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39화
“……네?”
갑작스러운 권유에 에드워드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 방에 식사로 때울 만한 게 있을 거야. 샌드위치, 좋아해?”
옷을 갈아입는 동안, 하녀들이 가벼운 먹거리를 (비록 먹은 사람은 오웬뿐이지만) 준비했다. 손님들로 가득한 식당이나 전날 미리 주문을 넣어야 하는 룸서비스보다 합리적이었다.
“커피도 있고……. 거르는 것보단 좀 먹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제네비브가 학생 대표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체력 소모가 많은 스포츠 특성상 먹어야 힘이 나는 법이다.
‘안 먹으면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또래보다 체격이 좋은 사람에게 그런 걱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 모르나, 언제나 복병은 있기 마련이다. 든든하게 먹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좋아요.”
“잘 생각했어! 샌드위치만 먹고 아카데미 돌아다니기로 하자.”
제네비브는 활짝 웃으며 에드워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침을 먹고 온 사이, 방은 깨끗해졌다.
“달링 아가씨,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손님도 오셨군요.”
쭈뼛쭈뼛 방 안으로 들어오는 에드워드를 보며 헤르멜이 말했다.
“난 먹었는데, 얘가 못 먹어서 아침에 준비한 샌드위치를 다시 내어 줄 수 있을까? 커피도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헤르멜이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지시대로 움직였다.
“저기에 앉으면 돼.”
제네비브는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에드워드는 작은 목소리로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그녀가 권유한 자리에 앉았다.
얼마가 지나자 하녀가 트레이를 들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별다른 부탁을 하지 않았음에도 핑거 푸드 크기로 작게 썰린 아침과 다르게 샌드위치는 큼직했고, 쿠키와 크래커도 준비되었다.
“이건 오이 샌드위치라서 먹어도 배부르지는 않을 거야. 클럽 샌드위치는 이거고…… 커피는 내가 따를게. 고마워, 루안느.”
하녀가 커피 주전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샌드위치 먼저 먹고 있어. 커피는 식히고 줄게.”
에드워드가 샌드위치를 안 먹고 기다리자, 제네비브가 말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그녀는 커피를 잔에 채웠다. 온도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선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제네비브를 물끄러미 보던 에드워드가 말했다.
“뭐가 궁금한데?”
“선배는 제가 커피를 식혀 먹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 이런…….’
꽁꽁 숨겨 온 비밀을 들킨 기분이다. 저의 가장 큰 치부가 드러난다면 꼭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질문 하나가 요점을 정확히 끄집어냈다. 하지만 동요해선 안 된다. 누구나 들 법한 의문에 과민 반응하면 그것이야말로 저가 수상하다고 광고하는 꼴이니까.
표정은 괜찮은가? 제네비브는 은수저에 비친 제 모습을 재빨리 확인했다.
“그건 말이지.”
다행히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커피 잔을 에드워드 쪽으로 밀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그랜드 익스프레스에서 뜨거운 커피를 못 마시는 모습을 봤다고? 하지만, 그런 변명을 하기엔 처음 커피 타 준 날도 지금처럼 식혀서 줬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줄걸. 누구를 위한다고!’
깊숙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제네비브는 그럴 마음의 공간이 없었다. 과거에 베푼 친절이 실수가 될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짧은 문장을 말하는 동안, 머리를 스친 생각은 수백 개였다. 하지만 그럴듯하게 들리는 답은 없었다. ‘빙의’니 ‘소설 속’이니……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정신 병원에 들어갈 게 분명하다. 저 커피를 제 손에 떨구면 답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그녀가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 선정한 답은 ‘원래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따라 준다’였다. 저 때문에 혀가 데인 오웬에게 미안하고, 이보다 부실한 답도 없을 것 같지만.
똑똑—.
에드워드가 제 말을 믿을지 안 믿을지 고민하던 중, 완벽한 순간에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제네비브는 기쁜 티를 최대한 숨기며 들어오는 걸 허락했다.
“달링 아가씨. 달링 후작부인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헤르멜이 말했다.
“콜록.”
에드워드가 사레들린 기침 소리를 냈다.
“괜찮아?”
제네비브는 냅킨을 건네며 물었다.
“감사합니다……. 나가 있을까요?”
“괜찮아. 여기 있어도 돼.”
에드워드가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달링 후작부인이 들어왔다.
“엄마!”
제네비브는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교환하고서야 두 사람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본 게 3월인데, 어떻게 기다리니? 지금이면 식사도 끝냈을 것 같아서 찾아왔지.”
“아빠는요?”
