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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46화 (46/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46화

“아, 달링 양이셨습니까.”

그가 태연하게 웃었다.

제네비브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의 미소를 받아 줬다.

“해설 소리가 시끄러워서 잠깐 대피하러 왔답니다. 헤이븐 군은 무슨 일인지요?”

못 들은 척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라는 의미가 다분하게 담긴 문장이다.

“이제 돌아가시려는 거면, 제가 에스코트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시온이 입으로 호선을 그리곤 제 한 팔을 내밀었다.

이 상황에서 싫다고 하면 이상했다. 제네비브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미소를 유지하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얘가 만찬 때도 이랬나?’

시온이 제네비브에게 남긴 첫인상은 ‘예의 바른 남자 주인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고위 귀족들 앞에서 고백했던 전 약혼자를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원작 남자 주인공을 만났다는 충격, 원작 남주와 흑막이 싸우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를 막아야 한다는 책임감과 멀어진 지금, 그날을 다시 회상하니 시온이 잦은 빈도로 미소와 눈웃음을 지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절대로 피하자.’

제네비브는 시온의 첫인상을 수정하며 소설에서 시온을 거쳐 간 여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상상해 봤다. ‘진정한 운명의 상대’인 여주를 만나기 전까지 시온과 놀아나던 45번째 선배가 되고 싶지 않았다.

원작 남자 주인공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다른 학교 학생이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라는 행복 회로를 돌리기에 이 세상은 만만치 않으니까.

시온이 세인트 존 칼리지에 오는 걸 원천 차단해야 한다. 원작이 시작도 못 하게 남주의 출연을 막아 버리는 것. 그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다.

‘다른 학교 학생이 세인트 존 칼리지에 오는 방법이라…….’

“달링 양.”

한창 가설을 세우던 제네비브를 시온의 목소리가 방해했다.

“방금 보셨죠?”

시온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렇지 않기는커녕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음…….”

제네비브는 말끝을 흐렸다. 애초에 들었다는 암시를 준 건 본인이었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화제를 꺼낼 줄이야.

정확히는 본 게 아니라 들은 거지만, 하나하나 따지면 끝도 없었다.

“소문이라면 걱정 안 해도 돼요. 남의 연애사 소문내는 데 관심이 없어서.”

제네비브는 여상하게 말했다.

“아, 그거 곤란한데.”

그런데 시온은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소문, 많이 내 주세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학교 신문에 올라와도 좋고.”

“……뭐라고요?”

제네비브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혹시, 고도의 반어법인가? 아니면 요즘 새로 유행하는 협박성 발언인가? 제네비브가 여러 방면으로 의심하는 와중에도 시온의 표정은 진심이라는 양 말갛기만 했다.

—아아—! 조정 에이트 종목의 우승은—! 우드 칼리지가 차지했습니다!

그 무렵, 시끄러운 해설 소리와 귀 아픈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것으로 두 사람이 경기장에 도착했다는 걸 알려 줬다.

—곧바로 세인트 존 칼리지, 그리고 마이언 아카데미가— 들어옵니다! 4등은 렐타 사관 학교, 프레스반 아카데미가 경기를 마무리 짓는군요! 우드 칼리지는 2년 만에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1등! 우드 칼리지, 2등은 세인트 존 칼리지, 3등! 마이언 아카데미입니다!

친구의 경기 성적은 지금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방금 들은 망언이 아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소문을 내 달라고?’

제네비브가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시온의 입에서 더 가관인 말이 나왔다.

“다음 학기부터 교환 학생으로 세인트 존 칼리지에 갈 예정이거든요. 미리 소문이 나면 학교생활이 더 편해질 것 같아서요.”

문장은 시온의 싱그러운 미소로 마무리되었다.

“…….”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어투 때문에 제네비브는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하는지 더더욱 감이 안 잡혔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져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해석하자면 지금 시온은 전교생에게 바람둥이로 소문이 나도 전혀 상관없고, 외려 소문이 났으면 하는 입장이다. 게다가 다음 학기부터 교환 학생으로 세인트 존 칼리지에 올 예정이고.

어떤 안타까운 사연이 있나 했더니, 생각보다 정상적인 경로였다.

‘네가 교환 학생이란 설정은 없었잖아!’

제네비브는 억울했다. 새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찾아다녔고, 이젠 타교 학생이라 안심했는데 이런 설정으로 통수를 치다니.

원작 시온에게 교환 학생이라는 설정이 없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 교환 학생 프로그램 존재에 대해 알았을 때 ‘이건 소설에 없던 설정인데? 이런 세부 설정도 존재하는구나!’라고 감탄하며 신청서를 (제네비브는 신청 자격이 갖춰지자마자 마이언 아카데미에 교환 학생을 신청했다) 작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환 학생으로 올 학교에 안 좋은 소문이 퍼지길 바라는 건 어지간한 미친놈이 아니면 할 말이 아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인데, 왜 굳이 그런 소문을?

