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55화
“내 앞에선 너무 뻣뻣하지 않아도 괜찮아.”
제네비브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살을 찌푸리거나 욕을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마음의 짐이 덜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원래 사람은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야. 식상하긴 하지만, 이 세상에 처음부터 모든 걸 잘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이건 얼음 좀 갖다 대면 끝나.”
제네비브는 그를 안심시켰다.
“보폭만 조금 좁게 해서 추면 되겠다. 그치?”
제네비브가 이가 보이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게요.”
에드워드는 남은 하루 동안 춤을 완전히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 * *
마지막 날 연회는 언제나 큰 이벤트였다.
일찍부터 일어나 치장을 하고, 가장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일반 학생에게 있어서 이건 시합이나 다름없었다. 저녁 8시에 시작하는 연회를 위해 모두가 이른 아침부터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는 제네비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격한 첫날 만찬 드레스 코드와 다르게 마지막 날 연회는 ‘이브닝드레스’라는 범주 안에만 해당하면 뭘 입어도 괜찮았다.
제네비브가 마이언에 도착하기 전부터 계획이라도 세운 듯, 하녀들은 신이 나 여러 벌의 드레스를 꺼냈다.
비단, 새틴, 벨벳 등.
최상품 소재로 만들어진 드레스가 응접실을 채웠다. 하녀들은 심사숙고 끝에 우아한 분위기의 흰색 드레스를 골랐다.
하녀들이 꺼내는 폭넓은 드레스를 보던 제네비브는 지금 제 상황을 유쾌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세요!”
하녀가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드레스는 우아함도 잃지 않으며 적당하게 화려한 드레스였다.
순백이었던 첫날 만찬 때와 다르게 이번 드레스는 치마에 은색 실로 섬세한 자수가 놓였다. 허리 부분과 드레스 밑단은 하늘색 천으로 덧대어 있었다. 어깨를 그대로 노출한 소매 기장은 제네비브와 어울렸다.
하녀들은 올려 묶은 금색 머리카락에 하늘색 생화를 꽂아 장식했다.
플럼바고와 블루스타, 하늘색으로 염색한 화이트 심포니. 생화를 꽂은 이유가 ‘검소한 게 아니라 그냥 이 옷과 어울릴 것 같아서’라고 말하듯, 머리 위에 티아라도 올렸다.
극도의 사치였다.
채도 낮은 블루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힌 티아라와 마찬가지로 30캐럿짜리 연하늘색 다이아몬드가 목을 감쌌다. 제네비브는 장갑을 끼고 남은 보석까지 몸에 걸쳤다.
그렇게 귀걸이와 팔찌까지 끼고서야 제네비브는 준비를 마쳤다.
제네비브는 짧게 심호흡하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무도회는 눈부시게 화려했다. 지금 선 곳이 연회장 2층임에도 샹들리에는 더 높은 곳에서 반짝였다.
연회장 곳곳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만개한 꽃 같은 각양각색의 드레스가 보였다.
제네비브는 난간을 잡으며 1층으로 내려갔다. 지각한 터라 모두의 시선이 제게로 꽂혔다. 본인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모두의 주목을 받는 일은 언제나 민망했다.
하지만, 민망하다는 걸 티 내선 안 된다. 연회는 친구들끼리 모이는 친목 모임이 아니고, 자를 들어 평가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흠집 하나 보여선 안 되었다.
‘고개 들고, 배에 힘주고, 가슴 펴고, 어깨는 내리고.’
귀족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배웠던 말을 되새겼다. 특히나 에드워드를 가르친 사람이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미소 지으라는 걸 까먹었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찾으면 알려 줘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표정에서 일말의 고민도 읽지 못했다. 마치 왕비라도 된 것처럼 은은한 미소만이 보였다.
계단을 내려오자 제임스가 제법 진중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는 왼손을 등 뒤로 두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늦었잖아.”
제임스가 가볍게 나무랐다.
“원래 주인공은 늦는 법이야.”
제네비브는 자연스럽게 응수하곤 제임스의 손을 잡았다. 이어 걸음을 옮긴 둘은 오웬과 블랑카를 만났다.
“너, 아직 성인식도 안 치렀잖아!”
마치 성인식을 치른 양 샴페인을 홀짝이는 오웬을 보며 제네비브는 잔을 빼앗았다.
“연회장에 있는 건 전부 무알콜이야. 아, 소문으로만 듣던 몽모랑시 와인을 무알콜로 즐겨야 한다니……. 제네비브, 너도 마셔 봐. 이게 바로 마이언의 자부심이지! 귀부 와인을 못 마신다는 게 내 인생의 한이지만…….”
