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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45화 (45/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45화

슬프게도 대회 첫날은 세인트 존 칼리지에게 잘 흘러가지 않았다. 자랑거리 중 하나였던 여자 폴로는 마이언 아카데미와 예선에서 패배했다.

마치 블랑카가 미리 짜 놓은 <더 칼리지> 기사 시안과 절반 정도 써 놓은 우승 기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첫날 치러진 경기에서 세인트 존 칼리지가 우승한 종목은 없었다.

양궁은 예선에서 대패를 기록했고, 테니스 복식은 ‘잘했다’기보단 ‘운’이 크게 적용해 본선에 진출했다. 요트는 부정 출발로 실격 처리가 되었으며, 조정 쿼드러플 스컬 (*4인승 경기로, 한 선수는 두 개의 노를 젓는다) 은 3위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시작이 안 좋았던 탓에 세인트 존 칼리지의 분위기는 (준비한 기사를 몽땅 반납하게 생긴) 블랑카와 맞먹을 정도로 침울했다.

아무리 ‘학교 간 친선 대회’라지만, 경기는 이겨야 재미있는 법이다. 때문에 세인트 존 칼리지 학생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조정으로 향했다. 더 정확히는 제임스가 출전하는 조정 종목들이었다.

조정 종목 중 절반을 출전하는 제임스는 혹사에 가까운 경기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정말 자전거까지 타려고?”

“응.”

관람석은 결승점 주변을 감싸는 형태로 되어 있다. 하여, 경기 진행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자전거를 타며 (안전 문제로 자전거는 조정 클럽 지도자들과 신문 클럽 한 명만 이용이 가능했고, 아카데미 측에서 대여해 줬다) 봐야 했다.

위태롭게 자전거 페달을 밟는 블랑카를 보자니, 제네비브는 그녀가 2000미터를 안전하게 완주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이거 원래 오웬이 하던 건데……. 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출전했지?”

블랑카는 급기야 과거에 한 선택들을 후회했다. 그리고 블랑카가 무슨 말로 눈치를 주든, 오웬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손을 흔들며 미리 작별을 고했다.

“이런 건 1학년 시키면 되지 않아?”

악습이라면 악습이지만, 블랑카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1학년을 쓰는 편이 나았다.

“호호. 빌헬름 얘기하는 거니? 어제 양궁 경기 기록을 시켰는데, 정말 ‘점수 기록’만 하는 대—단한 아이였어. 내가 해야 마음이 편해. 이번엔 조정 완주 시간 기록만 시켰는데, 이것마저 제대로 안 하면…….”

블랑카는 말을 잇는 대신, 이가 보이도록 환한 미소를 지었다. 미소보단 이를 꽉 깨문 것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활짝 웃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게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솔직히 이번 <더 칼리지>는 모조리 제임스 특집으로 만들고 싶어. 아니, 계속 이런 식이면 제임스 특집이 될 수밖에 없어! 나라고 모든 면을 제임스로 채우고 싶은 게 아니야.”

제네비브는 마지막 문장은 믿지 않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내가 폴로를 얼마나 믿었는데……. 아니야, 모두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했겠지…… 역시 진저, 네가 있어야 했는데…….”

블랑카는 구시렁거리며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자전거는 좌우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며 멀어졌다. 블랑카를 떠나보낸 제네비브는 오웬을 따라 객석으로 향했다.

“제네비브.”

오웬이 그녀를 불렀다.

“왜?”

“그…….”

오웬이 머뭇거렸다. 그답지 않은 행동에 제네비브는 팔꿈치로 오웬을 치며 말을 재촉했다.

“고모님, 에드워드 안 좋아해?”

정말이지 눈치 하나는 제국 제일이다.

제네비브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자, 오웬은 묻지도 않은 제 추리를 펼쳤다.

“아니~ 어제 가든파티 때문에. 나는 그동안 고모님이 음…… 에드워드 신분인 사람……? 을 초대한 걸 본 적도 없고, 초대하셨어도 교복을 입고 오게 할 분은 아니잖아.”

오웬의 말대로였다.

처녀 적 시절엔 아본리아 제국을, 후작부인이 된 이후엔 카르디르 사교계를 휩쓴 달링 후작부인의 패션 센스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니 그 달링 후작부인이라면 에드워드에게 옷을 지어서 주고도 남았다.

“뭐, 이제 교복 입고 올 일은 없겠지만~.”

어제 본 소동을 떠올린 오웬이 털어 내듯 말했다.

그 말대로 첫날엔 ‘아직 옷이 안 왔다’라던가 ‘옷이 없는 줄 몰랐다’ 같은 변명을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도 교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달링 후작부인이 일부러 손님을 홀대한다는 소문이 돌 거다.

‘엄마, 비긴 걸로 해요.’

어머니를 곤란한 상황에 빠트린 걸 속으로 사과하며 제네비브는 입을 열었다.

“이미 다 알아냈으면서 묻네. 네 말대로야. 왜 껄끄러워하시는지는 알겠지만…….”

