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43화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본선은 프레스반 아카데미가 오르게 되었다.
선수가 퇴장하자 경기장 잔디는 정돈 작업에 들어갔다. 깊게 팬 땅은 다시 평평해졌고, 2부 시합을 이끌 선수들이 필드 안으로 들어왔다.
2부 경기는 1부 경기와 비슷한 흐름으로 흘러갔다. 격려를 주고받은 양 팀은 가느다란 스틱을 들고 말 위에 올라탔다. 필드를 몇 바퀴 돌며 선수와 말이 적응하자, 경기가 시작되었다.
“…….”
낯설었다. 제가 관람하는 입장에서 경기를 볼 거라는 건 알았지만, 직접 보니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운가요?”
에드워드가 물었다. 추억에 얕게 잠겼던 제네비브는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립지. 앞으로 저렇게 폴로를 할 수 없을 거잖아.”
“졸업하면 경기를 못 하나요?”
“그건 아니지만…… 이런 객기는 학생 때나 허락해 주니, 저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는 거지. 성인식 뒤엔 다들 눈치 보인다고 하더라고. 아, 에인젤이라도 타고 싶다.”
제네비브는 세인트 존 칼리지로 돌아가면 에인젤 산책을 매일 하겠노라 다짐했다.
“내일 펜싱 예선이지?”
“오후 한 시에 시작해요.”
“훈련은 그 전부터야?”
“네.”
“아, 아쉽다.”
시간을 듣고 제네비브가 탄식했다.
“그 시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시간 되면 같이 조정 경기 보러 갈까 했지. 근데, 조정 경기가 열한 시부터라서 어려울 것 같네…….”
바쁜 사람을 제 입맛대로 데리고 다닐 순 없다.
“예선전 보러 갈게!”
“……테니스 결승은 안 보세요?”
에드워드는 비슷한 시간대에 시작하는 테니스 경기를 언급했다.
그의 말대로 예산보단 본선이, 본선보단 결승의 인기가 더 컸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테니스 결승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보단 지난 점심 시합 때 보지 못한 에드워드의 실력이 더 궁금했다.
“네 첫 경기인데, 어떻게 놓쳐!”
그렇기에 테니스 결승을 권유하는 말에 곧장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저, 열심히 할게요.”
에드워드가 떨떠름하고 독지하게 말했다.
“부담 갖고 임하지 말고, 즐기면서 하는 게 제일인 거 알지? 이건 너무 미리 응원하는 거 같으려나?”
“네.”
대답이 즉각 돌아왔다.
“너무 이르니까, 내일도 들려주세요.”
에드워드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후, 첫 번째 라운드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본리아와 마이언 제국 귀족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마이언 아카데미에서 개최되고,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아본리아 제국 학교의 경기라 1부 때보다 사람이 확연히 많았다.
‘내일 가든파티에서 잘 보렴. 에드워드가 아니라, 그를 대하는 다른 이들의 태도를 말이야. 그리고 그걸 에드워드가 감당할 수 있는지 잘 생각해야 해.’
어제 나눈 대화가, 더 정확히는 모친의 걱정이 전염되듯 머릿속에 번졌다.
에드워드가 ‘황실의 핏줄’인 건 제네비브만 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에드워드는 이곳에서 낯선 이물질이나 다름없었다. 보는 눈이 많아 체면을 차려야 하니 폭행까진 하지 않겠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에드워드를 더 깔볼 수도 있다.
대처 방법을 생각하기도 전에 제네비브를 아는 귀족들이 말을 걸어왔다. 대부분 그녀의 또래였다. 이 사람은 모 가문의 영애, 저 사람은 모 가문의 영식…….
대화는 언제나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들은 에드워드의 존재를 알아도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건 에드워드를 대화를 나눠야 할 만큼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였지만, 때로는 적당한 무관심이 나은 법이었다.
그렇기에 데이비드 크롬웰을 봤을 때, 제네비브는 긴장했다.
그는 카르디르 출신으로 크롬웰 자작 가문을 물려받을 인물이었다. 크롬웰가는 포가츠 아카데미 성적 조작 사건에 가담했다고 알려졌지만, 왠지 모르게 큰 문제 없이 넘어갔다.
아무튼, 그와는 별개로 크롬웰 가문 영식은 그녀에게 영 불편한 사람이었다.
“달링 양! 이것 참 오랜만이군요.”
“크롬웰 경,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죠?”
다가온 상대들은 그녀와 인사를 나눈 후, 관심은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에드워드에게 갔다. 이런 연회에서 교복을 입는 대담한 선택을 한 사람이 누굴까 하며.
“옆에 분은 처음 뵙는군요.”
“……세인트 존 칼리지 2학년 에드워드입니다.”
역시나 인사를 들은 크롬웰은 에드워드의 신분을 빠르게 파악했다.
