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48화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경기가 끝난 선수들은 경기장을 나가거나 사복으로 갈아입곤 관람석에서 지인과 대화를 나눴다. 가끔 진행되는 시합을 볼 때도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유력한 경쟁 상대가 나올 때나 해당하는 일이었다.
사람이 하나둘 빠져 가는 대기석에서 에드워드는 유일하게 그 자리에 앉아, 모든 선수의 경기를 지켜봤다. 그와 비슷한 경우가 있다면 그건 테오도르였다.
‘이게 뭘 해도 성공할 사람의 자세란 건가.’
제네비브는 두 사람을 보며 감탄했다.
테오도르 역시 순조롭게 예선을 통과했다. 매번 민망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그를 피하기 급급했기에 그의 시합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누가 봐도 화려한 공격을 펼치던 에드워드와 다르게, 테오도르는 묵직한 맛이 있었다.
경기는 비교적 심심하게 흘러갔다.
선수 본인 딴엔 긴박할지 몰라도 에드워드의 경기를 한차례 보고 나니 에드워드만큼 인상 깊게 남은 선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큼 넋을 놓고 본 시합은 테오도르가 전부였고, ‘잘했다’라는 걸 체감한 선수는 네다섯 명 정도 있었다.
본인을 향한 시선을 읽은 듯 테오도르가 정확하게 기자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네비브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정직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언제 또 대화를 시작했대?”
얼떨결에 인사를 받아 준 제네비브를 본 오웬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고작 저 한마디를 위해 몸을 앞으로 빼내어 의사를 전달한 그 정성이 대단했다.
“아, 좀!”
제네비브는 눈을 굴려, 그를 타박했다.
손을 뻗어 무릎이라도 치고 싶지만 중간에 블랑카가 있어 어려웠다. 허공을 휘저은 손짓이 대리 만족인 걸 알아차린 블랑카가 대신 오웬을 나무랐다.
경기가 끝이 났다. 그제야 경기장에서 눈을 뗀 에드워드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제네비브는 나가는 인파에 휩쓸려 경기장 밖으로 갔다. 로비로 향하는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오웬은 자연스럽게 둘과 헤어졌고, 블랑카는 <더 칼리지>소속 2학년생과 어디론가로 향했다.
예선전인 덕에 경기장 로비는 비교적 한산했다.
에드워드를 만나 보고 싶었다. 그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포함해 잡담을 나누며 같이 별관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30분가량을 기다려도 그가 안 보이자, 제네비브는 축하를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 * *
“잘했다.”
모든 경기가 끝나서야 스미스 감독은 에드워드에게 그리 말했다.
스미스 감독은 에드워드가 경기를 관찰하는 동안, 선수들의 플레이 스타일을 설명했다. 성전 외우듯 ‘우승’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알렌 코치보다 훨씬 유익했다.
에드워드는 로커 룸에서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같은 플뢰레 종목에 출전한 1학년 라이언 헨더슨이 에드워드를 조금 호의적으로 봤다.
에드워드는 라이언이 찰스 패거리와 어울린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무리에 완전히 소속된 건 아니었고, 찰스 패거리를 동경해 그 무리와 어울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여, 에드워드로서는 라이언이 제게 내비치는 반응이 의문스럽기만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라이언은 예선에서 탈락했다. 애써 마지막 바우트까지 끌고 갔지만, 결국 12대5로 출전하지 못했다.
찰스 쪽 사람과 더 엮이고 싶지 않았던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그러기엔 처음 받는 호의였다.
“그쪽도 잘했어요.”
같은 칼리지 후배에겐 말을 놓는 게 자연스러운 행동이나, 에드워드는 트집 잡힐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바깥은 시원했다. 그리고 제네비브는 먼저 간 건지 안 보였다.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준 손수건을 꺼냈다. 복잡하게 수놓은 자수는 누가 봐도 최상품이었다. 손수건 모서리엔 좀 더 진한 흰색으로 그녀의 이니셜이 새겨졌다.
굉장히 사적이 물건을 받았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자, 목이 화끈거렸다. 시원하던 공기가 조금 더워진 것 같기도 하다.
“에드워드 군이신가요?”
별관에 들어섰을 때, 한 남자가 자신을 불렀다.
이제 세 번째로 듣는 카르디르 억양이 센 제국어였다. 아카데미에 상주하는 직원 유니폼을 안 입은 걸로 보아 개인 식솔 같았다.
에드워드가 맞다고 대답하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달링 후작부인께서 찾으십니다.”
달링 후작부인이라고 하면…… 제네비브의 모친이었다.
‘그분이 왜 나를?’
에드워드가 무어라 더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는 그 짧은 침묵을 동의로 알아들은 듯 작게 턱짓했다.
남자가 안내한 곳은 별관 이스트 윙이었다. 주로 학부모, 그중에서도 대귀족들이 지내는 공간이었다.
