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60화 (60/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60화

일주일 동안 비었던 세인트 존 칼리지는 학교만의 방식으로 학생들을 반겼다.

여기서 말하는 세인트 존 칼리지의 방식이란 밀린 수업과 과제, 그리고 시험을 의미했다. 교수들은 ‘진도가 느리다’며 행사의 여운을 곱씹는 대신, 교재를 꺼내라고 했다.

“모두 정숙합시다. 아직 마이언에 있는 것 같지만, 여러분은 지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있어요.”

정치 철학 교수이자 3학년 지도 교수인 브라이언 교수가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하지만 학생 대다수는 졸업하지 못하더라도 가문의 재산으로 먹고살 수 있었기에 브라이언 교수의 말은 그리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다.

제네비브만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공감할 뿐이었다.

‘드디어 졸업이다.’

제네비브는 그동안 오직 졸업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산점은 입학 이후 제출한 모든 과제와 쪽지 시험, 중간·기말고사, 교수들이 학기 말마다 평가하는 수업 태도와 클럽 활동 등을 종합해서 냅니다. 호명하는 대로 나와서 가산점 용지를 받으세요.”

한 달 조금 안 남은 졸업 시험을 준비하는 첫 번째 단계는 바로 ‘가산점 확인하기’였다.

세인트 존 칼리지의 졸업 시험은 ‘얼굴만 비춰도 합격이다’라는 말은 반 정도 맞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장이 빠졌는데, 바로 ‘학교생활을 알차게 보내야만’이다. 마지막 졸업 시험은 전부 찍고 시험장을 나와도 졸업이 가능했다.

물론, 세인트 존 칼리지의 모든 시험은 주관식과 서술형 에세이로 진행되었기에 어느 정도 과장이 들어간 말이다.

“가산점은 220점까지 받을 수 있는 건 아시죠? 가산점을 120점 이하로 받은 학생은…… 부디 졸업 시험 때 노력해 주시길 바랍니다. 관련하여 궁금한 점은 저를 포함한 교수진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더불어 학년 평균 가산점은 140점이고, 용지를 배부하는 동안 저를 부르는 행위는 자제해 주세요. 그럼, 에이브 한센 학생.”

가산점을 기다리는 건 고문 같았다. 시간 날 때마다 직접 계산해 보긴 했지만, 교수들의 태도 평가에서 작은 차이가 존재했다.

“와! 161점이야!”

“망했다…….”

가산점을 확인한 학생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블랑카 라 투르 보아르네.”

네 사람 중 가장 먼저 가산점을 확인하게 된 사람은 블랑카였다.

“175점? 잘 받았네.”

“이게 다 <더 칼리지> 덕분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수업 때 집중할 걸 그랬어……. 헤더스 교수님도 많이 깎으셨네. 그래도 통치학 점수, 이걸로 복구할 수 있겠다!”

가산점을 확인한 블랑카가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제네비브 달링, 헨리 제임스 카터.”

브라이언 교수의 호명에 제네비브와 제임스가 일어섰다.

제네비브의 앞자리에 앉은 제임스가 먼저 브라이언 교수 앞으로 가게 되는 건 당연했지만, 교수의 예민한 성향을 알고 있는 둘은 순서를 바꿔 용지를 받았다.

“두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지금껏 별다른 첨언을 하지 않던 브라이언 교수가 대뜸 그리 말했다.

제네비브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았다.

“…….”

“나는 200점이야. 나쁘지 않네. 너는 왜 아무 말도 없어. 생각보다 잘 안 나왔어?”

제임스가 제네비브에게 물었다.

“……아니, 217점이야.”

가산점을 200점 이상 받는 게 목표긴 했지만,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점수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톰슨이 준 징계로 인해 기존 점수에서 2점이 깎인 걸 생각하면 만점에 가까운 점수였다.

“나 217점이야! 어떡해!”

제네비브는 제임스의 어깨를 흔들며 기쁨을 표출했다. 점수에 한두 점 오류가 있더라도 괜찮다고 넘길 자신이 있었다. 예측한 210점보다 높은 점수였다.

가산점을 확인한 학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펜을 꺼내 계산을 했다. 학교가 놓친 실적이나 잘못 계산한 게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제네비브도 분위기에 휩쓸려 계산을 했다.

하지만, 철저한 세인트 존 칼리지는 사소한 실수 하나 만들지 않았다.

