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50화
* * *
오전 시합에서 이기며 에드워드는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상대는 테오도르 우드빌. 에드워드는 그간 봐 왔던 테오도르의 경기를 떠올리며 전략을 세웠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일과가 식사와 경기의 무의미한 반복이다 보니, 그가 접하는 사람은 대부분 펜싱 클럽 관계자였다. 경기 전마다 관중석에서 제네비브를 찾는 게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로커 문을 연 에드워드는 얼굴을 굳혔다.
“…….”
손수건이 사라졌다.
로커 안을 샅샅이 뒤지고, 옷에 있는 모든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로커 룸 바닥과 의자 아래를 살펴보았는데도 손수건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에드워드를 보며 찰스와 마틴이 킥킥 웃었다.
“터너, 콜린스. 어디에 뒀어.”
에드워드는 화를 참으며 물었다. 사고라도 치면 그 순간 실격이다.
“모르겠는데? 잃어버린 걸 왜 나한테 찾아? 나가서 새로 하나 장만하든지.”
마틴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그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동을 부리면 에드워드 손해였다. 미친 척 싸움을 시작한다 해도 쪽수로 자신이 밀린다.
쾅! 소리 나게 로커를 닫은 에드워드는 로커 룸 밖으로 나왔다.
제네비브라면 손수건 하나 잃어버린 것쯤 괜찮다고 말하겠지만, 에드워드는 괜찮지 않았다. 경기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던 게 전부 그것 덕분인데.
에드워드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열심히 찾아보고 없으면 없는 대로 경기를 치러야 한다.
“……저기.”
그때, 뒤에서 라이언이 그를 불렀다. ‘선배’라는 호칭은 죽었다 깨도 하고 싶지 않은 건지, 그는 ‘저기’로 퉁 쳤다.
“제가, 어디에 뒀는지 압니다.”
“그런가요.”
“안내가 필요하십니까?”
에드워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이 앞장서서 건물 끝으로 향했다.
“그런데…… 제게 알려 줘도 되나요? 콜린스가 싫어할 텐데.”
“아아, 찰스 선배 말하는 겁니까? 괜찮습니다.”
라이언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둘은 조금 외진 곳에 마련된 창고 앞에 멈춰 섰다. 에드워드는 고작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이런 곳까지 알아낸 찰스가 징글징글했다.
창고는 사람 손을 거의 타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서늘한 공기와 매캐한 먼지내가 풍겼다. 숨을 쉰 에드워드는 콜록거렸다.
창고 바닥엔 끝이 휘어진 검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고, 낡은 선반이 벽 한 면을 빽빽하게 채웠다. 빛 한 줄기 안 들어오는 창고는 어딘가 으스스했다. 바닥엔 흙 묻은 훈련용 매트리스가 깔렸다.
라이언이 알려 준 대로, 훈련용 매트리스 위에 창고와 안 어울리는 깨끗한 손수건이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경기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밀포드 씨가 떠오를 때마다 이게 없었다면 집중하지 못했을 거다.
“고마워요, 말 안 해 줬으면…….”
쾅!
그 순간, 문이 닫혔다.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에드워드는 문을 향해 뛰쳐나갔다.
철컥, 철컥.
거세게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쾅! 쾅!
“헨더슨!”
그는 라이언을 부르며 최후의 방법으로 문을 걷어찼다. 하지만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문 열어!”
“이런, 에드너드. 문 고장 내면 낼 돈은 있고?”
문 너머로 즐겁게 조롱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찰스였다. 그래도 이곳에선 안 건드릴 줄 알았는데, 그는 정말이지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망할, 망할 콜린스.
에드워드는 실로 오랜만에 입에 욕설을 담았다. 그에겐 욕조차 아깝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에드워드가 할 수 있는 건 욕이나 꺼내 달라는 애원밖에 없었다.
“망할이라니. 에드너드, 네 오만한 태도만 보면 황태자 같다니까?”
“콜린스, 제발 문 열어.”
에드워드는 주먹으로 문을 내리꽂았다.
“아하하하!”
마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라이언, 고생했다. 시키는 대로 딱 잘했어.”
“아닙니다. 재미있었습니다.”
발걸음 소리는 점차 멀어졌다. 에드워드가 아무리 욕을 하더라도, 한번 잠긴 문은 열릴 기미가 안 보였다.
* * *
3위 결정전은 치열했다.
첫 번째 바우트는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3위 결정전은 우드 칼리지의 요청으로 짧은 타임아웃에 들어갔다. 피스트 양 끝에서 보호구를 벗은 두 선수는 본인들의 루틴을 소화하며 지도자들에게 조언을 들었다.
결승을 먼 곳에서 보기 싫었던 제네비브는 점심까지 고사하며 일찍부터 기다렸다. 정성이 통했는지 그녀는 가장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분위기가 이상한데?’