땡전 한 푼 없는 몰락 귀족인 줄 알았는데, 그 실상은 성씨가 없는 평민. 이곳에서까지 교복을 입어야 하는, 금전적 여유가 없는 안쓰러운 존재.
미미하지만 적선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동정, 그리고 전반적으로 깔린 선민의식이 담긴 어투로 ‘오, 달링 가문의 영애가 너 같은 사람과 어울리다니 그것참 신기한 일이군’ 같은 반응을 살짝 내비쳤다. 지적했다간 지적한 사람이 되레 예민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선으로.
“그래서, 이런 연회엔 어떤 연유로 오셨나?”
이제 크롬웰은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달링 부인께서 초대해 주셨습니다.”
에드워드의 대답을 들은 크롬웰은 끅끅거리며 비웃었다.
“달링 후작 부인께서? 하하! 농담도 참. 혹시 평민이라 모르나? 달링 가문은 카르디르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가야. 달링 가문 따님 앞에서 그런 거짓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면―.”
“제 어머니의 손님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건 기분이 썩 좋진 않네요.”
간신히 화를 억누른 제네비브가 말했다. 크롬웰이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폭발할 것 같았다.
“흠흠…….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하지요.”
에드워드가 아닌, 제네비브와 달링 후작 부인에게 향한 사과였다.
입안을 씹은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데리고 연회장을 벗어나려고 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간 친구들이 에드워드를 스스럼없이 대해 주어서 이런 상황이 올 거라는 걸 잠시 잊었다. 에드워드에게 오지 말라고 할걸.
“오, 와인 잔 바닥이 보이는군.”
크롬웰은 아직 와인이 반 정도 남은 잔을 손에 굴리며 말했다. 에드워드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는 명확했다.
“크롬웰……!”
“저는 달링 후작 부인의 손님입니다.”
제네비브가 화를 내려던 찰나, 에드워드가 그녀를 막아서듯이 팔을 당기며 말을 가로챘다.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어조였다.
정원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도 닿을 법한 발성, 단 한 문장으로 상대를 움츠러들게 하는 위압감이 존재하는 동시에 우아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달링 후작 부인께 초대 받았다는 걸 알면서도 저를 수족처럼 부리시니, 그간 달링 가문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계셨는지…… 심히 염려됩니다.”
“…….”
에드워드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주위 다른 사람들도 들으라고 하는 얘기였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불편한 진실을 명확하게 찌르는 에드워드의 반격에 되레 당황한 사람은 제네비브였다.
“그럼에도 제게서 와인을 찾으시니, 다 드신 뒤 가져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달링 후작 부인의 손님’이 아닌 ‘평민’으로서요.”
완벽한 발음과 발성은 주변 모든 사람의 귀에 쏙쏙 박혔다.
일부러 떠먹여 주는 화법이, 그가 포가츠 아카데미 조작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에드워드는 알 턱 없지만)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원래 이런 성격이긴 했지…….’
에드워드를 처음 만난 날, 원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빙의했음을 알아챈 날 저녁에도 이랬다. 또다시 말싸움에서 한마디 지지 않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귀족적인데 비난하는 내용은 원색적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순한 에드워드의 모습만 봐 와서 그런가 조금은 낯설었다.
다행히 크롬웰은 찰스와 다르게 손을 올리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에드워드를 때리기라도 하면 ‘성적 조작까지 해서 겨우겨우 졸업한 머저리’에서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졸렬한 사람’이 되니까.
하여 크롬웰은 남은 와인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신 뒤, 경련하듯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추하기 짝이 없고, 누가 보더라도 그의 패배였다.
“네. 그럼, 가져오겠습니다.”
에드워드는 인심 썼다는 투로 그가 듣고 싶은 말을 들려줬다.
“그럼 달링 양, 우리는…….”
“크롬웰 경, 저는 제 어머니의 손님을 챙겨야 할 것 같군요.”
제네비브는 그를 한번 노려보곤 에드워드를 따라 음료 테이블로 갔다.
에드워드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와인을 주문하고 있었다. 제네비브는 어째서 그가 들을 가치도 없는 크롬웰의 요구를 들어주는지 이해가 안 됐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잔을 받기 전에 가로챘다.
“에드워드. 넌 칼리지 대표로, 학생으로 참가한 거야. 이런 건 안 해도 돼.”
제네비브가 답답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롬웰 경은 네게 엄청난 무례를 저질렀어. 너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의 요구 따위, 듣지 않아도 된다고.”
제네비브는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고집스럽게 그 잔을 도로 가져갔다.
“……이것마저 안 하면, 선배와 달링 부인의 평판에 불이익이 갈 거예요.”
에드워드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크롬웰…… 이라는 분은 제가 세상을 구했어도 저를 싫어했을 거예요. 저야 미움 좀 받고 끝나면 되지만, 선배는 그런 대접을 받으면 안 돼요.”
“…….”
“저는 익숙해서 괜찮아요.”
에드워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미움 받는 게 익숙하다고 말하기엔 어조가 너무나도 평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