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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57화 (57/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57화

다행히 이어지는 동작은 에드워드에게서 조금 떨어져 몇 바퀴 돌아야 했다.

현악기 소리는 더 풍성해졌다. 아래에 깔린 묵직한 첼로와 점점 빠르게 연주되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자니 심장이 답답해진다.

“선배가 아니었다면 이런 경험도 못 했을 거예요.”

“…….”

“펜싱, 권유해 줘서 고마워요. 또, 결선 때 창고에서 꺼내 주신 것도요. 그땐 정신없어서 이제야 말하네요. 감사합니다.”

에드워드는 대회 기간 동안 고마웠던 점들을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뭘.”

지금 제네비브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짧은 답뿐이었다.

며칠 전, 에드워드가 발을 밟은 파트에 다다랐다. 제네비브는 발을 밟힐 각오와 함께 스탭을 이어 갔다. 하지만, 각오했던 무게감은 안 느껴졌다.

에드워드가 제네비브를 당겼다. 한순간 그와 거리가 좁혀지자 제네비브는 다시 숨이 막히는 답답함을 느꼈다.

“이제 실수 안 해요.”

뿌듯한 기색이 있는 게,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았다.

“연습, 많이 했네.”

“잘 보이고 싶어서요.”

제네비브가 무어라 더 대답하기도 전에 에드워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음 동작을 이어 갔다.

커다란 손 두 개가 제네비브의 허리를 잡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겹겹이 쌓인 치마는 그 움직임에 따라 꽃처럼 허공에 살랑거렸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에 연회장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둘러보니 플로어에서 춤을 추는 사람은 저와 에드워드뿐이다. 모두가 에드워드를, 제네비브를 바라보았다.

“…….”

제네비브는 음악이 끝나기를 이때보다 더 바란 적이 없었다. 새하얘지려는 머리를 간신히 멈추고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상상은 점점 최악의 방향으로 치닫는다. 이미 제네비브의 머릿속에선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죽은 외국 귀족들로 인해 나라 간 전쟁까지 일어났다.

이 상황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르며 제네비브는 마지막 동작까지 무사히 끝마쳤다.

‘드디어 끝났다.’

에드워드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에 보답하듯 제네비브가 컷시를 하려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괜찮아요?”

에드워드가 휘청거리는 제네비브의 손을 붙잡았다.

“으응, 고마워.”

그가 아니었다면 모두가 보는 연회장 한가운데서 넘어질 뻔했다.

‘……아.’

하지만, 생각은 다시금 최악으로 치닫았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에게 붙잡힌 제 손을 바라보았다. 이 손에 죽어 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선배.”

다소 긴장한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정말 미안한데, 내가 속이 안 좋아서 말이야.”

목소리가 딱딱하게 나올까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그럭저럭 친절한 어조가 나왔다. 속이 안 좋은 걸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 속이 안 좋았으므로.

“괜찮아요? 저 때문에 괜히…….”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

제네비브는 애써 미소를 지어 줬다.

“부축해 드릴까요?”

“네 시간을 내가 어떻게 뺏어! 그럴 필요 없어. 연회, 즐겁게 보내.”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붙잡기 전에 재빨리 멀어졌다.

* * *

인파 사이로 사라진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에드워드는 방금까지 제네비브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엔 하늘색으로 물든 장미가 있었다. 금색 머리카락을 솜씨 좋게 장식하던 장미였다.

에드워드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몸을 숙여 몰래 꽃을 주웠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바닥에 무엇이 있던 크게 개의치 않았다. 도둑질을 한 양 심장이 두근거렸다.

꽃이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주머니에 넣은 에드워드는 이를 핑계 삼아 제네비브를 따라가고 싶었다.

「학생 대표들은 솔잎 브로치를 발표할 때까지 떠나면 안 돼요.」

하지만, 제 앞을 가로막은 훌리에타의 의지는 확고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파트너와 한 번 춤을 추고, 제게 춤을 신청해 주길 바라는 여학생들의 시선을 모르쇠 했다.

제네비브는 어디에 있을까?

몸은 괜찮을까?

에드워드의 관심사는 오로지 제네비브의 안위였다.

‘내가 잘못했나?’

이제 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네비브는 들어오는 저를 보자마자 연회장을 나갔다. 잠깐의 외출이 아닌 돌발 행동이었는지, 그녀의 친구들은 당황하며 제네비브를 찾으러 떠났다.

‘내가 선배를 불러서 창피했던 건가?’

원인을 본인에게서 찾는 행위는 에드워드를 좀먹었다.

그렇게 에드워드는 처음 참석하는 연회에서 절반 이상의 시간을 고뇌하는 데 썼다. 훌리에타는 다시 한 번 에드워드와 춤을 추고 싶었지만, 그가 다가오는 여학생들을 밀어내는 바람에 두 번 춤춘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에드워드는 불만스럽다는 듯 입을 삐쭉 내밀며 제 친구들에게 향하는 훌리에타를 이해하지 못하며 연회장에서 제네비브를 찾았다.

플로어에서 매번 새로운 여학생과 춤을 추고 그때마다 인상이 초췌해지는 제임스나, 휴식 공간에서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는 오웬과 블랑카는 보여도 제네비브는 안 보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즈음, 악단의 연주가 끊겼다. 그리고 중앙 계단엔 다섯 명의 파인트리 서클 교장과 초면인 중·노년의 사람들이 있었다.

