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54화
* * *
에드워드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블랑카와의 인터뷰가 생각보다 늦게 끝난 게 첫 번째였고, 두 번째로 휴게실을 찾는 데 헤맸다.
휴게실은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했다.
아늑하고 잘 꾸며진 응접실, 기차에서 본 것과 비슷한 흰색 장미가 곳곳에 놓였다.
그리고 흰 꽃 사이에서 제네비브는 누군가의 손을 잡은 채 춤을 추고 있었다. 염두도 안 뒀던 테오도르가 그 상대였다.
제네비브를 도울 사람으로 오웬이나 제임스 정도를 생각했었기에 테오도르를 보자니 먼저 당혹감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에드워드가 인사하자 제네비브가 그를 인지했다. 그녀는 당황한 듯 테오도르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테오도르가 도와주겠대! 그래서 한번 맞춰 보고 있었어. 잘됐지?”
제네비브는 재빨리 방금 일을 설명했다.
“그렇군요.”
에드워드는 무던하게 대답했다.
“열심히 가르칠게.”
“감사합니다.”
테오도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어떤 식이든 춤을 익히면 된다. 별다른 잡담 없이 수업은 시작되었다.
“춤은 두 개 배울 거야. 연회 때 네가 꼭 춰야 하는 춤이 하나 있어. 원래 두 곡 정도 알아 두면 좋은데…… 시간이 빠듯해서. 우선, 하나를 제대로 배우는 걸 목표로 삼자. 너무 무리하지는 말자고!”
전날 에드워드가 닉을 붙잡고 자발적으로 보충 수업을 요구했다는 걸 모르는 제네비브가 해맑게 그를 북돋웠다.
“<승자들의 춤>부터 배워 보자. 아까 네가 본 게 <승자들의 춤>인데…… 언제부터 봤어?”
“뒷부분만 봤어요.”
에드워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머, 그렇구나. 그럼 다시 보여 줄게.”
그리고 그는 솔직하게 말한 걸 곧바로 후회했다.
“첫 곡은 <승자들의 춤>이야. 우승한 학생들이 나와서 연회 첫 춤을 추는 건데, 이름만 번지르르하지, 그렇게 어려운 춤은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치? 곡도 짧고 춤도 쉬워서 빨리 배울 수 있을 거야!”
닉이 고생하면서 가르친 <승자들의 춤>은 그녀의 설명대로 비교적 단순했다.
상대방 허리에 손을 두르고, 다른 쪽으로는 손을 맞잡아 박자에 맞춰 발만 움직이면 끝났다. 복잡한 스텝 몇 개를 제외하면 비슷한 동작을 반복하면 됐다.
<승자들의 춤>에서 남자가 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바쁘게 돌고 움직이는 건 여자의 몫이었다.
처음 닉이 추는 걸 봤을 때까지만 해도 에드워드는 자신이 있었다. 암기와 몸으로 하는 일엔 자부심이 있었기에 처음 본 걸로 스텝 패턴을 다 외웠었다.
“테오도르 발을 집중하면서 봐봐.”
시범을 보이겠다는 제네비브와 테오도르는 서로에게 인사를 하고 안무를 시작했다. 제네비브는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스텝을 밟으며 곡 멜로디를 작게 흥얼거렸다.
며칠 동안 경기와 훈련이 끝나고, 춤만 연습한 에드워드는 테오도르를 볼 필요 없었다.
그는 제네비브를 보았다. 심지 굳은 녹색 눈은 상대에게 집중했고, 흘러내린 잔머리는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작게 움직였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고, 영원할 것 같은 순간이 찰나에 끝났다.
“어때, 따라 할 수 있겠어?”
“아…… 네.”
넋을 놓고 보던 에드워드는 정신을 차렸다.
테오도르는 닉이 했던 것처럼 순서대로 발을 움직이며 설명했다. 닉의 지도 아래에 며칠간 고생한 게 빛을 발했다.
“처음인데도 잘한다. 한 시간 정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30분 안에 끝나겠어.”
테오도르는 손쉽게 따라 하는 에드워드를 보며 감탄했다.
‘그야, 처음이 아니니까.’
닉의 지도하에 처음 스텝을 밟았을 때, 머리로 암기한 걸 밖으로 꺼내기 힘들었다.
발은 생각보다 안 움직였고, 에드워드는 세 시간이 지나서야 춤과 유사한 동작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한 시간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거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여기서 뒤로 가는지 앞으로 가는지, 아니면 옆으로 가는지가 관건이었다.
“와…….”
에드워드가 중간에 있던 복잡한 스텝까지 어려움 없이 끝내자, 제네비브가 감탄을 흘렸다. 조금 뿌듯해졌다.
“우리, 곡이랑 한번 맞춰 보자!”
제네비브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대체 제네비브는 못하는 게 있긴 할까? 에드워드는 때아닌 주책을 떨었다.
“정말 박자만 맞추는 거야. 박자만 들어야 해! 기대하지 마.”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제네비브가 선전포고를 하듯 이야기했다.
“레코드판이나 오르골이 있었으면 그걸 쓰려고 했는데…… 아무튼, 정말 기대하면 안 돼.”