세인트 존 칼리지 펜싱 클럽 대기석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들뜨거나 비장하리라는 예상과 다르게 대기석 공기는 눈에 띄게 어수선했다. 몇 년 만에 바라보게 된 우승인데, 관계자들의 표정엔 결승을 향한 기대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걱정과 불안이 이곳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찰스 무리 중 한 사람이 스미스 감독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하자 그녀는 화난 표정으로 그들에게 삿대질하며 무언가를 시켰다.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멀리서 나누는 대화가 ‘심각하다’라는 걸 제외하면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제네비브.”
가까운 대기석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모교 펜싱 클럽에서 간신히 시선을 뗀 제네비브는 아래를 봤다. 테오도르가 한 손에 보호구를 든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그러고는 돌연 본인 시합 상대를 제게 찾았다.
“아니다. 잠깐 여기로 올래?”
주변 학생들의 눈치를 본 테오도르가 말을 바꿨다.
제네비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해를 구하며 복도 쪽으로 나왔다. 펜싱 경기장으로 통하는 문을 열려고 하니 직원이 그녀를 저지했다.
“이 친구는 괜찮아요.”
테오도르의 허락으로 제네비브는 처음으로 펜싱 선수 대기석을 밟았다.
“무슨 일이야?”
제네비브가 물었다. 갑자기 에드워드를 왜 찾는 거지?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지금 너희 칼리지에서 에드워드가 도망쳤다고 해.”
“뭐라고?”
목소리는 저절로 커졌다.
“쉿. 목소리 낮춰. 일이 커지면 더 번거로워지잖아.”
테오도르는 자신에게 꽂힌 시선을 마주하며 낮게 말했다. 제네비브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 없는데.”
“동의해. 그래서 일단 에드워드를 찾아봐야 할 거 같아. 너희 칼리지 감독이 부원들에게 찾으라고 시키긴 했는데…… 걔들은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 안 하는 거 같거든.”
테오도르가 말을 이었다.
“나도 경기 시간을 최대한 미뤄 볼 생각이야. 지금 경기는 넉넉하게 6분 잡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까지 5분…… 나와 너희 감독이 얘기하면 20분 정도 미룰 수 있어.”
30분 남짓한 시간이 주어졌다.
그 시간 안에 에드워드를 찾아야 한다.
* * *
이제 에드워드는 문을 더 흔들거나 열려는 대신, 그저 찰스 패거리 중 한 사람이 경기가 끝나고 열어 주길 기다렸다.
“…….”
일이 잘 풀리리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에드워드는 이곳에 빠져나온 자신에게 누군가 ‘여름 대회는 이미 끝났고, 학교는 알아서 가야 합니다’라고 말해 줘도 놀라지 않을 자신 있었다.
‘움직이면 그게 더 손해야.’
경험에 의하면 울거나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주길 기대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만큼 무의미한 짓도 없었다. 오히려 힘만 빠졌기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에드워드는 매트에 앉아서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그려 봤다.
찰스가 자신의 부재를 어떤 거짓말로 설명할지 몰라도, 아마 실격 처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게 그의 추측이었다. 테오도르 우드빌은 자연스럽게 우승을 차지하고, 3위 결정전은 선수들도 모르게 2위 결정전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
에드워드는 얼굴을 쓸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건지 일이 이렇게 꼬일 수가 없었다.
찰스도 짜증 났고, 그가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수족들도 짜증 났다. 왜 자신에게 이러는 걸까? 고작 평민이 귀족 학교에 다녀서? 웃기지도 않았다. 갈기갈기 찢어도 시원치 않았다.
에드워드는 신경질적으로 손에 잡히는 물건을 던졌다. 순전히 분풀이에 불과했다.
덜커덩!
경기용 시계와 두꺼운 펜싱 관련 서적은 문에 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에드워드는 숨을 가쁘게 쉬었다.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이런 일을 예측하지 못한 자신이었다.
라이언이 찰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한다는 건 진작 알았는데, 어째서 그를 믿었는가. 고작 펜싱 좀 잘하는 걸로 환심을 샀다고 생각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한심했다.
창고 물건을 박살 낸들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이곳 물건을 전부 망가트려도 나가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쿵!
에드워드는 마지막으로 문을 걷어찼다.
여전히 문은 안 풀렸지만 쓸데없이 힘을 빼는 건 경계해야 한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기곤 방금 자신이 저지른 난동을 수습했다.
‘그래도 선배가 준 손수건은 찾아서 다행이야.’
그는 애써 좋은 부분에 집중하며 저를 달랬다.
쾅쾅!
그때, 굉음이 들려왔다.
에드워드가 낸 소리는 아니었다. 문 반대편에서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