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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37화 (37/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37화

* * *

제네비브의 하루는 다소 이르게 시작되었다.

잠들기 전까지 원작에서 ‘밀포드’라는 사람이 나오는지 기억해 내려고 했지만, 색바랜 기억에 뚜렷한 단서는 없었다.

“없어서 다행인 건가…….”

제네비브가 작게 중얼거렸다.

“네?”

머리칼에 말린 래그 롤(Rag Roll)을 풀던 보아르네 가문의 하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니야. 조금 피곤하네.”

제네비브는 말을 돌렸다.

“잠자리가 불편하셨나요? 시차 때문일까요?”

“요즘엔 한 시간도 시차로 쳐 준다면? 못 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

제네비브는 농담을 섞어 가며 하녀를 안심시켰지만, 하녀는 진지하게 카모마일 차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아가씨, 블라이스 도련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오웬이 넓은 보폭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멀끔한 모습이었는데, 상아색 셔츠를 입은 데다 해가 서쪽에서 뜨기라도 했는지 첫 번째 단추까지 잠근 상태였다.

하지만 단정한 외관과 다르게 오웬이 풍기는 분위기는 평소보다 더 반항적이었다. 제네비브는 불만으로 가득한 눈빛과 나잇값을 못 하고 튀어나온 저 입이 그 이유라고 생각했다.

“웬일로 옷을 제대로 갖춰 입었대?”

“아버지가 스테판을 보내셨어.”

“……아.”

오웬의 불만을 이해하는 데 그 이름 하나면 충분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스테판이라니! 아침부터 죽는 줄 알았다니까? ‘도련님, 옷은 제대로 입으셔야 합니다’, ‘도련님, 블라이스 가문의 이름을 먹칠하지 마십시오’…….”

“결국 스테판까지 불렀구나…….”

스테판은 블라이스 가문의 총집사였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다니는 아들의 감시책으로, 블라이스 백작은 그를 타국까지 데리고 오는 강경책을 쓴 모양이다.

예(禮)가 귀족이 갖춰야 하는 최고의 미덕이라 여기는 스테판과 자유롭기 그지없는 오웬이 맞을 리 없었다.

한숨을 푹푹 쉬던 오웬은 문밖에 얼굴을 내밀고는 스테판이 쫓아왔는지 확인했다.

“설마, 여기까지 오겠어?”

“네가 스테판이 어떤 사람인지 까먹은 모양이구나.”

끈질기게 달라붙던 집사가 쫓아오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오웬은 목깃 부근을 잡아당겼다. 목 주변이 느슨해지자, 그의 얼굴에서 비로소 해방감이 읽혔다.

“이런. 근데, 넌 왜 얼굴이 어두워?”

오웬기 테이블 위의 샌드위치를 먹으며 탄식했다.

“어제 테오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뭐라는 거야.”

오웬의 눈빛에서 장난기를 읽은 제네비브는 눈을 굴렸다.

“분위기 풀자고 하는 말이지. 근데, 정말 무슨 일인데? 열차 안도 아니고 아카데미에서 네가 이런 얼굴을 하는 게 말이 돼? 축 처져서는. 마이언이라면 끔뻑 죽는 애가…….”

오웬이 속사포처럼 말했다.

“흠…… 테오도르가 아니라면, 에드워드?”

하녀가 길게 나열해 놓은 팔찌를 고르던 제네비브의 손은 잠깐 멈칫했다.

“에드워드가 뭐라도 했어?”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은 오웬이 집요하게 물었다.

‘남의 사정을 함부로 떠들고 다니면 안 되지만…….’

제네비브는 고민했다. 말을 아껴야 할 상황인 건 알지만, 어제 만난 밀포드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아니, 알아야만 했다.

‘아본리아 사람이라면 아본리아인이 잘 알지 않을까?’

‘밀포드’는 카르디르나 아본리아에서 볼 법한 성씨였고, 모국 귀족 족보라면 질리도록 외운 제네비브의 기억에 ‘밀포드’라는 성씨가 없는 걸 미루어 보아 아본리아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오웬, ‘밀포드’라고 들어 봤어?」

제네비브가 공용어로 물었다.

별안간 튀어나온 공용어에 하녀는 최대한 못 들은 척하며 그녀의 손목에 팔찌를 채워 줬다.

귀족이 평민 계급이 못 알아듣는 공용어를 입에 올린다는 건 대화 내용을 상대가 아닌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밀포드?」

「응. 아본리아 귀족 중에 ‘밀포드’라는 가문이 있는지 궁금해.」

「……글쎄, 그런 가문은 들어 본 적 없는데. 신생 가문인가? 아니면, 몰락 귀족?」

오웬이 전혀 모르겠다는 투로 말을 이어 갔다.

「물어볼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내가 아는 가문은 여섯 개밖에 없어. 블렛, 블라이스, 로이드, 카터, 헤이븐, 레이닌…….」

오웬은 대륙에 사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 번은 들어 봤을 법한 굵직한 가문만을 읊었다.