제네비브는 제 피아노 실력을 재차 강조한 후에야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따라란—.
매끄럽게 연주된 피아노 건반 소리는 ‘지나친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라는 옛말과 딱 어울렸다. 닉이 노래에 맞춰 연습하라고 틀어 둔 레코드판과 똑같았다.
“턱은 좀 더 올려도 괜찮아. 아, 그건 너무 올라갔고.”
자잘하게 고칠 부분을 알려 주는 테오도르의 지도하에 에드워드는 외운 대로 움직였다. 펜싱은 정신을 빼놓아도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데, 춤은 그러지 않아서 어려웠다.
뚱딴딴뚱딴딴—.
풍성했던 피아노 기교는 중간에 다다르자 단조로워졌다. 풍성하던 소리는 이제 단순한 계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곡은 4분의 3박자를 유지했다.
유명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피아노를 배운 지 한 달 정도 되는 아이의 곡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만약 오웬이 있었다면 배를 부여잡고 웃었을 거다.
하지만, 신기하게 곡은 끊기거나 박자가 밀리지 않았다.
“큼, 난 기대하지 말라고 했어.”
연주를 끝낸 제네비브가 민망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연주 좋았어. 걱정 말아.”
“정말?”
제네비브가 화사하게 말했다.
“아, 에드워드도 너무 잘했어! 어떻게 한 번 보자마자 바로 외울 수가 있어? 이 기세대로라면 다른 안무도 금방 배우겠다! 다 왈츠니까 쉬울 거야.”
다행히 두 사람이 알려 준 건 전부 닉이 가르쳤던 춤이었다.
춤 수업은 한 시간이 조금 지나고서야 끝이 났다. 지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차라리 너무 잘해서 못하는 척 노력하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제 역할을 마친 테오도르는 휴게실을 떠났다. 이후로는 제네비브가 무도회 예의를 가르쳤다.
“가슴은 항상 당당하게 펴야 해. 고개는 들고, 배는 힘주고, 어깨는 내리고. 음…… 너는 자세가 좋아서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겠다.”
제네비브가 자세를 교정해 주려던 손을 거두었다.
“같은 사람과 춤을 연속으로 두 번 이상 추면 안 돼. 이건 부부들도 지키는 규칙이라, 정 같은 상대와 춤추고 싶으면 한 번 쉬고, 그다음 턴에 같이 추면 돼.”
이 또한 춤 수업 중간중간 있는 휴식 시간마다 닉이 알려 줘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저를 위해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제네비브를 보니 구태여 이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제네비브는 복잡한 예절을 술술 이야기했다. 저를 위해 골똘히 고민하는 모습이 좋았다.
“맞아, 파트너 칭찬도 잊으면 안 되지! 가르시아 양에게 ‘오늘 아름답다’라고 꼭 말해 줘.”
제네비브가 다소 신난 어조로 말했다. 마치 둘이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어투였다. 그녀가 에드워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드러났다.
‘욕심내지 말자.’
친한 후배로 여겨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여기서 더 욕심내서 또 망치면 안 된다.
“그럼, 배웠던 걸 다시 복습하자. 나를 가르시아 양이라고 생각하고 연습해 볼래?”
모범생다운 의견은 수용됐다.
“저와 함께 춤을 춰 주시겠어요?”
닉에게 배우고, 제네비브가 다시 알려 준 대로 에드워드가 말했다.
“기쁘게요.”
제네비브는 그 제안을 기꺼이 승낙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 제네비브는 ‘그렇게 하는 거야.’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부드러운 손을 그러잡은 채 그녀를 리드했다.
예절 부분은 교과서적으로 잘 해냈지만, 춤은 아직도 어려웠다. 가끔 닉이 자원할 때 빼고는 대부분 혼자 연습했던 터라 상대와 추니 느낌이 달랐다.
손의 위치는 허리가 아닌 더 위에 둬야 했다. 같이 맞춰 보니 보폭은 드레스를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했다. 이 모든 걸 자연스럽게 하는 제네비브가 대단했다.
그녀의 가르침에 따라 에드워드는 약간의 사심을 담아 아름답다고 말하려 했다.
만약 진심이 아니었다면 말이 편하게 나왔을 테지만, 에드워드는 진심이었다. 그 짧은 한마디를 전하는 데 많은 결심이 필요했다.
“……오늘.”
“아야.”
하지만, 에드워드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분명 딱딱해야 하는 바닥이 불안할 정도로 말랑했다.
“서, 선배, 괜찮아요?”
그가 밟은 건 바닥이 아니라 발이었다. 에드워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렀다.
“죄송, 죄송해요. 제가 밟아서…….”
지금만큼 자신이 싫어진 적도 오랜만이었다.
에드워드는 우왕좌왕하며 제네비브를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제네비브가 허락만 한다면 안고 방까지 데려다주고 싶었다.
“저, 의사를…….”
다치면 누구를 찾아야 하지? 당장 알고 있는 의료진은 펜싱 클럽 소속이었다. 학생 대표가 아닌 사람도 치료해 주나?
“에드워드, 진정하고 여기 앉아 봐.”
제네비브가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네.”
에드워드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수긍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