“하긴, 너희 둘은 열심히 했으니까.”

휴게실에서 자리를 잡은 넷은 서로의 가산점 용지를 보며 소감을 주고받았다.

“그럼 제임스는 300점만 채우면 되는 거고…… 넌 서술형 에세이 안 써도 통과겠네~ 이러다가 네가 졸업 연설하는 거 아니야?”

네 명 중 가장 마지막에 가산점 용지를 받은 오웬이 말했다. 평균보다 조금 높은 142점을 받은 오웬은 누구보다 제 성적에 만족하고 있었다.

“졸업 연설은 나 말고 해리슨이 하겠지.”

제네비브가 휴게실 반대편에서 자신이 받은 가산점을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해리슨을 보며 말을 이었다.

“시험 전략은 어떻게 할 거야?”

“뭐든 무난하게 C 정도 받아 오면 되는 거 아니겠어? 버릴 과목은 경제와 정치 철학이야.

“점수 복구해 줄 과목을 생각해야지, 벌써부터 버릴 과목을 생각하면 어떡해?”

제네비브는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너, 역사 잘하잖아. 못해도 A-는 받을 것 같은데. 그리고, 문학은 워낙 쉽게 나오니까…….”

오웬의 시험 전략은 자연스레 제임스의 몫이 되었다.

“문학도 만만치 않대. 엘레노어 선배가 그랬는데, 베일리 교수님 시험이 오데인 교수님 다음으로 어려웠다더라. 근데, 이제 오데인 교수님은 떠나셨으니까…….”

“……베일리 교수님 시험이 가장 어렵겠네.”

테이블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언제나 온화한 인상이던 베일리 교수의 이미지가 빠르게 악마화가 되었다.

“그래도! 엘레노어 선배가 이번 주중으로 족보 보내 준다고 했어. 오면 같이 보자.”

오웬은 블랑카가 아직도 <더 칼리지>에서 알게 된 선배와 연락한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한시름 놓은 제네비브는 달링 가문에서 보낸 서류를 읽었다. ‘무학력자는 가문의 수장이 될 자격이 주어지지 아니한다’라는 법과 관련 규정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서류였다.

제네비브는 자신을 세인트 존 칼리지까지 오게 만든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그건 뭐야?”

블랑카가 물었다.

“카르디르 왕국법.”

“아~ 맞아. 넌 작위를 물려받지. 달링 후작이 되면 나 먹여 살려 주면 안 돼?”

제네비브는 헛소리를 하는 오웬을 보며 눈을 굴렸다.

“법은 좀 사라졌어?”

“아니, 똑같아.”

제네비브가 알고 싶은 건 법의 폐지 여부가 아닌, 성적 커트라인의 존재 여부였다.

제네비브는 가장 앞장에 있는 요약본을 넘겨 달라진 부분이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카르디르 왕국에서 인정하는 학력’에서 포가츠 아카데미가 지워진 걸 제외하면 변동 사항은 없었다.

“성적 관련 내용은 없어. 다행이야.”

“법이 개정되어도 상관없지 않아? 너야 시험 망칠 인물도 아니잖―.”

“달링.”

하지만 그때, 대뜸 해리슨이 끼어든 탓에 제임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왜?”

“너, 몇 점 받았어?”

해리슨이 물었다.

“217점. 너는?”

“네가 일이 학년 때 차석이었지?”

해리슨은 대답하는 대신, 계속 질문했다.

“으응, 그랬지.”

“무례가 아니면 좀 봐도 될까? 내 성적이 이상한 것 같아서.”

해리슨이 자랑하던 가산점은 215점으로, 제네비브보다 조금 낮았다.

차석인 제네비브가 그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 건지, 아니면 본인이 최고 가산점인 220점을 못 받은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건지 알 길은 없었다.

용지를 꼼꼼하게 읽던 해리슨은 몇 분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역시, 클럽 활동을 해야 했구나. 네가 작년에 폴로에서 우승해서 가산점이 있던 거고. 카터, 너는 솔잎 브로치까지 받았으니 네 점수도 높겠다.”

분석을 끝낸 후, 해리슨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금색 브로치 하나에 가산점이 30점이고, 트로피 하나에 10점인 거 알아? 수석은 30점밖에 안 주는데……. 스포츠는 그저 취미고, 지식은 영원히 가는 건데 왜 공부와 스포츠를 동급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해리슨이 억울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피차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제네비브와 제임스는 그가 하는 말을 흘려 들었다. 해리슨의 성적 집착은 학년 내에서도 워낙 유명했으므로.

