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41화
* * *
퍽!
리네아 폰 브리크트가 쏜 화살이 과녁 한가운데 명중했다. 프레스반 아카데미 2학년인 그녀가 여름 스포츠 대회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양궁에서 세인트 존 칼리지는 사탕발림으로라도 경기력이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제네비브가 운 좋게 기자석에 앉은 것치고는 본교는 빠르게 예선에서 퇴장했다.
시원하게 말아먹은 경기를 보던 블랑카는 자신과 동행한 신문 클럽 소속 1학년, 빌헬름에게 경기 기록을 맡기고는 (유력한 우승 후보인 리네아가 그의 누이였다.) 양궁장을 나왔다.
“조정이 나의 희망이다.”
블랑카가 비장하게 말했다. 그녀는 미리 써 둔 양궁 기사를 반납하게 생겼다고 불평하며 수첩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조정은 무난하게 이기겠지.”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제임스가 출전하는 종목은 우승이 확정이었다.
“제임스. 너, 무슨 종목 나간다고 했지?”
“에이트, 무타포어, 싱글스컬.”
“금 세 개는 확정이네.”
블랑카가 냉큼 말했다.
“스포츠에 확실한 건 없다니까…….”
제임스는 난감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다음 문장을 귀담아듣지 않은 블랑카는 흥얼거리며 폴로 경기장으로 향했다.
1부 시합은 렐타 사관 학교와 프레스반 아카데미의 경기였다. 세인트 존 칼리지의 경기가 아니라 그런지 경기를 관람하는 아본리아 귀족은 적었다.
하지만, 익숙한 얼굴도 몇 보였다.
대표적으로.
“형!”
빈센트 카터가 있었다.
천막 그늘 아래서 타국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던 빈센트가 제 동생을 봤다. 오랜만에 보는 카터 소공작은 전보다 더 어른스러워졌다.
카터 공작 부인을 빼다 박은 듯한 제임스와 달리, 빈센트 카터는 부친을 닮아 선이 진했다. 형제가 풍기는 분위기가 다른 탓에 제임스가 빈센트와 형제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도 왕왕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두 형제 모두 잘생겼다는 거다.
귀족들과 나누던 대화에서 능숙하게 빠져나온 빈센트가 동생을 반겼다. 햇빛 아래로 내려오자, 깔끔하게 뒤로 넘긴 지저분한 금발(Dirty Blonde)은 제임스 것과 색이 비슷하게 변했다.
“너희 넷은 지금도 친한가 보군. 좋아 보여.”
빈센트가 헤이즐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우직하게 말했다.
“제임스 성격이 워낙 좋잖아요~.”
“오래가는 친구가 있다는 건 큰 행운이지.”
그가 멋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네비브, 오웬, 그리고 블랑카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빈센트는 따로 대화하려는 듯 제임스를 데리고 갔다.
“빈센트 형, 되게 오랜만에 본다? 작년 사냥 대회 이후로 처음이야.”
“카터가와 블라이스가 왕래는 잦은 거 아니었어? 공동 사업도 늘었다고 들었는데?”
블랑카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를 정보를 꺼냈다.
“가문끼리 교류는 많이 하지, 가문끼리는! 전보다는 정치적인 것 같은데~ 음, 나도 잘 모르겠다!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니, 그걸로 된 거겠지.”
오웬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연스럽게 주제를 바꿨다.
“디저트나 먹자. 제네비브 너, 여기 디저트 먹고 싶었다면서.”
‘디저트!’
그동안 못 먹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제네비브에게 있어서 가든파티의 디저트는 언제나 그림의 떡이었다. 경기 전에 먹으면 멀미를 했고, 말 위에서 한 시간을 달리다 보면 입맛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옹기종기 예쁘게 전시된 디저트를 보자니 그간 못 먹었다는 게 다시금 억울해졌다.
“여기 휘낭시에도 맛있다?”
“진저는 마카롱을 더 좋아해.”
제네비브는 두 사람이 추천한 디저트를 열심히 접시에 담았다.
사람들이 안 보는 틈을 타 작은 쿠키 하나를 입안에 넣던 중, 어느새 빈센트와 대화를 마친 제임스가 테이블 가까이 왔다.
“무슨 얘기했어?”
반대편에서 오웬이 물었다.
“특별한 건 없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일 도착하시고, 주말에 집 좀 들르래. 그러니까 블랑카, 나 보고 배신자라고 그만해.”
제임스가 과일 꼬치로 블랑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접시 위에 과일과 디저트를 쌓던 그는 그마저도 부족했는지 옆 테이블로 가서 고기까지 담아 왔다.
“너무 많이 담는 거 아니야?”
제네비브는 음식이 산처럼 쌓인 제임스의 접시를 보며 물었다.
“내일 경기인데, 먹을 게 있을 때 먹어야지.”
“배 터지겠―.”
