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53화
제네비브는 조금 더 걸은 뒤에야 보였다.
로비 소파에 등을 지고 앉은 그녀의 맞은편엔 테오도르가 있었다. 먼저 에드워드를 발견한 테오도르가 손을 흔들고 나서야 제네비브가 그를 발견했다.
그들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여학생 서너 명이 그를 막아섰다. 그 중심엔 훌리에타가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무리를 지어 왔는데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훌리에타의 친구는 렐타 억양이 묻어난 제국어로 블랑카에게 잠깐 나와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눈치를 보던 블랑카는 몇 걸음 떨어져, 그 사정을 들었다.
「우승 정말 축하해요!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그, 첫날에도 감사한 일이 많았고…… 해서요.」
훌리에타는 에드워드에게 고마웠던 일을 쭉 나열했다.
첫날 만찬에 언어가 안 통해서 힘들었는데 그때 렐타어가 들려서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폴로 경기장까지 에스코트해 줘서 고맙다, 등등.
“그래서 말인데…… 저의 무도회 파트너가 되어 주세요!”
훌리에타가 거의 소리 지르듯이 말했다.
“…….”
이런 상황을 생각하지 못한 에드워드는 난처했다.
에드워드는 무도회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그나마 생각하던 파트너는 (에드워드는 잠깐 제네비브에게 시선을 뒀다) 이미 가기로 한 사람이 있었다.
블랑카로부터 얼추 상황을 파악한 듯, 제네비브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
뭔가 이 요청을 거절하면 제네비브가 실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제 선택을 존중해 줄 사람이지만.
길어지는 에드워드의 침묵에 훌리에타의 눈은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제 파트너가 되어도 괜찮겠어요?」
에드워드가 되물었다.
승낙 또는 거절이라는 답이 나올 줄 알았던지 훌리에타는 다소 당황한 모습이었다.
「으음, 네.」
그녀는 깔끔하게 대답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임스에게 예의 바르게 거절하는 방법이라도 배워 올 걸 그랬다. 귀족들 간엔 거절에도 예의가 있다는 걸 기억한 에드워드는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승낙했다.
그사이 훌리에타는 다시금 친구들에게 돌아가 즐거운 목소리로 「됐다.」라고 이야기하며 기뻐하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제네비브가 금색 곱슬머리를 경쾌하게 튕기며 다가오는 걸 보자, 에드워드는 조금 전 제 선택을 조금 후회했다.
제네비브의 눈앞에서 다른 사람과 연회에 간다는 걸 보이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유일한 장점을 찾자면 에드워드가 직접 이 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잘됐다! 가르시아 양과 파트너인 거야?”
“네.”
“이런 경험이 있는 것도 유익하지. 춤도 추고, 사람도 만나고.”
“춤도 춰야 하나요?”
에드워드는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모르는 척 물었다.
에드워드는 달링 후작부인이 여러 가지를 지원해 준 이후로 매일같이 방에서 닉과 함께 스탭을 밟으며 춤을 연습해야 했다. 춤은 차라리 훈련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웠다.
“안 추고 싶으면 안 춰도 돼. 근데, 종목에서 우승한 사람들은 꼭 춰야 해.”
“…….”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제네비브가 재잘거리며 설명했다.
“속 안 좋아?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사실 춤을 춰야 한다는 건 알고 있고, 달링 후작부인의 은혜로 춤을 배운 덕분에 춤 서너 개를 몸에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밝혀야 할지 고민하던 게 사뭇 진지해 보였던 모양이다.
제네비브가 몇 걸음 가까이 다가와 그를 올려다봤다. 갑자기 가까워진 간격에 에드워드는 놀라서 한 걸음 물러섰다.
“저, 그게…… 제가 춤을 못 춰서요.”
에드워드는 결국 토해 내듯 말했다. 제네비브는 친절하니까, 이렇게 말하면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하지 않을까.
“내가 알려 줄까?”
역시나 제네비브는 다정하게도 그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네, 좋아요.”
“그래! 그럼, 시간 정하면 사람 불러서 알려 줄게.”
제네비브가 싱그럽게 말했다.
* * *
‘내가 왜 춤을 알려 주겠다고 했지?’
제네비브는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먼저 나불거리는 제 입을 꿰매고 싶었다.
여자 포지션이라면 누구보다 뛰어나게 선생 역할을 수행했겠지만, 남자 역할일 경우엔 말이 달라진다.
‘우승의 여운이 남아서 그래. 너무 신났어…….’
선수에 자아 의탁하여 개인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라고 감정에 취해 평소에 안 하는 짓을 경우가 왕왕 있다. 제네비브는 그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폴로 경기에 출전을 못 했으니 더 몰입한 거다. 모든 이유를 우승의 기쁨으로 돌리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에드워드를 찾아다니던 때의 다급함이 사라지고, 우승의 여운을 몇 번 되새기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으니 그제야 놓쳤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서 부내가 나네.’
