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38화
식당에 도착한 후로 20여 분이 지난 지금까지 아침에 손도 못 댄 제임스는 입꼬리를 올려 가며 친절하게 대했지만, 냉정하게도 ‘자리가 남았는데 합석할래?’와 같은 권유는 하지 않았다.
“내일부터 방에서 먹을게.”
제임스는 한참이나 신사답게 행동하고서야 퍽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오웬이 그의 등을 두들기며 위로했다.
제임스가 다시 식사를 재개할 때쯤에 맞춰 블랑카가 왔다. 예상치 못한 사람과 함께.
“우드빌!”
오웬이 반가운 목소리로 아는 이름을 불렀다.
“…….”
테오도르를 벌써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던 제네비브는 포크를 떨어트릴 뻔했다.
“오랜만이다.”
테오도르가 산뜻하게 말했다. 제네비브는 그제야 블랑카가 새벽부터 인터뷰할 사람이 그녀의 사촌밖에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부탁해서 온 건데, 자리가 없는 건 아니지?”
“자리야 넘치지.”
제네비브가 들을락 말락 한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문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무섭게 제네비브는 자신이 한 말실수를 깨달았다. 테오도르가 불편해진 게 이젠 몸에 배어 버린 탓이다. 긴 세월 동안 심어진 습관을 떨쳐 내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편한 자리에 앉아.”
그나마 어제 자연스럽게 나눈 대화를 되새긴 덕에 제네비브는 평온한 모습을 꾸며 내는 데 성공했다.
다행히 블랑카는 양심껏 테오도르를 제네비브와 먼 자리에 앉혔다. 다른 두 남자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테오도르는 합석하자마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미안, 테오가 같이 먹고 싶다는데 거절할 핑계가 생각 안 나서.”
남자들이 저들만의 대화에 빠져든 걸 확인한 블랑카가 작게 사과했다.
“……아니야. 졸업 뒤에도 봐야 하는데 매번 피해 다닐 수는 없지.”
제네비브는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마흔이 되도록 테오도르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제 모습을 상상하니 꼴사나웠다. 어렸을 때 느꼈던 부끄러움은 빨리 청산해야 했다.
어제와 달리, 제네비브는 굳이 테오도르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분위기는 괜찮게 흘러갔다. 묽디묽은 혈연이 이어 준 연은 의외로 끈끈했다.
“이번 여름 대회가 마지막이란 게 안 믿기네.”
제임스가 감상에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이튿날이라 이르지 않나 싶으면서도 제네비브는 그 말에 동의했다. 앞으로도 대회는 계속 열리겠지만, 졸업 후에 참석하는 게 지금과 똑같을 리 만무했다.
“더는 학생 신분으로 참여할 수 없으니까. 당장 다음 달이 졸업 시험인데. 마이언은 언제 졸업 시험 봐?”
블랑카가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우린 이미 2월에 다 봤어.”
“부럽다! 그럼 졸업식만 남은 거잖아. 왜 칼리지는 여름 대회 이후에 보는 건지!”
오웬이 불만스럽게 툴툴댔다.
“오웬, 마이언은 시험이 어렵잖아. 우린 시험장에 얼굴만 비추면 웬만해선 합격이고.”
제네비브는 오웬이 펼친 주장에서 오류를 지적했다.
“난 되레 칼리지가 부럽던데. 재시험을 안 봐도 되잖아.”
마이언 아카데미는 2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 뒤에 곧바로 졸업 시험을 본다.
매도 먼저 맞아야 낫다는 게 중론이지만, 그 대신 마이언 아카데미는 낙제하는 과목이 통과하는 과목보다 많기로 악명 높았다. 졸업 시험을 다 보더라도 남은 학기 동안 낙제한 과목을 통과할 때까지 재시험을 치러야 했다.
“너는 재시험 봐?”
“블랑카, 테오가 재시험을 보겠어?”
오웬이 다소 맹신하는 어조로 대신 대답했다.
“통치학 하나 있어.”
테오도르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 대답에 블랑카는 내기에서 이긴 사람처럼 으스대다, 재시험을 봐야 하는 당사자를 보고는 사과했다.
“어딜 가나 통치학이 문제네…….”
오웬은 괜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닫고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테이블은 활기를 조금 잃었다. 모두 그때의 일을 생각했다.
“왜? 칼리지도 통치학이 어려워?”
“엄격한 교수님이 계셨는데, 조금 안 좋게 그만두셔서~.”
다행히 테오도르는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통과 못 하면 유급인 거야?”
최적의 순간을 재던 제임스가 대화의 흐름을 다시 돌려놓았다.
“아니, 6월에 마지막 재시험이 있어. 그때까지 재시험 볼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으…… 밥 먹는데 시험 말고 밝은 얘기하자. 여름 대회인데 대회 얘기를 해야지! 그래서, 펜싱 예선전이 언제였지?”
