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52화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백 년만에 나온 펜싱 우승이기도 했다.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를 제치고 에드워드는 우승을 거머쥐었다.
거대한 환호가 경기장을 채웠다.
특히 세인트 존 칼리지 학생들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크게 소리 질렀다. 마치 자신이 승리한 듯 광분하며 에드워드의 이름을 포효했다. 체면도, 위신도 이 순간만큼은 잊고 우승의 기쁨을 나눴다.
오웬은 흥분한 나머지 소리를 지르며 제임스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제임스는 고문을 연상케 하는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경기장을 향해 삿대질하며 ‘쟤가 우리 후배야! 이게 세인트 존 칼리지라고!’를 목청껏 외쳤다.
블랑카는 열심히 기록하던 노트를 집어 던지고 빌헬름의 등을 팍팍 때리며 미친 듯이 에드워드의 이름을 불렀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뒤늦게 자각한 칼리지 펜싱 클럽 소속 사람들은 헹가래 같은 것을 해 줄 생각으로 피스트 위에 올라갔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에드워드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귀가 아플 정도로 들리는 환호도, 저를 영웅처럼 바라보는 시선도.
그의 모든 신경은 한 사람을 향했다.
제네비브 달링.
그녀 또한 주먹을 쥐며 마치 제 일인 양 좋아하고 있었다.
‘나는 선배를…….’
좋아한다.
이 감정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달링 후작부인에게, 스스로에게 에드워드는 이건 그저 인간적인 호감과 감사함이라고 정의했다.
떳떳한 감정을 방패 삼아 제네비브와의 관계를 정의하고 불순한 마음을 모르는 체 싶었지만, 이건 그런 흔한 감정이 아니었다. 모르는 척하기 쉽지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제네비브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을 뿐이다. 기분 좋은 떨림이 느껴졌다.
에드워드는 본인을 부르는 팀에게 가지 않았다.
과연, 그들을 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에드워드는 그들을 팀이라고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부터 에드워드의 팀이었던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제네비브 달링.
그는 칼을 집어 던지곤 피스트 반대편을 향해 달려갔다. 에드워드는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공기가 얼굴에 닿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이 느껴졌다.
애매한 길이로 잘린 거추장스러운 앞머리를 뒤로 넘기자 준수한 외모가 드러났다. 잘생긴 얼굴에 기쁜 미소가 번진다.
그는 피스트를 내려가, 제네비브에게 달려갔다.
“제네비브 선배!”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에게 와락 안겼다. 넘어지듯 끌어안자, 그 무게 때문에 제네비브는 뒤로 몇 걸음 움직였다.
입안에서 이름이 발음되는 그 감각이 좋았다.
품 안에서 작게 움직이는 움직임이 좋았다.
“고마워요. 전부 선배 덕분이에요.”
에드워드는 한 글자, 한 글자 그가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잔상처럼 남은 제네비브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 우승했다는 사실보다 이렇게 제네비브가 있다는 게 더 좋았다.
나는 당신을 봐서 이렇게 행복한데, 선배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시나요?
에드워드는 묻는 대신 직접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작은 팔이 그의 등을 감싸자마자 에드워드의 동작은 그대로 정지했다.
“네가 잘할 줄 알았어.”
질릴 일 없는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제네비브는 그를 한 번 세게 안아 주곤 몸을 살짝 뒤로 뺐다.
“그, 그게……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주체하지 못하고 안아 버렸다. 정리 안 된 말들이 뒤죽박죽 나왔다.
“오늘 같은 날까지 죄송하면 어떡해.”
제네비브가 미소를 지었다. 반으로 접힌 눈이 예뻤다.
그녀가 까치발을 올리자, 에드워드는 허리를 살짝 숙여 줬다. 부드러운 손이 연갈색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였다.
“다들 널 찾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주변이 보였다.
모두가 ‘에드워드’를 불렀다.
“제네비브 선배.”
“왜?”
이름을 부르자 녹색 눈이 살짝 커졌다. 어떻게 이틀간 안 보고 보낸 건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경기장 로비에서 뵈어요.”
에드워드는 짧게 말했다. 자신이 제네비브를 못 찾는 일이 없도록, 또는 그 반대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말이었다.
짧은 재회 뒤엔 모든 게 정신없이 흘러갔다. 다시 경기장 안으로 발을 들이자, 온몸이 울리는 함성이 들렸다.