“왜…… 하필 세인트 존 칼리지에?”

시온을 붙잡고 따질 건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질문은 하나였다.

“전 아본리아 사람입니다. 모국에서 수학하는 게 당연히 편하지 않겠습니까?”

시온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친절하게 대답했다. 마치 그게 뭐가 문제냐는 태도였다.

‘그건 그렇지…….’

제네비브로서는 세인트 존 칼리지에 시온을 들였을 때 그가 갖고 오는 위험 요소가 너무 컸다.

원작의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학생을 죽이는 에드워드, 불에 타오르는 세인트 존 칼리지, 잠든 사이 분사(焚死)한 학생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의 손에 죽어 버리는 에드워드.

이제 와 생각하면 이건 배드 엔딩을 넘어서 국가적 재난에 가까웠고, 세인트 존 칼리지에 외국 귀족들도 재학하고 있는 걸 고려하면 전쟁이 안 난 게 용했다.

“교환 학생 결과는 이미 나온 건가요?”

제네비브는 부디 답이 ‘아니’길 바랐다.

“네, 4월에 통지가 왔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니지…… 여름에 졸업하시니까 잘 부탁할 건 없나요? 그래도 같은 학교 선후배가 될 텐데 말씀 편하게 하시죠.”

제네비브의 참담한 심정을 알 리 없는 시온은 여상하게 손을 내밀었다.

“네…….”

반사적으로 손을 받아 악수한 제네비브는 영혼이 반 즈음 나가 있었다.

“가을엔 못 보겠지만……. 그래도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아까 본 거, 진짜 퍼트려 주세요.

혹시라도 제네비브가 장난으로 받아들일까 걱정이라도 하는 건지, 그는 다시 한번 당부했다.

이후 친구들과 함께 사라진 시온은 마지막까지 제네비브에게 엄청난 짐을 얹어 주었다.

‘망했다, 망했어. 제대로 망했다. 진짜 망했다…….’

진지하게 죽고 싶어졌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곧 교환 학생으로 올 예정이라니.

‘거짓말일 리는…… 없겠지.’

제네비브는 아직도 희망을 찾으려는 자신을 비웃었다.

애초에 시온은 원작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다. 그리고 소설의 무대가 되는 세인트 존 칼리지에 주인공이 모이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섭리였다.

경기장에 뿌리를 내린 듯한 제네비브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건 오웬이었다. 그는 기자석에서 관람석까지 올라와, ‘펜싱 예선전 보러 가자고 한 게 누군데?’라고 말하며 그녀를 나무랐다.

제네비브는 순순히 사과하곤 펜싱 경기장으로 걸음을 옮기며 한바탕 저를 휩쓸고 지나간 시온을 생각했다.

“땅 꺼지겠어. 웬 한숨이야?”

기자석 자리에 앉은 오웬이 물었다.

“……그런 게 있어.”

펜싱 예선전이 치러지는 경기장 관람객은 비교적 적었다. 비슷한 시간대에 테니스 결승전이 진행되었기에, 대부분 다음 날 열리는 펜싱 본선을 볼 계획이었다.

선배들의 횡포로 예선전을 강제 관람하는 신문 클럽 1학년을 제외하면 대부분 아는 선수가 출전하는 경우에만 왔다.

제네비브는 오웬과 동행하여 편한 자리를 즐겼다. 한 시간 전엔 귀가 울리고, 조금 전엔 남주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목격해서 그런가 해설 없이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만 들리는 펜싱 경기장이 너무나도 평화롭게 느껴졌다.

‘에드워드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에드워드가 보였다. 그는 얌전히 지도자처럼 보이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경기 준비를 하는 에드워드를 보니 안도가 밀물처럼 밀려들어 온다. 제네비브는 남자 주인공보다 흑막을 보고 안심하는 제 모습이 웃겼다.

이제 클럽 지도자는 3학년들에게 넘어가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렸고, 에드워드는 대기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펜싱복을 입은 에드워드는 멋있었다. 흰 펜싱복 아래로 보이는 탄탄한 몸과 떡 벌어진 어깨는 그간 그가 얼마나 고된 훈련을 했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

또, 얼굴을 절반 정도 가리던 안경을 벗어서 그런 걸까? 에드워드의 인상이 평소보다 서늘했다.

“……?”

그때, 에드워드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경기장 어딘가를 보더니 얼굴을 제대로 못 들었고,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들고 있는 가느다란 칼끝이 잘게 진동했다. 손에서 떨어진 보호구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에드워드가 보호구를 주우려던 순간, 칼과 다리가 엉켜 넘어질 뻔했다.

“쟤, 긴장하나 봐.”

그 모습을 본 관객석에선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봤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기장은 넓었지만,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갑자기 굳은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2층에 자리한 귀빈석에 한 노인이 있었다.

밀포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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