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47화
밝은 곳에서 본 그는 기억보다 더 심술궂게 생겼다. 그는 오늘도 신기하게 생긴 새 머리 모양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앙상한 손가락은 검은색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가 뱀 같은 눈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작 저 한 사람 때문에 오늘 경기를 망치게 둘 순 없지.
“에드워드!”
제네비브는 재빨리 에드워드를 불렀다.
다행히 세인트 존 칼리지의 대기석과 기자석은 가까웠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보호구를 주운 에드워드가 가까이 다가왔다.
“선배.”
가까이서 보니 긴장한 게 눈에 더 잘 보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두 사람 모두 ‘다른 게’ 밀포드를 지칭한다는 걸 알았다.
“—경기에만 집중해. 할 수 있어!”
제네비브는 주먹을 내밀었다.
주먹을 간신히 맞대는 에드워드를 보자니 걱정이 태산처럼 늘었다. 지는 것보다 제 실력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게 더 억울한 일이다.
‘대체 긴장은 어떻게 해야 풀리는 거지…….’
제네비브는 주머니를 뒤졌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진다. 제네비브는 그걸 에드워드에게 건넸다.
가장 전통적인 응원 방법.
손수건을 건네자, 공기가 조금 더워지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응원의 의미로 손수건을 주는 것도 이젠 동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니까.
몇 세기 전에나 성행했던, 이젠 전통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선물식. 과거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는 사냥 대회에서도 이는 연인 사이에서나 하는 일이었다.
‘뭐…… 모르겠지!’
제네비브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응원 선물이야.”
“이걸, 제가 받아도…….”
조금 뜸을 들인 에드워드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손수건을 받았다.
에드워드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쉬었다. 떨림이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다시 눈을 뜬 에드워드는 조금 전과 다른 기색으로 경기장을 향해 걸어갔다.
연갈색 눈이 묘하게 바뀌었다. 침착하다고 말하기엔 투지가 느껴졌고, 지나치게 섬뜩했다. 그래도 에드워드가 다시 경기에 집중하는 걸 보니 한시름 놓았다.
“……왜 그러는 건데?”
제네비브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옆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오웬이었다.
금방이라도 놀리려는 것 같던 오웬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제네비브는 오웬의 무반응에 속으로 감사를 전했다.
“저 사람이 밀포드야.”
제네비브는 생각났다는 듯 그를 툭툭 치며 밀포드가 있는 쪽을 곁눈질했다. 오웬이 이상한 곳을 보기에 “세 시 방향 귀빈석.”이라고 친절히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대체 어디에…… 맙소사, 네가 말한 밀포드가 저 사람이야?”
“응.”
제네비브는 밀포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빨리 저 늙은이의 정체를 오웬이 알려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오웬은 말없이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일로 저 사람을 알고 싶은 건지 몰라도, 손 떼.”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려서 나온 답은 고작 이거였다.
“왜?”
“말 못 해.”
오웬의 목소리와 표정에서 언뜻 공포 비슷한 것이 스쳤다.
“왜 말 못 하는데?”
“그것도 얘기 못 해. 너는 대체 어쩌다 저 사람을…….”
오웬이 인상을 썼다.
“하여튼, 알려고 하지 마.”
“왜 안 되는지만 알려 주면 안 돼?”
“어, 안 돼. 가문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맹세해. 절대로 저 사람에 대해 알아보지 않겠다고.”
오웬은 ‘절대로’를 강조했다. 엄청난 사람인 건 분명하다. 반응을 봐서는 위험한 쪽인 것 같았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블라이스 가문이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인물이라니. 그렇다면 블라이스 가문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밀포드는 처음 들어 보는데.’
블라이스가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꺼리는 인물이라면 적어도 한 번은 들었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네비브는 밀포드라는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왜 저런 사람이 에드워드를 알고 있을까.
‘에드워드의 후견인 같은데……. 그럼, 저 사람은 에드워드가 황태자라는 걸 알고 있는 거야?’
뭐든 확신하기 어려웠다. 어쩌다 연이 닿은 걸지도 모르고, 정말 성질이 더러운 보호자일지도 모르니까.
“…….”
하지만 만약 밀포드가 황실과 연관이 있다면 오웬이 그를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하는 것도 설명이 됐다. 고작 외국 귀족에게 저런 사항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그럼, 황실의 누구와 연관이 있는 거지?’
남의 나라 황실 사정인지라 선뜻 추론하기 어려웠다.
아본리아 제국엔 황제 부부가 있고, 둘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제네비브는 세인트 존 칼리지로 돌아가자마자 블렛 황실에 대해 샅샅이 뒤질 각오를 했다.
“또, 또. 내 말 흘려듣지 말라고. 방금도 생각하고 있었지?”
오웬이 기겁하며 말했다.
“……아니? 다른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오웬이 그 말을 믿을 리 없었다.
제네비브는 ‘이시스 여신의 이름을 걸고 다시는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하고 나서야 추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금 심란한 마음과 함께 제네비브는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웬이 저렇게까지 하는 걸 봐서는 말이 번복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또 반응을 보면 제임스를 추궁해도 큰 수확은 없을 거다. 분명 오웬과 비슷한 반응을 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겠지.