경기장을 나가는 에드워드의 뒷모습을 보며 제네비브는 객관적인 평가를 내렸다.
황제의 핏줄이니 어떻게 보면 유전적으로 그렇게 태어나게끔 설계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감이 부족할 뿐이지, 에드워드의 몸가짐이나 억양만큼은 황족의 그것이었다.
그래도 덥수룩한 머리와 안경, 낡지만 깔끔한 옷이 고귀한 분위기를 많이 덜어 냈다.
하지만 오늘, 에드워드는 조금 달라졌다.
그의 앞머리 길이는 묘하게 짧아졌고,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던 안경테는 튼튼한 것으로 바뀌었다. 가장 눈에 안 띄는 디자인으로 고르고 고른 듯한 셔츠는 척 보기에도 고급품이었다.
‘밀포드가 했을 리는 없고.’
제네비브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에드워드를 챙길 사람이었다면 칼리지에서부터 챙겼을 거다.
“고민이라도 있어?”
그때, 테오도르가 물었다.
“음…… 에드워드가 춤을 못 춰서 내가 알려 주기로 했는데, 생각하니까 나도 남자 스텝을 몰라서…….”
차마 밀포드에 대해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제네비브는 말을 둘러댔다.
‘뭐, 진짜 고민이기도 하고.’
물론, 제임스나 오웬을 데리고 오면 끝나는 일이었다.
경기 세 개를 끝낸 제임스가 남은 시간 동안 쉬어야 할 거 같고, 오웬은 친구를 만나러 돌아다닐 것 같다는 게 문제긴 했다.
제임스는 부탁하면 도와주겠지만, 그런 점 때문에 더 눈치가 보였다. 그리고 오웬은 늘 대가로 원하는 게 너무 많았다.
“그럼 내가 도와줄까?”
“헉. 그래 줄 수 있어?”
제네비브는 그 달콤한 제안을 덥석 물었다.
“물론이지. 1층 휴게실 대관하는 걸 추천해. 컨벤션 룸이나 라운지보다 시설이 훨씬 좋거든.”
태오도르는 현지 학생만 아는 팁을 전수했다. 안 그래도 라운지를 생각하던 제네비브는 그 말을 따랐다.
휴게실은 테오도르의 말처럼 좋았다.
라운지는 1인용 안락의자와 장식품으로 가득해 춤 연습은커녕 가만히 앉아야 했고, 컨벤션 룸은 기다란 책상이 차지하는 공간이 많았다.
제네비브는 휴게실을 보며 감탄했다.
천장까지 닿는 높은 창은 아름다운 바깥 풍경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사치스러운 동시에 포근한 공간엔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와 보기만 해도 푹신한 소파가 있었다. 각종 가구가 있는데도 충분히 연습할 만한 공간도 있었다. 탐스러운 화이트 심포니가 담긴 꽃병이 벽을 장식했다.
테오도르는 그녀보다 먼저 도착했다. 크림색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인기척이 들리자 입구 쪽을 보았다.
“먼저 와 있었네?”
“나도 방금 도착했어.”
테오도르가 대답했다.
로맨틱한 기류가 흐르기 충분한 공간이었다. 이런 곳에 테오도르와 둘이서만 있는 날도 있구나.
‘의외로 떨리진 않네.’
문뜩 든 생각이었다.
테오도르를 보면 몇 년 전 약혼식이 떠올라 창피하긴 했지만, 창피함과 함께 밀려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설렘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은 설렐 줄 알았는데.’
어렸을 때 겪은 해프닝을 배제하면 계속 두근거리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 뜯어보니 제네비브는 그때의 ‘이성적인 호감’으로 인해 자신이 예전처럼 바보 같은 짓을 지르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테오도르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하지만 막상 그와 단둘이 있어 보니, 미련보단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그동안 그때 일에 너무 연연했던 걸지도.’
물론 고백한 일은 아직도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지만, 어쩌면 그 일로 마음이 통하는 좋은 친구 하나가 더 생긴 걸지도 몰랐다.
제네비브는 테오도르를 봤다.
“음. 우리, 같이 춤춰 본 적 없지.”
고요한 침묵을 깨부순 건 제네비브였다.
“누굴 가르치기 전에 한번 맞춰 봐야 하지 않겠어?”
본인이 생각해도 참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그러게.”
하지만 테오도르는 굳이 트집을 잡지 않았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한번 춰 볼래?”
제네비브는 코웃음 소리를 내며 미소를 지었다.
“아쉽다.”
테오도르가 가볍게 스탭을 밟으며 말했다.
“뭐가?”
“한 번 즈음은 너와 가고 싶었거든.”
테오도르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늦어 버렸네.”
제네비브는 농담하듯 말했다.
“너무 늦어 버렸지.”
테오도르는 옅은 미소를 계속 유지했다.
에드워드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온 건 몇 초 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