오웬이 샴페인 잔을 들이민 탓에 제네비브는 자연스레 한 모금 마시게 되었다.
그에게 무알콜 주류를 몽모랑시에서 개발했다는 와인 역사 수업까지 들은 제네비브는 사촌이 훗날 알코올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몽모랑시 귀부 와인이 최고다. 블랑카, <더 칼리지> 작업은 끝난 거야?”
블랑카는 실로 오랜만에 <더 칼리지>에 매이지 않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럼! 돌아가는 열차에서 내내 붙잡고 있어야 할 뻔했는데, 에드워드 덕분에 살았지. 학교 돌아가서 조금 다듬기만 하면 돼.”
블랑카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콧등까지 찡그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아직 안 온 거야?”
누구도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꾸준히 대화로 채워지던 연회장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제네비브를 포함한 몇 명은 이 원인을 찾아내려 연회장을 훑어봤고, 대다수의 시선이 있는 곳을 따라 한쪽을 올려다보았다.
“…….”
연회장 계단 아래로 내려오는 남자는 아름다웠다. 제네비브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듯,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회장을 가득 채우던 대화 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남자를 좇았다. 사람이 완벽하면 동경만 남는다고 했던가? 귀족 특유의 평가나 재단이 없는, 순수한 동경만이 담긴 시선이었다.
그의 움직임을 볼 때마다 마치 귀신에게 홀리는 기분이었다.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름다운 걸 보면 나오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방이 불길 속에 의심 없이 날아드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 자연스러운 현상을 문제 삼지 않았다.
애매하게 눈을 가리던 덥수룩한 머리는 단정하게 정리되었다. 이마가 살짝 보이게 연출한 헤어스타일이 그와 굉장히 어울렸다. 얼굴 절반을 차지하던 동그랗고 두꺼운 안경을 벗자, 그 뒤로 숨겨져 있던 예쁜 연갈색 눈이 보였다.
제복을 입은 그는 이 상황이 몹시 불편한 듯했다. 하지만, 제네비브를 제외하고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남자는 이런 연회를 자주 접한 것처럼 고귀해 보였으며, 행동 또한 능숙했다. 만약 어색하게 행동했더라도 귀족들은 예외적인 관용을 베풀어 이해심을 발휘했을 거다.
원작에서 묘사한 그대로였다. 태생부터 고귀하고, 평생을 오만하게 살 자격이 주어진 아름다운 동화 속 왕자님.
지금의 그는 ‘블렛’이었다. 원작에서 이름 한 번 서술된 적 없고, 오로지 성씨 ‘블렛’으로만 지칭되었던 남자. 훗날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동급생 넷을 죽일 아본리아 제국의 황태자이자, 원작의…….
“…….”
천천히 내려오는 연회의 주인공과 눈이 마주쳤다. 제네비브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어째서일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저 남자가 누군지 추측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펜싱 우승한—.”
“아, 우드빌을 이겼던?”
속닥속닥. 대화는 당연하게 에드워드를 주제로 하여금 다시 피어난다.
“어머, 꾸며 놓으니까 누군지 모르겠네.”
에드워드인 걸 알게 된 블랑카가 작게 감탄했다.
“선배.”
“…….”
에드워드가 연회장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제네비브를 찾았다.
“제네비브 선배!”
아무 생각도 안 났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블렛’의 모습을 한 에드워드가 자신을 부를 때마다 제네비브는 죽음이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일 년 뒤에 있을 학생들의, 에드워드의,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죽을 수많은 사람의 죽음이.
지금의 에드워드가 원작 속 ‘블렛’과 다른 사람인 건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블렛’의 모습을 한 에드워드를 보는 건 전혀 다르게 와닿았다.
태평하게 말하자면 고작 겉모습만 바뀐 것뿐이다. 하지만, 원작을 알기 때문일까. 제네비브는 지금의 에드워드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저,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야, 제네비브……! 어딜 가는 거야?”
당황한 제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국, 제네비브는 연회장을 뛰쳐나왔다.
길고, 높고, 두꺼운 흰색 신전 기둥들이 반복하며 나타난다.
제네비브는 생각 없이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리고, 또 달렸다. 발이 향하는 대로 움직였다.
“하아, 하아…….”
제네비브는 난간에 엎어지듯 멈춰 섰다. 그녀의 발이 이끈 곳은 수사슴 동상 앞이었다.
몸을 조금 숙이자, 물결이 규칙적으로 일렁이는 연못에 얼굴이 비쳤다. 제네비브는 공포에 질린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