제네비브는 잠시 뜸을 들였다.

오웬이 알고 싶은 건 ‘달링 후작부인이 에드워드를 싫어하는 이유’겠지만 대답할 필요 없었다.

그 이유가 지나치게 유치한 게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모친이 내세운 ‘이유’를 언급하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단 말이지.’

제네비브는 작게 한숨 쉰 후, 말을 이었다.

“뭐, 이젠 잘해 주지 않을까?”

이 주제에 대해 더 말하기 싫다는 신호였다. 오웬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 너는 이번에 기사 참여도 안 하면서 왜 기자석에 앉는 거야?”

“친구를 가까이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오롯이 제임스를 응원하기 위한 순수한 목적만은 아니었다. 핵심 단어는 ‘응원’이 아닌 ‘가까이서’였다. 오웬이 약 올리듯이 발랄하게 기자석으로 향했다.

제네비브는 오랜만에 일반석에 앉았다. 기억하던 것보다 멀리 펼쳐진 호수와 자그만 심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대편에선 보트로 추정되는 작은 무언가가 호수를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관람객은 시작 지점을 마주 보는 구도로 앉지만, 그마저도 학교 구별이 어려워 초반 경기는 확성 마법이 걸린 해설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탕!

폭발음과 함께 호수 위로 흰색 불꽃이 튀어 올랐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아아, 선두는— 렐타 사관 학교입니다! 이런, 우드 칼리지가 바로 뒤에서 매섭게 추격하고 있어요!

쩌렁쩌렁한 공용어로 경기가 해설되었다. 고막을 파괴하는 것 같은 소음에 제네비브는 귀를 틀어막았다.

‘잠깐 나가 있어야겠다.’

안색이 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렐타 사관 학교와 우드 칼리지의 접점으로 보이는군요! 그 뒤로 마이언 아카데미, 세인트 존 칼리지, 프레스반 아카데미가 따라가고 있습니다. 렐타 사관 학교는 힘이 빠진 걸까요? 우드 칼리지가 앞서가고— 바로 뒤에서 세인트 존 칼리지가 치고 올라옵니다!

관중석을 벗어나자, 귀를 울리던 소음이 조금 작아졌다.

복도에 도착하니 신나게 응원하는 함성은 점점 줄어들었고, 귀를 따갑게 찌르던 해설 소리 역시 조금씩 흐려졌다.

“하아…… 흡.”

“……?”

그 순간, 경기와 어울리지 않는 외설적인 소리를 귀가 잡아챘다.

오가는 농밀한 호흡, 두 사람의 달뜬 숨소리, 왠지 모르게 물기 있는 소리. 조금만 걸어 복도를 꺾으면 민망한 짓을 하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변태도 아니고.’

하지만 제네비브는 관심이 한 톨도 없었다.

가십에 미치지도 않았고, 공공장소에서 저런 짓을 하는 사람과 엮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으음…… 시온.”

그때, 여자가 황홀하단 목소리로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시온……? 설마?’

그저 동명이인인 걸까?

제네비브는 자신이 지금 들은 게 맞는지 재차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애써 집어넣었다. 왜냐면 저 사람은 분명 제가 아는 시온이었으니.

그간 구태여 생각하지 않았던 원작 설정이 떠올랐다.

‘원작에서 에드워드가 시온을 싫어했던 이유가 있었지.’

에드워드가 시온을 싫어하는 데엔 여러 이유가 존재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자 주인공이 시온을 좋아해서고 그다음은 여자 주인공이 좋아하는 시온이 엄청난 바람둥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바람둥이였던 시절이 인물들의 대사로만 언급되고, 소설에선 여자 주인공 하나만 바라보는 순애보로 묘사되어 실감하지 못했다.

저녁 만찬 이후 접점도 없을 것 같아, 시온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할지 그리고 시온이 원작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캐릭터 복습도 안 했다.

‘뭘 더 생각하기도 전에 밀포드가 나타나서 정신도 없었지.’

지금도 그 사람만 생각만 하면 몸에 힘이 빠졌다.

산 넘어 산이다. 당장 눈앞의 과제는 밀포드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과 더불어 시온이 아예 세인트 존 칼리지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는 거다.

제네비브는 해결해야 하는 두 가지 과제를 다시금 되새기며, 시온이 6개월 뒤 즈음에 후회할 과거 현장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근데, 왜 복도가 조용하지.’

지금 즈음이면 쪽쪽거리는 소리를 넘어서 듣기 민망할 정도의 소리가 오가는 게 정상이었다. 벌써 끝난 건가? 제네비브는 고개를 살짝 돌려 봤다.

“안녕하세요.”

그러자마자 바로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시온 헤이븐이었다.

“으악!”

제네비브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로 튕기듯 물렸다. 마치 더러운 것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시온에게서 두 걸음 떨어졌다.

시온은 되레 입가에 묻은 립스틱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 내며 평온한 표정으로 제네비브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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