‘밀포드’를 아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정작 ‘밀포드’가 누군지 알 수 없다는 게 갑갑했다.
결국, 혼자 알아내야 했다.
사촌 몰래 바쁘게 가설을 세우고 보충하던 제네비브의 작은 머리를 멈춘 건 에드워드였다.
펜싱을 제안한 자신이 해외에서까지 그의 경기를 놓치는 파렴치한 짓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제네비브는 대기석에 앉아 있는 에드워드에게 집중했다.
에드워드는 가라앉은 눈으로 경기를 미동도 없이 관찰하고 있었다. 흡사 사냥감을 관찰하는 포식자처럼.
간신히 찾은 움직임은 제네비브가 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는 작은 손동작이었다. 촉감이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걸까. 흰색 천은 오래도록 에드워드의 손안에 머물렀다.
경기 서넛 개가 끝나고, 에드워드 차례가 되었다.
‘왜 내가 다 긴장이 되냐.’
손에 땀이 찼다. 제네비브는 치마를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어쩐지 경기 당사자가 저보다 더 평온해 보였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겉보기처럼 긴장이 정말 풀렸길 바라며 경기를 봤다.
“에드워드 상대, 작년에 준우승한 사람이야.”
오웬이 피스트 반대편에선 렐타 사관 학교 선수에 대해 설명했다. 에드워드가 이걸 알고 있을지, 알고 있다면 부담으로 여기진 않을지, 크고 작은 걱정이 들었다.
“…….”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에드워드의 실력은 뛰어났다. 펜싱을 잘 모르는 제네비브조차 그의 실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걸 알게 만드는 실력이었다.
에드워드는 타고난 듯 경기장을 날아다녔다. 동시에 여러 시합이 진행되는 이곳에서 관중을 이끌어 내는 건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충분했다.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에드워드의 경기를 못 보는 블랑카에게 미안해졌다. 한 번 그를 보면 그 압도적인 경기력에 다른 경기로 눈을 돌리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상대 선수는 빠르고 정확한 에드워드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상대에게 동정심이 들 정도로 그는 처참하게 졌다. 에드워드는 바우트 하나 내주지 않고 예선을 손쉽게 통과했다.
제네비브는 밀포드가 앉은 귀빈석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아무 감정 없는 싸늘한 눈을 띠었다. 에드워드가 경기에 참여했다는 것에 화가 난 건지, 그는 곧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기가 반절쯤 지나고 블랑카가 도착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며 제네비브와 오웬 사이에 앉았다.
“우리 학교가 3등 했어. 결승은 마이언 학생들이 가서, 1등은 마이언에서 나올 거야.”
블랑카는 테니스 경기 결과를 (뒷자리에 앉은 타교 1학년생들이 본인 학교 경기 실적을 묻자, 블랑카는 성의껏 대답했다) 알려 줬다.
“잘됐다! 첫날에만 조금 삐끗한 건가 봐.”
“아서라, 얘가 3등으로 만족하겠어?”
오웬이 그럴 리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해.”
그런 오웬의 말을 입증하듯 블랑카가 말했다.
선수 개인으로선 대단한 성과일지 몰라도, 블랑카가 <더 칼리지> 1면에 우승이 아닌 소식을 올릴 일은 없었다.
“우리 학교는 어때? 잘하고 있어? 테오는?”
“대전 운이 안 좋아서 본선 진출해도…… 아마 8강이 최대일 거야.”
“오오, 우리 학교가 웬일이래?”
블랑카는 펜싱에 큰 기대를 안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저 테오도르의 예선전 시합을 위해서였다.
세인트 존 칼리지의 펜싱이라고 하면 백 년 가까운 시간 동안 기록한 최고 등수는 2등이었다.
그만큼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펜싱 우승이란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고, 단상에 서서 트로피라도 받으면 대단한 거였다. 칼리지 펜싱 클럽이 못한다기보단 다른 학교들이 너무 잘했다.
“더 큰 웬일이 있어. 우리, 우승할 거 같아.”
오웬이 말하면서도 안 믿긴다는 것처럼 말했다.
“하하. 괜찮은 농담이었어.”
블랑카가 웃으며 오웬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 지금 우리 학교 말하는 거 맞지? 아니, 그럼 누가? 프란츠가 드디어 우승을 하는 거야?”
그런데 평소와 같은 반응이 안 나오자, 블랑카가 호들갑 떨며 물었다.
“에드워드.”
“……에드워드? 내가 아는 에디?”
오랜만에 후배의 풀 네임까지 언급하며 블랑카가 재차 확인했다.
“어. 에드워드가 구스타프손을 이겼어.”
“에디가 구스타프손을 이겼다고?”
소식을 전해 들은 블랑카의 회색 눈이 무서울 정도로 반짝였다.
예전에 많이 보던 눈빛이었다. 2학년 당시, <더 칼리지>에서 첫 단독 기사를 맡게 된 블랑카가 제임스를 뮤즈로 선택했을 때 이런 눈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제 블랑카는 대기석에 앉은 에드워드를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