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40화
“무슨 일이에요?”
응접실 문이 닫히자, 제네비브가 물었다.
달링 후작 부인은 딸의 옆으로 와 앉았다. 대화 내내 싱글벙글 미소를 유지하던 그녀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에드워드라는 아이…… 평민이니?”
달링 후작 부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불만’이 아닌 ‘걱정’에 가깝다는 걸 지각한 제네비브는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가 그 아이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좋아. 나쁜 애처럼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순한 것 같구나. 애석하게도 그게 더 큰 문제지. 휘둘리기 쉬우니 말이야. 저 아이가 너와 어울리게 되면서 겪게 될 일들을 생각해 보렴.”
“엄마.”
“나도…… 아니, 아니구나. 하여튼, 친구는 괜찮아.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 난 네가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내일 가든파티에서 잘 보렴. 에드워드가 아니라, 그를 대하는 다른 이들의 태도를 말이야. 그리고 그걸 에드워드가 감당할 수 있는지 잘 생각해야 해.”
달링 후작 부인이 제네비브의 손을 포개며 말했다.
‘엄마, 에드워드는 황태자예요…….’
제네비브로서는 지금만큼 에드워드의 정체를 밝히고 싶은 순간도 없었다.
만약 그가 정말 평민이라면 제네비브와 달링 후작 부인의 걱정이 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훗날 흑화해서 ‘학교 방화’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저가 졸업하기 전까지라도 좋으니 그의 학교생활이 조금이라도 순탄해지기를 바랐다.
“엄마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에드워드는 결국 여자 주인공을 좋아하게 될 테니까.
제네비브는 뒷말을 삼켰다.
“이해해 줘서 고맙구나.”
달링 후작 부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헤르멜의 안내를 받으며 에드워드는 방 밖으로 나왔다. 이후 문에 기댄 채 조금 전 무엇을 들은 건지 돌이켜 생각했다.
“선배와 오웬 선배가 사촌이라고…….”
에드워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도저히 안 믿긴다는 듯 다시 똑같은 문장을 읊었다.
두 사람이 유독 친해 보인다는 생각은 언제나 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가족이기 때문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잠시나마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과거의 자신이 창피해졌다.
제네비브 달링과 오웬 블라이스가 사촌이다, 라는 명제에 정신이 치우친 나머지 에드워드는 저 방 안에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무슨 짓을…….”
에드워드는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조금 전 달링 후작 부인과의 대화는 처참했다. 이런 상황을 전에도 몇 번 경험했는지, 후작 부인은 능숙하게 대화를 홀로 이어 갔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고를 장착해 나쁘지 않은 대화였다고 생각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정도였다.
에드워드가 자괴감에 속으로 땅굴을 파던 차,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레 열린 문에 에드워드는 놀라서 몇 걸음 떨어졌다.
열린 문 사이로 제네비브가 나타났다.
“많이 기다렸지?”
그녀가 미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대화는 잘 나누셨어요?”
후작 부인이 저와 어울리지 말라고 이야기했어도 할 말 없었다.
“응.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네가 잘생겼대.”
제네비브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그 문장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
마침내 이해하게 되었을 때, 사고가 멈췄다. 얼굴은 주체할 수 없이 붉어졌고, 공기가 덥게 느껴졌다.
“부끄러워하는 거야?”
제네비브가 에드워드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물었다.
만약 에드워드가 이와 같은 칭찬에 익숙했다면 제네비브의 눈이나 손길에 대놓고 담긴 장난기를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그,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어서요…… 제가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도 없고……. 제가 잘생겼다뇨.”
하지만 에드워드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잘생겼다’나 그와 유사한 말을 들은 적 없었다. 그는 자신이 ‘눈을 찌푸리지 않을’ 정도로만 생겼다면 여한이 없을 사람이었다.
에드워드는 손까지 저어 가며 부정했다. 달링 후작 부인이 그런 말을 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장난이죠?”
에드워드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솔직히, 우리 엄마가 한 말은 아니야.”
제네비브가 호탕하게 웃었다.
‘……역시.’
에드워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게 좋은 일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근데, 엄마도 널 좋게 보고 있어. 그리고…….”
제네비브는 잠깐 뜸을 들였다. 마치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그녀는 입을 뗐다.
“너, 잘생겼어.”
제네비브가 맑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몇 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 끝이 타들어 가는 게 느껴졌다.
에드워드는 제대로 된 부정도 못 했다. 그러다 간신히 장난치지 말라고 이야기하자, 제네비브는 진지한 목소리로 장난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1층에 도착해서야 에드워드는 조금 진정되었다. 얼굴은 아직도 화끈거렸지만, 몇 분 전과 비교하면 많이 양호해진 편이었다.
“어디서부터 둘러보는 게 좋을까……. 메인 홀은 천장화가 아니면 볼 게 없어서 재미가 없는데.”
에드워드는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지나친 메인 홀은 아름답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흠……. 그럼, 예술의 방?”
“전 어디든 다 좋아요.”
그렇게 대답한 사람치고 에드워드의 두 눈은 ‘예술’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반짝거렸다.
“그럼, 예술의 방으로 가자. 사슴 조각상 보고 본관 둘러보면 되겠지.”
제네비브는 일정을 짤막하게 소개했다.
에드워드는 사슴 조각상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조용히 제네비브의 뒤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곧 제네비브가 안내한 ‘예술의 방’은 이름과 다르게 방이 아닌 복도였다. 야외 복도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전부 조각돼 있었다.