“제임스.”
예고없이 끼어든 목소리가 제네비브가 말을 끝맺지 못하게 했다.
“어머나, 실수로 이름을. 카터, 여기서 다 보네.”
조신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제네비브는 얼굴을 빼꼼 내밀어 제임스의 대화 상대를 확인했다.
율리아 바우어였다.
그녀는 어제와 다르게 본격적으로 꾸몄다. 자칫하면 데뷔탕트에 참석하는 것처럼 보일 법한 드레스는 규칙을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원체 타고난 외모 덕분일까, 그리 과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오늘 아침에 못 봐서 걱정했잖아. 식사를 늦게 한 거야?”
오늘 아침에 저와 오웬 주변을 서성거렸던 이유가 제임스 때문이었나 보다.
이런 상황이 싫어 제임스가 방에서 아침을 먹기 시작한 건데, 이를 알 리 없는 율리아는 긴 속눈썹을 천천히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렴 어때, 봐서 너무 좋다.”
예쁘게 반으로 접은 물색 눈동자에선 (절대로 제임스와 긴밀한 관계가 되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엿보였다. 상대가 제임스만 아니었다면, 율리아는 저 한마디로 어떤 남자든 손에 넣었을 테다.
“슬슬 가 봐야겠다…….”
제네비브는 자연스럽게 현장을 벗어나려고 했다.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그런지 피해 줘야 할 것 같았다.
“……!”
하지만 제임스는 제네비브의 생각을 기민하게 알아채곤 율리아가 못 보도록 그녀의 옷소매를 잡았다. 괜히 조정 팀 캡틴이 아니라는 것처럼, 한 걸음이라도 떼면 옷이 찢어질 듯한 악력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데!’
제네비브는 속으로 제임스에게 원망의 말을 퍼부으며 가만히 초콜릿 분수 옆 딸기 개수를 셌다. 정수리 뒤로 눈치 없이 안 가고 뭐 하냐는 율리아의 따끔한 눈빛이 느껴진다.
율리아가 한숨을 내뱉더니 (제네비브는 그 한숨이 자신을 향했다는 걸 알았다.) 입을 열었다.
“제임스, 아직 파트너 없으면 나랑 같이 갈래?”
“…….”
정면 돌파였다.
율리아가 말한 파트너가 ‘마지막 날 연회’의 파트너를 의미한다는 건 누구나 알았다.
하지만 파트너 신청은 모든 시합 일정이 마무리될 때 즈음에 맞춰 번성했고, 남학생이 파트너 신청을 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그 때문일까, 누구도 지금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추후 파트너 신청이 오길 바라며 밑밥을 던질 줄 알았건만, 율리아가 먼저 신청할 줄은!
점점 흥미진진하게 일이 흘러갔다.
오웬과 블랑카는 크래커를 나눠 먹으며 재밌어 죽겠다는 눈으로 관람했다. 제네비브 역시 제삼자의 입장에서 두 사람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자리를 피해 주고 나발이고, 이런 건 바로 옆에서 봐야 했다!
세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가든파티가 끝나면, 아니, 율리아가 이곳에서 벗어나면 제임스를 놀려 먹을 생각에 벌써 신났다.
“음…… 바우어, 그게 말이지.”
제임스는 돌파구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제네비브는 그런 제임스를 따라 정원을 훑어봤다. 애석하게도 지금 이곳에서 그를 구원해 줄 사람은 없었다.
천막 아래서 경기를 보거나 잡담을 나누는 귀족들. 학생들도 가든파티라는 연회 성격에 맞춰 옷을 차려입은 와중, 세인트 존 칼리지 교복을 입은 학생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큰 반전 없이 그 학생은 에드워드였다.
‘외출복이 없나?’
만약 다른 사복들의 상태가 만찬 때 입은 옷과 비슷하다면 현명한 선택이었다.
에드워드는 훌리에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실로 낯선 풍경이었다.
저번 식사 때보단 편해진 듯, 대화는 그런대로 잘 이어지는 것 같았다. 걸음마를 떼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러할까?
그때, 제네비브와 눈이 마주친 훌리에타가 에드워드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고개를 돌려 제네비브를 봤다.
‘훌리에타도 말이 통했으면 좋을 텐데.’
그녀가 아쉬움을 삼키며 손 인사를 하려던 차.
“응?”
갑자기 큰 손이 제네비브의 팔뚝을 붙잡았다.
마치 짐짝처럼 제네비브를 가볍게 들어 올린 손은 그녀를 제임스와 율리아 사이로 데리고 갔다. 손길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접시에서 디저트 하나 안 떨어졌다.
한순간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게 된 제네비브는 황당한 눈으로 제임스와 율리아를 번갈아 봤다.
“제네비브……. 제네비브랑 같이 가기로 했어.”
여전히 제 어깨를 꽉 잡은 제임스가 뻔뻔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