아카데미 최초로 2회 연속 솔잎 브로치를 받은 학생이 되었다.]로 마무리되었다.

‘같이 경기해 보고 싶었는데.’

2년 연속으로 펜싱 시합에서 우승한 사람이라니 궁금했다. 칼럼에 적힌 것처럼 경기를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일어나지 못할 일을 상상해서 비참해지는 건 에드워드 본인이었다.

“…….”

이상했다.

분명 이게 최선인 걸 아는 만큼 에드워드는 괜찮았다. 하지만 왜 지금 ‘비참하다’ 따위의 극단적인 감정이 드는 건지.

이 정도는 ‘아쉽다’처럼 시원섭섭한 감상으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왜 정감 없는 감독과 코치를 볼 면목이 없어지고, 어제 자신을 칭찬한 제네비브에게 미안해지는가.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그 이유는 어느 정도 예상이 됐다.

이게 최선이라는 설득은 알맹이 없는 텅 빈 자기 위로였다. 자신이 잘하는 걸 결과로 보는 게 즐겁지 않을 리가 없다.

트로피를 받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저 무언가를 했다는, 자신이 잘하는 걸 확인하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기대되는 상대는 있나요?”

생각을 정리하던 중,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민되네…….”

이어 또 다른 목소리가 말끝을 길게 늘어트렸다.

“흠…… 에드워드?”

제 이름이 나오자, 에드워드는 의아해하며 대화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존재 여부를 몰랐던 경기장 후문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틈새 사이로 살짝 보이는 경기장 내부에서 블랑카와 테오도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블랑카는 수첩 위에 테오도르가 하는 말을 받아 적고 있었다.

“에드워드를 지목한 이유를 알려 줄 수 있나요?”

둘이 사촌이라고 들었는데, 왠지 모르게 공적인 분위기가 더 강한 질문이었다.

“모든 선수의 실력이 뛰어나겠지만, 어제 제네비브가 에드워드 얘기를 해서 그런가 실력이 궁금하네. 본선에 진출하는 선수들은 작년과 비슷할 거야. 그래선지 서로를 너무 잘 알기도 하고……. 그래서 새로운 선수를 상대해 보고 싶어. 아, 내가 제네비브를 언급한 건 적지 말아 줘.”

아침 연습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테오도르가 운동복 차림으로 대답했다.

“네가 진저 언급하는 건 알아서 잘 자르고 있으니, 걱정 마.”

존댓말을 써 가며 질문하던 블랑카가 자연스럽게 반말로 대답했다.

“그럼 가장 상대해 보고 싶은 선수는 에드워드다, 이건가요?”

“네에, 그렇습니다.”

“그럼 에드워드 선수와 경기할 때 특별히 신경 쓸 점은 있나요?”

“처음 겪는 선수이니 경기 진행 스타일이 낯설긴 하겠지. 예선전 때 유심히 지켜보면서 패턴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공격 위주인지, 아니면 수비 위주인지 확인한 다음에…….”

형식적으로 나오는 대답들을 들은 대로 받아들이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다. 저가 없는 공간에서 자신에 관한 좋은 말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왕이면 습관이 있는지도 찾아보고 싶은데, 그건 어렵겠지. 좋은 선수들은 습관이 거의 없거든.”

테오도르는 에드워드를 경쟁 상대로서 진지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인터뷰하느라 고생했어.”

곧, 물건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뭐 해?”

“아침 먹으러 가야…… 이크, 생각보다 더 늦어 버렸잖아!”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드워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후문에서 떨어졌다. 그가 캐비닛 뒤에 숨고 십여 초가 지나자 쾅! 하고 후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마음대로 해. 진저한테 네가 같이 먹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다고 이야기할 거야.”

다소 경악한 블랑카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알겠어.”

그리고 테오도르는 조금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복도는 곧 조용해졌다. 에드워드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정문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정문에 도착하니, 마침 스미스 감독이 잠겼던 문을 열고 있었다.

“에드워드? 오늘은 휴식이라는 말, 못 들었나?”

바로 스미스 감독을 만날 줄 몰랐던 에드워드는 다소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할 말 있나?”

뭐라고 말해야 하지?

스미스 감독의 재촉 같은 질문에 에드워드는 입을 벙긋거렸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감독님.”

깊게 심호흡한 에드워드는 말을 이었다. 스미스 감독은 마저 말하라는 것처럼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좋은 결과 가져오겠습니다.”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에드워드는 스미스 감독의 대답을 듣는 대신, 펜싱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해야 할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속에 얹힌 응어리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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