뒤늦게 그에게 다가와 등을 두들기는 알렌 코치나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스미스 감독, 그리고 인상을 쓰는 찰스와 그 패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귀빈석에 있는 밀포드 씨의 지정석은 오늘도 비었다. 그는 첫날 이후로 제 경기를 관람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축하해. 마지막으로 너와 경기 치른 걸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트로피 수여를 위해 단상 위로 올라가니, 머리 하나 아래에서 테오도르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3등을 한 우드 칼리지 학생 또한 인상 깊은 경기였다고 칭찬했다.
공기는 삽시간에 호의적으로 변했다.
트로피를 받으면 조용해질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에드워드는 꽤 오래 붙잡혔다. 알렌 코치는 에드워드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사람들을 소개했다.
대부분 그의 지인이거나 어느 협회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물론, 좋은 의도에서 한 행동이었다. 귀족이 아닌 이상 먹고살기 힘드니, 졸업 뒤에 선수로 활동하라는 제의였다.
당연하게도 테오도르나 3등이었던 우드 칼리지 학생은 이런 일을 겪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이런 대화를 지금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나서야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시간은 생각 이상으로 지체되었다.
반사 이익으로 에드워드는 로커 룸을 혼자 쓰는 사치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겐 여유를 즐긴 시간이 얼마 없었다.
재빨리 씻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은 에드워드는 펜싱복과 운동화를 가방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문을 벌컥 열었다.
“……블랑카 선배?”
“오! 에디!”
그가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은 블랑카였다.
“호호, 내가 남자 탈의실을 훔쳐보는 변태라곤 생각하지 말아 줘.”
그녀가 입을 가리며 조신하게 말했다.
“하도 안 와서 내가 확인해 보겠다고 했지!”
“제네비브 선배는요?”
“진저는 지금 로비에서 기다리는 중이야.”
블랑카가 제네비브의 소식을 전했다. 제네비브가 길을 헤매느라 얼마 안 기다렸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킨 건 덤이었다.
“같이 가자. 가면서 네게 할 말도 있고.”
“저와 무슨 말을…….”
문장 하나가 온갖 불안을 일으켰다. 대체 자신과 나눌 만한 이야기가 뭘까? 에드워드는 추궁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오, 큰 건 아니야. 여기 나가면 말할게.”
그 말에 에드워드는 블랑카를 빠른 길로 안내했다.
생각해 보니 혼자 블랑카를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네비브 없이 오웬과 제임스를 만나는 건 서너 번의 되풀이 끝에 많이 무던해졌지만, 제네비브 없이 블랑카를 만나는 건 안 좋은 의미로 떨렸다.
어떤 말을 꺼낼지 감조차 안 잡혔다. 블랑카 선배가 나를 따로 부를 이유가 있나?
“블랑카 선배, 그래서…….”
화려한 로비에 (마이언 아카데미도 학비를 만만치 않게 걷어 가는지) 도착했을 때, 에드워드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마자 이글거리는 회색 눈이 에드워드를 직시했다.
“<더 칼리지>의 신문 1면이 되어 줘.”
마치 예비 장인어른에게 결혼을 허락 받으려는 사람이 연상되는 비장한 목소리였다.
“솔직히 말할게! 사실, 처음엔 제임스를 생각하고 있었어.”
블랑카는 별로 비밀이 아닌 사실을 쑥스럽다는 양 이야기했다.
“테오도르는 편하고 내용 쓰기도 쉬우니까. 펜싱은 그쪽을 생각하고 있었지. 그게, 너도 알다시피 에디 너랑 내가 막, 그렇~게 편안한 사이는 또 아니잖아? 아까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숨이 막혔다고!”
불편한 진실까지 들춰내는 블랑카를 보니 보통 절실한 게 아닌 듯했다. 어색했던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던 거다.
“하지만! 너의 경기를 볼 때마다 ‘놓치면 안 된다!’를 매번 느꼈어. 시간은 많이 안 뺏을게. 내일 딱 한 시간만 빌려줘.”
복도를 걷는 동안 생각한 것치곤 호소력이 있었다. 주장의 근거와 구성이 좋았다는 건 절대 아니었고, 뻔뻔할 정도의 솔직함이 오히려 가산점을 받았다.
그리고 블랑카가 굳이 뒤에 설명하지 않았더라도 에드워드는 승낙했을 거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꺅! 진짜 멋지게 기사 뽑을게! 후회 안 할 거야!”
그녀의 멋진 기사 제목 후보에는 <백 년 만에 칼리지로 돌아온 펜싱 우승컵, 그 주인공은 바로……>와 <세인트 존 칼리지 펜싱의 자존심, 에드워드와의 인터뷰> 따위가 존재했지만, 에드워드는 일주일 뒤에나 알게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