오로지 신에게 바치는 디아스(Δίας) 시대 예술의 집합체였다.
경외감이 들게 만드는 거대한 규모, 이 세상에 인간이란 게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 깨닫게 만들면서도 신의 은총이 피부에 닿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따스함.
신앙심 하나로 이만한 복도를 만들어 냈다는 게 경이로웠다.
“…….”
에드워드는 어느 한 부분도 놓치기 싫었다.
성전 어느 구절을 그대로 묘사한 조각은 신앙심이 그리 깊지 않은 그조차 신의 존재를 다시금 실감하게 했다.
세인트 존 칼리지에 디아스 시기 예술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 규모의 ‘복도’는 없다. 그저 학교에 예술품이 많은 것과 학교 자체가 예술인 것의 차이였다.
“디아스 시기 작품을 좋아해?”
천장에 붙은 그의 두 눈을 간신히 떨어트린 건 제네비브의 목소리였다.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해요. 시대마다 특징도 뚜렷하고, 중시하는 게 달라서 알아 가는 재미가 있어요.”
“그래? 디아스 시기 특징이 뭐야? 난 프락티스 시기를 더 좋아해서.”
제네비브가 천장 끝까지 조각된 벽을 보며 말했다.
“디아스 시기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이 만든 모든 게 신을 위한 헌정이에요. 그때는 비를 성수(聖水)라고 생각해서 신성하게 여겼대요. 저기, 조각을 잘 보면—.”
에드워드는 굴곡지게 조각된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빗물이 흐르는 통로가 있는데, 물살이 그리 세진 않거든요. 빗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도록 설계하고 조각해서 그래요. 바닥에 흐르는 물줄기는 그렇게 모인 빗물이고요.”
에드워드는 신나게 재잘거렸다.
이후, 그는 노브 시기와 프락티스 시기 예술이 디아스 예술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고, 또 현대 예술에선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했네요…… 지루하셨죠.”
30분간 혼자 떠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에드워드가 어두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여기 올 때마다 ‘멋지다’라는 말 말고는 아무 생각도 못 했는데, 식견이 넓어져서 재미있었어. 왜, 다들 아는 만큼 보인다고들 하잖아?”
제네비브는 즐거운 목소리로 에드워드가 설명한 걸 본인의 말로 다시금 풀어서 이야기했다.
예술의 방을 전부 둘러본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정원에 데려갔다. 평소 보던 세인트 존 칼리지의 칙칙한 교정과 달랐다.
파릇파릇하게 자란 잔디와 형형색색으로 핀 여름 꽃은 정원에 화사함을 더했다. 연못은 하늘을 반사해 하늘색을 띠었고, 나비들이 살랑거리며 날갯짓을 했다.
찰스 패거리의 인성이 파탄 난 이유가 세인트 존 칼리지의 교정 때문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연못 위를 지나가는 다리 입구 부근엔 수사슴 조각상이 있었다. 사슴은 인사하듯 머리를 숙이고, 뒤로 뺀 앞발은 그 아래에 무언가를 두고 있었다. 뿔은 금으로 만들어졌고, 몸통은 흰 석회암으로 이루어졌다.
다리 위와 조각상 주변으로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다들 누구라 할 것 없이 사슴상을 지나칠 때면 당연하게 조각을 매만졌다.
“마이언 아카데미 명물이야. 수도승들이 2세기에 걸쳐서 조각했대.”
“다들 조각을 만지네요?”
“그치? 조각상 부위마다 의미가 다르거든. 뿔을 만지면 명예를 얻고, 코를 만지면 지혜를, 뒷발을 만지면 다산을, 성전을 만지면— 아, 성전은 저기 앞발 아래에 있는 거야. 행복이 온다고들 해.”
제네비브가 사슴의 코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래서 신입생들은 코를 만지고,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뿔을 만져. 졸업하고 돌아올 때엔 아이를 바라면서 뒷발을 만진다고 해.”
에드워드는 제네비브를 따라 사슴 코를 만졌다.
“성전은 못 만지나요?”
에드워드는 사슴의 뿔과 다리로 가로막힌 성전을 보며 물었다. 애매한 곳에 자리 잡은 성전은 보는 것도 어려웠다.
“손에 닿기 힘들지……. 작년에 오웬이랑 만지려고 했다가 걘 몸이 끼고 나는 물에 빠져서 엄마랑 숙부님이 쓰러질 뻔한 거 있지?”
제네비브가 쿡쿡 웃으며 그때 일을 설명했다.
“어쩌면 굳이 저걸 만지지 않아도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뜻 아닐까? 아니면, 세 가지를 다 가져도 행복은 얻기 힘들다는 뜻일 수도 있고.”
제네비브는 수도승의 의도에 대해 나름의 가설을 세웠다.
“……전 첫 번째였으면 좋겠어요.”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셋 중 하나를 얻는 것도 힘든데, 세 개를 전부 가져도 불행하면 그건 너무 슬픈 일 아닌가.
“나도.”
제네비브가 그 의견에 동의했다.
“이 다리만 건너면 경기장이야. 펜싱 경기장 지름길 알려 줄게.”
부드러운 손이 에드워드를 끌어당겼다.
제네비브가 말한대로 행복이 가깝게 있다면, 아마도…….
“…….”
에드워드는 찰랑거리는 금빛 머리칼을 보며 제네비브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가 뒤돌아보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