“아서는 앓아누웠어. 마이언은 도로를 새로 포장할 계획이 아예 없는 건지……. 네 아버지가 올 때마다 이러니, 마이언에 기부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구나. 그래도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하지 말렴. 오, 손님이 있었구나.”
레베카 달링. 그러니까, 달링 후작부인이 에드워드를 보며 말했다.
“아, 이쪽은 제 후배예요.”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소개했다.
“……아, 안녕하세요. 세인트 존 칼리지 2학년 에드워드입니다.”
에드워드가 자못 긴장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오, 만나서 반갑단다. 편하게 달링 부인이라고 부르렴. 우리 딸이 선배 노릇을 잘해 주니?”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에드워드는 여전히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엄마, 일단 앉아서 얘기해요.”
쉴 틈 없는 대화가 시작되려는 걸 감지한 제네비브가 말했다.
“오! 내 정신 좀 보렴! 그래, 그래. 앉아야지.”
원래 앉던 자리에 달링 후작부인을 앉히고, 제네비브는 에드워드 옆에 앉았다.
“엄마가 새로운 사람만 보면 말이 많아져서 미안해.”
“아니에요.”
흡사 세인트 존 칼리지의 초빙 교수를 보듯, 에드워드는 달링 후작부인이 하는 모든 말을 경청했다.
에드워드가 굳었다는 걸 알아챈 달링 후작부인은 농담으로 서먹한 분위기를 풀었다. 처음 보는 딸의 후배에게 흥미를 느낀 달링 후작부인은 친근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사교계에서 수십 년 구른 사람답게 그녀는 에드워드의 사정을 빠르게 눈치챘다.
달링 후작부인은 호구 조사를 하는 대신, 에드워드를 알아 가는 질문 위주로 대화를 진행했다.
“그럼, 학교 대표 자격으로 참가했다는 거니?”
“네, 펜싱 대표로 나왔습니다.”
“펜싱이 낫지, 펜싱이 나아……. 폴로는 정말 위험하단다. 정말이지 작년 일만 생각하면…….”
달링 후작부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자니 제네비브는 조금 미안해졌다.
“종목을 잘 선택했구나.”
“……네.”
하지만, 아직 달링 후작부인에게 적응을 못 한 에드워드는 정중하고도 짧게 대답했다. 제네비브는 굳이 ‘내 덕에 에드워드가 여기에 올 수 있었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그간 제네비브가 누구를 초대한 걸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매번 같은 아이들만 봐서 궁금한 게 많아.”
호호, 달링 후작부인이 우아하게 웃었다.
“그래서 제네비브, 오웬과는 잘 지내고 있니?”
달링 후작부인이 염려된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보다 오웬에게 더 관심 있는 거 아니에요?”
제네비브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부디 칼리지에서까지 사촌이랑 싸운다고 하지 말아 주렴……. 에드워드, 제네비브가 학교생활은 잘하고 다니던?”
달링 후작부인이 농담조로 물었다.
“선배는 상냥하시고…… 친절하세요. 근데…….”
에드워드가 잠깐 머뭇거렸다.
“선배, 블라이스 선배와 사촌이셨어요?”
그가 다소 충격 받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
제네비브는 짧게 탄식했다.
지금 와 생각하니 에드워드에게 저와 오웬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었다. 지금껏 말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 이야기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외가 쪽 사촌이야. 몰랐어?”
“네, 처음 들어 봐요.”
“그럼, 여태까지 친구로 알고 있었던 거야?”
잠깐 넋을 놓던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맞긴 맞는데, 사촌 관계기도 해. 내 외숙이 블라이스 백작이시거든.”
제네비브는 짤막하게 가계도를 설명했다.
‘더 깊은 사이로 오해를 안 한 게 다행이지…….’
에드워드가 저와 오웬을 그렇고 그런 사이로 해석할 뻔했다고 생각하니 토가 쏠렸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던 달링 후작부인이 말했다.
“내가 눈치 없이 말이 많았구나. 너희도 일정이 있을 텐데. 오, 맞아. 에드워드, 내일 여유가 되면 가든파티에 오지 않으련? 폴로 경기장 옆에서 열리는데 재미있을 거란다.”
달링 후작부인이 명랑하게 물었다. 그녀의 제안은 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네, 초대 감사합니다.”
그렇게 에드워드는 달링 후작부인의 초대에 응했다.
“그것참 잘됐구나! 부담 없이 오면 된단다.”
그녀가 작은 환성과 함께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에드워드, 미안하지만 잠깐 제네비브와 대화를 나눠도 되겠니? 정말 잠깐이면 된단다.”
“그럼요. 선배,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에드워드는 예의 바르게 대답하곤 응접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