“이틀 뒤야.”
“고생깨나 하겠는데~.”
오웬이 블랑카를 놀리듯 말했다.
‘에드워드는 내일 잘하려나.’
티격태격하는 오웬과 블랑카를 뒤로하며 제네비브는 거연히 에드워드를 떠올렸다.
그가 주전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유는 여름 대회에 오기 위한 꼼수였지만,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하기보단 경기 자체를 즐겼으면 했다.
‘이기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긴장만 안 했으면 좋겠다.’
오늘 에드워드를 만나면 해 줄 말을 머릿속으로 고르던 제네비브는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곧 졸업한다는 씁쓸함을 느낀 친구들은 급기야 대체할 행사를 찾기 시작했다.
“10월 초에 영지에서 사냥제가 열려. 물론 서클 행사처럼 대단한 건 아니고, 친인척과 친구들끼리 작게 하는 거야.”
“졸업하면 한동안 카르디르에서 머물 것 같은데. 나, 가도 돼?”
오웬을 필두로 하나둘 참여 의사를 밝혔다. 제네비브도 휩쓸려 몇 개월 뒤에 있을 사냥 대회에 응했다.
디저트로 나온 과일을 먹으며 대화에 적당히 참여하던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와 약속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게?”
“응, 에드워드 만나기로 해서.”
일정을 짤막하게 알린 후, 제네비브는 급하게 테라스를 떠났다.
너무 급하게 떠난 나머지, 제네비브는 테오도르가 자신이 떠난 곳을 조금 아쉬운 눈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 * *
사람이 와글와글한 승강기를 본 제네비브는 약속 장소를 학생 층 로비로 정한 어제의 자신을 원망했다.
‘내가 왜 3층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아침에 사람이 많은 걸 알았음에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생각하지 못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표시기 바늘은 제네비브가 지금 시간을 얼마나 버리고 있는지 몸소 체감시켜 주었다.
엘리베이터는 도통 올 기미가 안 보였다. 바늘은 5분에 한 번꼴로 느리게 움직였다.
승강기에 타는 걸 포기하고 계단으로 향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 갔다. 발을 동동 굴리며 끝까지 기다리려고 했던 제네비브도 결국 계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은데, 다들 어디로 간 건지 계단은 여유로웠다.
덕분에 약속 시간은 한참 전에 지나갔다. 제네비브는 편리함을 포기하지 못한 자신을 한심하게 여겼다.
넓고 높은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햇빛은 이제 따뜻했다. 서늘하던 아침 공기가 머나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강한 빛이었다. 제네비브는 콧잔등을 찡그리다가 손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계단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건만, 위로 인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단정한 사람이네’ 같은 짧은 감상을 내린 제네비브는 곧 그가 아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햇빛을 받아 언뜻 금색처럼 보이는 연갈색 머리카락과 단정한 옷차림.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
제네비브는 곧바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드워드는 소리의 출처를 찾으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위층에서 자신을 부르는 줄 아는 것 같았다.
“이쪽이야.”
에드워드가 뒤를 돌아보자, 제네비브는 활짝 웃으며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머리끝에 해가 걸려 얼굴은 제대로 안 보였지만, 제네비브는 그가 에드워드임을 확신했다.
“선배?”
뜻밖인 곳에서 그녀를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에드워드가 의아한 목소리로 확인했다.
종종걸음으로 내려온 에드워드는 제네비브 앞에 섰다. 그의 몸이 만들어 낸 그늘이 따가운 햇살을 막아 줬다.
그제야 시야가 편해진 제네비브는 손을 내리고 그와 눈을 맞췄다.
“나갔다 온 거야? 길은 안 어려웠어?”
“네, 잠깐……. 선배들 말대로 길이 어려워서 조금 헤맸어요.”
“첫날에 조금 헤맨 거면 선방한 거야. 열차 때처럼 길 다 외운 거 아니야?”
농담하듯 건네긴 했으나, 에드워드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못 외웠어요. 구조가 비슷해서 길이 헷갈리더라고요. 펜싱 경기장 가는 길만 대강 기억했어요. 선배는 식사하셨어요?”
“먹고 돌아오는 길이야. 엘리베이터가 너무 늦게 오더라고……. 아침에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까먹었지 뭐야.”
여전히 대기 인원이 많은 엘리베이터 앞을 상상하니 기력이 빠져 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다. 아침은 먹었어?”
꼬르륵—.
그의 배에서 요동치는 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
에드워드가 얼굴을 붉혔다. 하필 계단에 사람도 없었던 탓에 모르는 척해 주기도 어려웠다.
“내일부터 예선인데, 안 먹으면 어떡해.”
제네비브가 걱정하는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 시간이 없었어요.”
에드워드는 저가 밥을 먹든 안 먹든 신경 쓰지 않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제네비브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내 방에 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