「족보 안 외우고 다녀?」

「굳이 알아야 하나? 내가 작위 승계를 받을 것도 아닌데.」

오웬은 다소 뻔뻔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차남인 그가 가문을 물려받을 일은 없었다.

「왜, 지금 밀포드 때문에 이러는 거야?」

「뭐래…… 아니야.」

제네비브는 둘러대면서도 오웬이 안 믿을 걸 알았다.

하녀가 제네비브의 치마 밑단을 펴 줬다.

「가문은 나보다 제임스가 더 잘 알걸? 아침 먹으면서 물어봐.」

「……그게, 있지. 이거, 너랑 나만 알고 있으면 안 돼?」

말이 이곳저곳 새어 나가서 좋을 건 없다. 오웬은 미덥지 않은 눈으로 제네비브를 봤지만, 고맙게도 이유를 캐묻는 대신 수긍했다.

「그래도 언젠간 알려 주긴 해야 할 거야.」

그가 인심 썼다는 어조로 대꾸했다.

「그럴게.」

제네비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웬의 에스코트를 받아, 방을 나섰다.

* * *

제임스는 미리 도착해, 로비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전날 밤 밀포드가 앉은 곳과 똑같은 자리였다. 어제 일이 다시금 떠올라, 제네비브는 얼굴을 굳혔다.

“친애하는 동생아, 내가 말하기도 전에 제임스가 먼저 알아채겠어.”

오웬이 팔꿈치로 제네비브의 팔을 툭툭 쳤다. 제네비브는 지적을 받고서야 표정을 풀었다.

“제임스~ 데리고 왔다.”

오웬이 긴 팔을 허공에 휘적대며 손을 흔들었다.

“블랑카는?”

“기삿거리 따러 갔어.”

“이 아침부터?”

“미리 가 있으라네. 이번 특집 기사는 다른 사람 좀 다뤘으면 좋겠다…….”

제임스가 말끝을 흐렸다. 그 안에 내포된 진심을 알아채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 크림색 유니폼을 입은 엘리베이터 보이가 친절한 미소와 함께 층수를 물었다. 일찍 나온 덕에 사람은 없었다. 승강기에서 내리기 전에 오웬이 대표로 엘리베이터 보이에게 은화 한 잎을 건넸다.

행사 기간 동안 머무는 손님들은 룸서비스나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초대된 이라면 누구든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했다. 식당은 주로 뷔페식인데, 미식의 나라답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즐비했다.

일행이 더 있다는 말을 들은 웨이터는 그들을 6인 테이블로 안내했다.

셋은 아무도 없는 야외 테라스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특혜를 얻었다. 제네비브는 잘못 알아들은 직원의 실수를 정정해 주고 싶었지만, 오웬은 넓게 앉아서 나쁠 거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오전 7시의 푸르스름한 하늘과 야외 테라스 아래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마이언 아카데미의 전경은 아름다웠다. 아직 공기 중에 남은 차가운 새벽 공기와 푸른빛이 깔린 마이언 아카데미는 그런대로 운치 있었다.

제네비브는 오웬과 같이 수프와 샐러드로 가볍게 식사를 시작했다. 오웬과 어느 샐러드 소스가 맛있냐는 무의미한 토론을 나눌 때, 제임스는 저녁 식사에나 어울릴 법한 비프 웰링턴 다섯 개를 접시 위에 담아 왔다.

“사람이 평소보다 많은 것 같더라.”

제임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원래 여덟 시부터 많아지지 않아?”

오웬이 새삼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카터, 좋은 아침이야.」

그리고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어느 용감한 여학생이 테이블에 다가와 제임스에게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파인트리 서클 행사 때마다 봐 온 익숙한 풍경이지만, 아침 식사 자리에서 적극적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안녕, 이름이…….」

「농담도 참. 우리, 저번 봄 사냥 대회 때도 만났잖아. 바우어, 율리아 바우어야.」

「그렇구나. 못 알아봐서 미안해.」

「지금부터 알아 가면 되지.」

제임스가 기억하지 못한 데 자존심도 안 상하는지, 율리아는 능청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한편, 제네비브는 수프를 떠먹으며 어디선가 율리아를 봤다고 생각했다.

‘아.’

어제 만찬에서 제임스의 연회 파트너가 되고 싶다고 말한 외국인 학생이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고기를 먹으려던 제임스는 나이프를 내려놓고는 친절한 목소리로 율리아를 상대했다.

두 사람은 공용어로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런 사태를 피하고자 일찍부터 아침을 먹었던 건데, 제임스의 식사 시간이 어떻게 알려진 건지 전보다 사람이 많아진 기분이었다.

다가오는 건 대부분 타교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모국 억양이 조금 섞인 제국어로 제네비브와 오웬에게도 예의상 몇 마디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두 남매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진정한 목적은 제임스임을 알았다.

그들은 제임스에게 가벼운 인상이라도 남기고 싶어 했고, 지금의 대화가 훗날 좋은 인연으로 발전하기를 고대했다.

굳이 의도를 숨기려는 사람도 없었다. 제임스가 이번 행사를 끝으로 졸업하는 만큼, 만날 기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에 몇몇은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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