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56화
“…….”
겉모습이 달라졌을 뿐, 지금까지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그가 훗날 참극을 저지르는 흑막이 되리란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 역시 다가올 모든 걸 바꿀 순 없더라도 훗날, 그에게 세인트 존 칼리지가 나쁜 기억으로만 남지 않게끔 백방으로 노력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아까 본 그는 ‘블렛’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에드워드가 맞다.
하지만…….
‘……막상 보니까, 무서운 걸 어떡해.’
제네비브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에드워드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나아가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다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원작의 주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생아인 에드워드가 황태자가 될 수 있었던 계기. 다시 말해, 아본리아 귀족 절반 이상이 죽어 버린 사건. 그리고 그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바뀌기까지…….
단순히 에드워드의 학창 시절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 타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게 실감됐다.
‘내가 그걸 다 어떻게 막아.’
벅찼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였다.
거대한 파도를 작디작은 방파제로 막겠다는 비현실적인 생각이었다. 원작에서 언급 한번 된 적 없던 내가, 대체 무슨 수로?
제네비브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바람은 시원했고, 밤하늘은 마이언에 온 첫날과 똑같이 별들이 촘촘히 박혀 반짝였다.
순간 치민 공포심에 뛰쳐나오긴 했지만, 언제까지 자리를 비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제네비브는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 마음을 진정하고서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겨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제네비브!”
“저기에 있어!”
반대편 복도에서 친구들이 보였다. 제네비브를 발견한 블랑카를 선두로 그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진저! 괜찮은 거야? 왜 갑자기 나갔어?”
블랑카가 물었다.
“난 괜찮아.”
나는 괜찮아. 하지만 ‘괜찮다’를 서너 번 반복하는 모습은 말의 신뢰도를 떨어트릴 뿐이었다.
“뭐가 괜찮아.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유령이라도 봤어?”
“쉬는 게 낫겠어. 내일 돌아가는데 몸 관리해야지. 진저, 방으로…….”
“그래. 지금 무슨 연회야. 잘 둘러댈 테니까…….”
사방에서 그녀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식힌 머리가 더 무거워지는 기분이다.
“괜찮다고!”
결국,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가 나왔다.
그간 언성을 높인 적이 거의 없던 제네비브다. 그래서일까, 처음으로 그녀가 소리 지르는 걸 본 제임스와 블랑카는 흠칫 놀랐고 오웬은 제네비브의 눈치를 봤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근데, 나 정말 괜찮아! 코르셋이 너무 조여서 잠깐 공기를 쐬러 나갔던 거야……. 응, 코르셋이 문제였지.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들어가자.”
본인조차 소리 지를 줄 몰랐기에 제네비브는 당황하며 말했다.
“네가 괜찮다고 하니까……. 그래도, 무리하지 마.”
“이해해 줘서 고마워.”
제네비브는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힘들다고 해서 도와주려는 사람에게 화를 내선 안 되는 노릇이다.
‘에드워드가 안 와서 다행이다.’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생각도 안 했다. 만약 친구들이 아닌 에드워드가 자신을 찾으러 왔다면 다시 도망쳤을 거다.
제네비브는 오웬의 부축을 받으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블랑카가 얼음 조각이 담긴 유리잔을 가져와 제네비브에게 건넸다. 차가운 걸 물고 있으니 조금 진정이 되었다.
“…….”
방금 전까지 저를 찾던 에드워드는 가르시아가 남매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연갈색 눈은 곧바로 제게 닿은 시선을 잡아냈다. 불필요한 움직임 없이 그는 곧바로 제네비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다가오진 않았다.
제네비브는 얼음을 오독오독 씹다가 오웬을 따라 무알콜 샴페인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기억과 맛은 비슷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나마 얘가 귀부 와인과 맛이 비슷하다는데.”
그래 봤자 포도 주스지만. 오웬이 불만스레 투덜댔다.
“……뭐야?”
제네비브가 손안에 유리잔을 굴리며 여러 감정을 곱씹고 있을 때, 흰색 장갑이 시야 안으로 쑥 들어왔다.
“네가 내 파트너라는 걸 잊지 말아 줘.”
제임스였다.
“벌써?”
제네비브는 놀란 듯 말했다.
그의 말대로 플로어에는 쌍을 이룬 학생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제네비브는 옅게 미소를 짓곤 제임스의 손을 맞잡았다.
제임스가 그 손을 가볍게 그러잡으며 말했다.
“이거 영광인걸. 내 파트너가 되기 싫어서 도망간 줄 알았어.”
농담을 들은 제네비브는 가볍게 웃었다.
“칼리지 왕자님과 춤추는 영광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되지.”
“그렇다면 사과해야겠는데. 칼리지 왕자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제임스가 연회장 한쪽을 눈짓하며 말했다.
석 달 전. 아니, 세 시간 전만 해도 제임스에게 향했던 관심은 전부 에드워드에게 쏠렸다. 파트너를 에스코트하며 플로어 안으로 들어오는 에드워드는 모두의 시선을 독차지하기 충분했다.
처음 보는 훤칠하고 준수한 외모의 남자는 모두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오늘 밤, 에드워드의 출신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이 밤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니.
“에드워드랑 싸우기라도 했어? 표정이 안 좋네.”
“싸우다니……. 아니야.”
그 말에 제네비브는 표정을 고쳤다.
에드워드와 거리가 있었다면 입매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등 바로 뒤에 그가 있었다. 거의 등을 맞대고 있는 상태나 다름없다. 신경이 전부 그쪽으로 향한다.
감미로운 현악기 소리를 필두로 음악이 시작됐다.