「기나긴 일주일간의 여정이 오늘로 마무리됩니다.」

자신을 파인트리 서클 이사회 의장이라 소개한 남자가 중후한 목소리로 장황한 축사를 시작했다.

공용어로 진행되는 축사는 형식적이고 진부했다. 고생했다, 행사를 통해 많은 걸 배웠길 바라고, 좋은 인연을 만들었길 바란다. 학생들이 대륙의 미래다, 등등. 축사에 들어갈 법한 말들만 골라서 이야기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훌리에타는 연회 첫날처럼 에드워드가 공용어로 설명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훌리에타가 조용히 건네는 신호를 읽을 수 있는 만큼 제 파트너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역량을 보여 줬을 테지만, 이 중에서도 최고의 경기를 보여 준 학생들이 있습니다.」

의장이 옆을 봤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들고 있던 상자를 열었다.

가느다란 솔잎 모양으로 섬세하게 세공된 브로치 세 개가 있었다. 각기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브로치는 색상만 다를 뿐, 셋 모두 동일하게 생겼다. 샹들리에 빛을 받아 브로치가 반짝였다.

「솔잎 브로치예요!」

훌리에타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오라버니들이 많이 갖고 와서 눈에 익어요. 가장 뛰어난 학생 대표에게만 주는 건데, 금색 브로치가 가장 받기 어렵대요. 오라버니들도 많이 받으셨지만, 금색은 한 번만 받았어요.」

훌리에타가 제 형제들이 갖고온 브로치에 대해 열심히 재잘거리는 사이, 의장이 처음으로 청동 브로치를 받을 사람의 경기 실적에 대해 설명했다.

「—본선부터 결선까지 10점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학생은 프레스반 아카데미의 리네아 본 브리크트.」

예상했다는 듯 청동 브로치와 어울리는 청색 드레스를 입은 여학생이 앞으로 나왔다. 가볍게 인사한 그녀에게 이사회 고위직처럼 보이는 사람이 가슴 부근에 브로치를 달아 줬다.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워드도 주변을 따라 손뼉을 쳤다.

이 엄청난 경기 내용이 고작 세 번째로 잘한 성적이고, 이걸 뛰어넘을 경기 기록을 낸 사람이 있다는 건가?

학생들 사이에선 누가 브로치를 받을지 가늠하고 있었다. 제임스는 벌써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역시 동의했다. 비록 경기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파인트리 서클 행사에서 트로피를 세 번 받은 사람은 제임스가 유일했다.

「—이렇듯 이 학생은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여 단체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고, 개인전에선 무려 새로운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하였습니다. 세인트 존 칼리지의 헨리 제임스 카터.」

아까보다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웬이 제임스의 어깨를 두들겼고, 블랑카는 당연한 결과라는 듯 손뼉 쳤다.

“…….”

제임스에게 브로치를 달아 준 건 새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아는 얼굴이었다.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은색 브로치를 달아 준 앙상한 손가락이 다시 지팡이에 가지런하게 모아졌다.

‘왜.’

왜, 밀포드 씨가 저기에 있는가.

에드워드를 발견한 그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금색 브로치는 누가 받을까요?」

훌리에타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 글쎄요. 가르시아 씨는 누가 받을 것 같나요.」

밀포드 씨에게 시선을 둔 채, 에드워드는 간신히 대꾸했다.

「전 당신이요!」

훌리에타가 어린아이처럼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받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브로치를 주는 사람이 밀포드 씨인 이상, 그와 가까워지는 건 어떤 연유에서든 사양이었다.

그때, 이사회 의장이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파인트리 역사상 처음으로 예선부터 결선까지 무패를 기록하였습니다.」

예선부터 결선까지 무패.

이는 토너먼트로 진행되는 종목의 우승을 의미하기도 하고, 경기에서 한 세트, 한 라운드도 지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로지 최고의 실적을 보인 학생에게만 주는 솔잎 브로치인 만큼 후자를 의미했다. 그리고 에드워드가 알고 있는 한, 이를 이뤄 낸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이 전무후무한 기록을 이뤄 낸 건, 펜싱 플뢰레—세인트 존 칼리지의 에드워드.」

‘세인트 존 칼리지의 에드워드’가 호명되자마자 틀에 박힌 박수 소리가 나왔다.

솔잎 모양 브로치, 그것도 금색 브로치를 받는 건 전 종목 우승이나 다름없다. 얼떨떨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었다.

밀포드 씨와 가까워질수록 에드워드는 습관적으로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몸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가슴은 항상 당당하게 펴야 해. 고개는 들고, 배는 힘주고, 어깨는 내리고. 음…… 너는 자세가 좋아서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겠다.’

그때, 제네비브의 말이 떠올렸다.

‘긴장하지 말자.’

에드워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가까이 걸어갔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밀포드 씨를 알고 있는 티를 내는 건 자살행위다.

“…….”

모르는 사람인 체하며 에드워드는 밀포드 씨 앞에 섰다. 떠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꾹 쥐었다. 정말로,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쥐었다.

뼈만 남은 손가락이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그의 왼쪽 가슴에 브로치를 달았다.

“에드워드 학생, 축하합니다.”

여느 학생들에게 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그 안엔 숨길 수 없는 화가 담겼다.

“정말, 정말 잘되었습니다.”

밀포드 씨의 얇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미소 지은 입과 다르게 목소리는 건조했고, 눈은 메말랐다.

“제 말이 말 같지 않으시죠?”

“…….”

그가 에드워드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보호도 오늘까지입니다.”

한순간의 반항이 어떤 참극을 불러올지, 그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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