이스트 윙은 학생 별관이 겸손하게 보일 정도로 화려했다. 마이언의 황금기가 이곳에서 다시 재현되는 것 같았다. 대리석 바닥, 황금으로 된 벽과 가구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 호화로움을 즐기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왜 달링 부인이 나를 불렀는가’로 가득 차 있었다.
‘왜 부르셨지? 내가 선배와 어울려서? 어울리지 않기를 바라시나?’
여러 추측을 했지만, 쉽게 결론 내지 못했다.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에 남았기 때문일까? 에드워드는 주제넘게도 달링 후작부인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닐 거라고 착각하고 싶었다.
“여기입니다.”
남자는 에드워드를 라운지로 안내했다. 라운지로 보이는 공간을 대관이라도 한 건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전부 달링 후작부인의 사람들 같았다.
달링 후작부인은 라운지 중심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후작부인에게서 제네비브의 흔적을 찾아내는 건 집중이 필요했다. 어제 본 바로는 제네비브 특유의 눈매나 분위기는 달링 후작부인과 똑같았다.
몇 박자 늦게 에드워드의 존재를 깨달은 달링 후작부인이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그녀는 다소 지친 인상이었다.
그런 후작부인을 보며 에드워드는 반사적으로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다.
“달링 후작부인을 뵙습니다.”
에드워드는 깔끔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선 긴장한 티는 나지 않았다. 그런대로 합격점이었다.
“그래, 앉으렴.”
달링 후작부인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반대쪽 소파를 가리켰다. 천천히 다가가 앉자, 그녀가 비로소 말을 이었다.
“어제 소동은 미안하구나. 너도 알다시피, 네 의견도 묻지 않았는데 내가 네 샤프롱이 되어 버렸어. 하지만 내가 널 초대했으니 어떤 의미로는 처음부터 그런 걸지도 모르겠구나…….”
에드워드는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네게 사과를 해야 해.”
하지만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제게 사과하는 달링 후작부인은 에드워드를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 아닙니다. 제게 사과할 필요는…….”
잘잘못을 따지자면 그 상황에서 달링 가문을 입에 올린 본인 잘못이 더 크다. 귀족을 도발하고 말하는 대신, 그가 하라는 대로 바짝 엎드리는 게 옳았을지도 몰랐다.
에드워드가 허둥지둥 제 의사를 전하려는 걸 본 달링 후작부인은 손을 올렸다. 거기까지 말하라는 신호였다.
“나는…….”
달링 후작부인은 잠깐 말을 멈췄다. 버거운 사실을 말하려는 듯 푸른색 눈이 바닷속처럼 낮게 가라앉았다.
“네가 제네비브와 어울리지 않기를 바랐어.”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가슴을 옥죄였다.
에드워드는 뭐가 문제냐고 묻고 싶었지만, 답은 명확했다. 문제가 아닌 데가 없었다. 밀포드 씨가 한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선배와 어울리지 않는다.’
제아무리 제네비브가 관용을 베풀어 자신과 어울려도 세상은 그렇게 보고, 또 생각한다.
아니, ‘어울리지 않는다’는 약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제네비브와 에드워드는 같이 있어선 안 되는 조합이니까.
달링 후작부인은 에드워드가 회피하고 싶은 현실을 친절히 상기시켰다.
「귀족의 사회라는 건…… 처음부터 그곳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적응하기 정말 어려운 곳이란다.」
달링 후작부인이 공용어를 꺼내자, 주변 사용인들은 대화를 못 들은 척 행동했다.
「오웬이 내 조카인 걸 보면 알겠지만, 난 카르디르 사람이 아니야. 너처럼 아본리아가 내 고향이지. 아서를 만나고 카르디르에 온 거란다.」
푸른 눈이 추억을 떠올리듯 감상에 젖었다.
에드워드는 달링 후작부인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동화책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를 왜 제게 말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됐다.
명망 높은 달링과 블라이스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왕자님과 공주님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유명한 소설의 마무리 문장을 그대로 따라가듯, 달링 부부는 타인이 보기에도 금실이 좋아 보였다.
「아본리아 제국에서 나는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단다. 오, 대단했고말고. 사교계는 내 중심으로 흘러갔고, 모두가 나를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순진하게도 그게 카르디르에서도 똑같을 줄 알았어. 몇 번 방문했을 때, 모두 내게 친절하게 대해 줬단다.」
달링 후작부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에드워드는 그 말이 귀족의 배부른 한탄처럼 들렸다.
다음 문장이 나오기 전까지.
「하지만, 손님일 때와 그곳에 소속될 때 사람은 아주 다르게 행동해. 억양부터 몸가짐, 차림새를 보며 내가 그들과 어울리는지, 수준이 맞는 사람인지 평가한단다.」
손님일 때와 그곳에 소속될 때, 사람은 아주 다르게 행동한다. 단순한 명제와 이어서 달링 후작부인의 일화는 에드워드가 밀포드 씨에게 겪은 것과 아주 흡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