제임스가 인사하는 것과 비슷한 찰나에 등 뒤에서 에드워드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제네비브는 고개를 살짝 젓곤, 파트너에게 집중하며 다음 박자에 인사했다.
느린 곡이라 다행이었고, 질리도록 춘 춤이라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승자들의 춤>은 정석적인 다른 연회 첫 춤과 다르게 파트너가 안 바뀌어서 다행이었다.
몸에 밴 안무는 정신을 반 정도 놓아도 발이 알아서 움직였고,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손이 먼저 뻗어졌다. 물결처럼 이어지는 스탭은 반복되어 플로어를 가로질렀다.
에드워드를 볼 수 있는 구도가 되었을 때, 제네비브는 그를 힐끗 쳐다봤다.
“…….”
“…….”
그러자마자 언제부터 저를 보고 있던 건지 모를 연갈색 눈과 시선이 얽혔다.
제네비브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제임스를 바라봤다.
“너, 오늘 진짜 이상해.”
제임스가 자연스럽게 제네비브와 위치를 바꾸고는 그녀의 시선이 머물렀던 곳을 봤다.
“에드워드가 신경 쓰여?”
그 질문의 의중을 파악하기란 어려웠다.
“……모르겠어.”
제네비브는 토해 내듯 대답했다.
“쟨 네가 신경 쓰이는 모양인데.”
“하하…….”
그게 문제였다. 어색한 웃음을 흘린 제네비브는 제임스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손에 힘을 안 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윽고 음악은 끝이 났다. 마무리 인사를 하고, 남학생은 여학생을 에스코트하며 플로어에서 벗어났다.
제네비브는 곧장 음료 코너로 향했다. 오웬이 이미 제 잔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차가운 샴페인을 들이켜니 살 것 같았다.
샴페인을 몇 모금 나눠 마시던 제네비브는 연회장 반대편에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관심이 전부 에드워드 쪽으로 간 덕분에 제임스는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에드워드에겐 미안하지만……. 당분간 거리를 두고 싶긴 해.’
지금만큼은 에드워드를 평소처럼 대할 자신이 없었다. 제네비브는 칼리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를 어떻게 대할지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나 말고 다른 사람들과 보냈으면…….’
저 모습에 익숙해지는 데까지만이라도. 아니, 자신이 아는 에드워드를 떠올리고 그를 익숙하게 대할 수 있게 되기까지만이라도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 덕분에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편하게 관찰했는데, 그는 제게 몰리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주변인에게 양해를 구한 에드워드는 인파에서 빠져나왔다. 에드워드는 (놀랍지 않게도) 제네비브를 향해 걸어왔다.
“제네비브 선배.”
“…….”
제네비브가 예상한 대로, 그리고 언제나 그래 온 대로 에드워드는 그녀를 불렀다.
“저와 함께 춤을 춰 주시겠어요?”
며칠 전에 했던 것과 똑같이,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래.”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제네비브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내밀었다.
에드워드의 손은 따뜻했다. 그는 차갑게 식은 제네비브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그녀를 중앙 플로어로 이끌었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에드워드에게 맞춰 제네비브는 무릎을 살짝 구부려 인사했다.
에드워드는 초반 동작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서로의 손을 맞대며 동그랗게 몇 바퀴를 돌고, 한 걸음 멀어졌다 두 걸음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오늘…… 아름다우세요.”
그 말을 한 에드워드의 귓가는 붉어져 있었다. 만약 몇 시간 전이었다면 제네비브는 가벼운 농담을 건네,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
제네비브는 대답하는 대신 에드워드를 쳐다보았다. 머릿속에 다시금 온갖 상념이 가득 들어찼다.
학생들을 제 손으로 죽였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기분이 좋다는 듯 미소를 지었을까? 아니면, 본인이 저지른 끔찍한 짓을 후회하며 울부짖었을까.
당시 그가 겪었을 감정을 알 길은 없다. 다만 확실한 건, 훗날 에드워드는 지금 저와 맞잡은 이 손으로 학생들을 죽이리라는 것이다.
용기 내어 건넨 칭찬에 그녀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조금 당황한 듯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무, 물론 평소에 안 그렇다는 뜻이 아니에요. 근데, 더 예쁘셔서…….”
그가 횡설수설 말을 잇고 나서야 제네비브는 정신을 차렸다.
“……너도 오늘 멋져.”
틀에 박힌 답이었다. 쓰게 미소를 지은 제네비브와 대비되게, 에드워드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후작부인께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음, 선배도 아실지 모르겠는데, 달링 부인이 폴로 경기 이후로 여러모로 많이 챙겨 주셨거든요.”
이로써 하루아침에 달라진 그의 옷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자신이 만들어 낸 샤프롱 관계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 제네비브는 모친이 짧은 시간 안에 에드워드의 치수에 맞는 남성복을 어떻게 구했는지 궁금하면서도, 원작과 유사한 모습의 에드워드를 일찍 불러온 게 자신이라고 생각하자 어떤 반응을 내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건 처음이라……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는데…….”
에드워드는 잠깐 말을 멈췄다.
“선배 마음에 들었으면, 전 그걸로 좋아요.”
그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잘 어울려.”
지금만큼은 자신이 한 칭찬을 들은 에드워드의 표정이 보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소설에서 묘사한 학생들의 죽음이 떠오른 탓이다.
몸에 돌을 묶어 칼리지 연못에 빠트리는 건 자비로운 처사였다. 에드워드는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미수로 끝난 마지막 생존자 학생이 겪었던 일을 읽었을 때 느낀 잔인함이 지금까지 뇌리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