해리슨이 화를 돋운 건 다른 사람이었다.

“애초에 학생들이 참여 안 하는 활동 위주로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구석이 추가되는 건데, 학교생활 잘 보낸 얘네 둘한테 할 말은 아니지.”

블랑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제네비브 성적 확인하러 온 것 같은데, 그럼 볼일은 끝난 거지?”

“그래~ 넌 공부도 잘하는데 뭐가 걱정이야~ 네가 수석이 아닌 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 걱정은 집어넣어.”

오웬은 해리슨이 화내기 전에 재빨리 그를 달랬다.

열심히 달래던 오웬의 노력이 가상하게, 해리슨은 블랑카를 한번 흘겨본 후, 혀를 차며 제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해리슨이 저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학기 초에 너 견제하는 것도 짜증 났는데, 이번 건 지나쳤지. 왜 본인이 못한 걸 너희한테 그런 식으로 얘기하냐고.”

블랑카가 불만을 털어놓았다. 저 대신 화를 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던 제네비브는 곧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닫고 휴게실을 나왔다.

제네비브가 도착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아본리아 학교라는 걸 친히 알려 주듯, C구역이나 D구역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카르디르 관련 서적과 다르게 아본리아에 대해 설명하는 책은 A구역부터 있었다.

제네비브는 적당한 자리에 가산점 용지와 책을 올려놓고, 빠르게 블렛 황실과 관련된 서적을 찾아봤다.

A구역에 도달한 제네비브는 아본리아 제국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제목이라면 전부 트롤리에 담아 놓았다.

‘<황실의 연구>, <아본리아 제국의 역사>…… <블렛 황실 족보>.’

밀포드가 황실과 연관이 있다는 가설은 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뭐든 확실하게 알아서 나쁠 건 없었다.

“최근에 나온 책이 낫겠지.”

제네비브는 책장 가장 밑 칸에 있는 두루마리 형식의 양피지 책을 보며 중얼거렸다.

얼마나 오래된 건지 양피지의 색은 노랗게 바래 있었다. 읽기가 번거로울뿐더러 정리도 어려웠다. 프란시스 부인이 구겨진 종이를 보며 저를 혼내는 건 사양이었다.

오후 수업이 없던 덕분에 제네비브는 책을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에드워드는 없구나.’

<블렛 황실의 족보>를 읽으며 정보를 종이에 옮겨 적던 제네비브는 돌연 씁쓸해졌다.

“이반, 랜돌프, 코델리아…….”

황실 초상화는 그야말로 화목한 가족을 정의했다.

초상화 속 세 사람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재 황실에선 황제 부부와 아들 황태자가 있는데, 랜돌프 블렛은 에드워드보다 두 살 어렸다. 깡마른 체구에 주근깨를 가진 소년은 이반 황제의 코를 제외하면 모친과 똑같이 생겼다.

‘랜돌프 블렛의 사망.’

확실하게 아는 정보를 휘갈기며 제네비브는 입안을 씹었다. 직접 본 적 없는 사람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자신이 소름 끼쳤다.

제네비브는 한차례 고개를 젓고, 옆에 선 이반 황제를 봤다.

40대 후반의 황제는 나이가 무색하게 눈가와 입가에 진 주름을 제외하면 굉장한 미남이었다. 무엇보다 검은 머리의 황제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생겼는데…….

“여기서 만나네요.”

“에드워드!”

에드워드.

정확히는 연회에서 치장한 에드워드와 똑같이 생겼다. 제네비브는 부자연스럽게 책을 다른 페이지로 넘겼다.

“……블렛 황실에 대한 책이네요. 과제인가요?”

하지만, 제네비브는 트롤리에 가득 쌓인 책을 몽땅 가릴 정도로 순발력이 좋지 못했다.

“어, 어……. 맞아. 정치학 과제로 아본리아에 대해 써 보려고.”

“……그런가요?”

에드워드는 트롤리를 피해, 제네비브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건 뭐예요?”

에드워드가 그녀 앞에 놓인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가 가리킨 건 랜돌프 황태자가 죽는다는 말이 적힌 종이 뒷면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