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62화
“맞아. 제네비브 달링이 아니라, 달링 부인이었어!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은 사람한테 빌붙고 싶어? 응? 평민이라 그런가, 자존심도 없네.”
제네비브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귀를 의심하던 사이, 에드워드가 먼저 뛰쳐 나왔다.
“닥쳐.”
“에드워드!”
에드워드가 달려들자 찰스는 곧장 바닥에 고꾸라졌다. 둔탁한 소리에 휴게실 안팎에 있던 학생들이 소란이 들려온 곳으로 서서히 몰려들었다.
“한 대 치겠다?”
찰스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에드워드는 떨리는 손으로 찰스의 멱살을 붙잡았다.
“이런, 평민이 귀족을 때리는 경우는 건국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찰스가 부리는 여유엔 근거가 있었다.
분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에드워드가 찰스를 때린다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귀족이 평민을 때리는 건 그 태도에 비난을 받을지언정 처벌은 받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당장은 속이 시원할지 몰라도 비난과 동시에 처벌이 뒤따른다.
이걸 모를 리 없는 에드워드였지만, 도발에 넘어간 그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만들었다.
“때리면 안 돼!”
제네비브는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 전에 에드워드의 어깨를 붙잡았다. 에드워드가 반사적으로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와 마주친 연갈색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 마. 퇴학, 퇴학당할 수도 있어.”
제네비브는 말을 더듬으며 퇴학을 강조했다.
효과가 없진 않았는지 찰스의 멱살을 붙잡은 손에서 힘이 풀렸다. 셔츠에 구겨진 자국이 채 펴지기도 전에 찰스가 에드워드에게 달려들었다.
“짜증 나네? 고작 네까짓 게, 내 멱살을 잡아?”
문장이 짧게 끊길 때마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찰스가 손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에드워드의 얼굴은 찰스가 때리는 대로 움직였다.
“미쳤어? 왜 갑자기 애를 때려!”
“후배에게 아주 관심이 많으시네요. 이 새끼가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설치길래 교육 좀 시키고 있는 건데.”
찰스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다시금 손을 올렸다. 둔탁하게 때리는 소리가 심장을 철렁거리게 만들었다. 에드워드의 목은 힘없이 축 떨어졌다.
“선배, 손에 소중하게 든 건 뭔가요?”
찰스는 에드워드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달링 부인이 제게 보내 주신 연애편지인가요?”
찰스는 한 손으로 에드워드의 멱살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는 제네비브의 손목을 붙잡았다. 커다란 손아귀에 붙들리자 아팠다. 제네비브가 들고 있던 <블렛 황실 족보>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힌 책은 에드워드의 머리맡에 떨어져 한 페이지를 펼쳤다. 하필이면 화목한 황실 가족 초상화가 그려진 장이었다.
이반, 코델리아, 랜돌프.
제네비브는 화목한 가정이 그려진 가족 초상화를 보고, 다시 에드워드를 봤다.
에드워드는 이런 취급을 받을 애가 아닌데.
이런 취급을 받아선 안 되는데.
‘미친 거 같아.’
제네비브는 찰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는 노력 없이 얻은 출신 성분에 눈이 돌아가, 에드워드를 괴롭히는 행위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그만해!”
제네비브는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높게 들어 찰스의 등에 맞췄다.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건 제네비브의 방식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찰스를 말릴 길은 이것밖에 안 보였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찰스가 에드워드를 때리는 걸 멈췄다.
제네비브는 곧장 그에게 쏘아붙였다.
“왜 에드워드를 화풀이 상대로 생각해? 지금 네가 이러는 거, 추잡한 건 알아? 네가 길을 막아서 내가 막지 말라고 얘기한 거잖아. 근데, 왜 갑자기 내 어머니 얘기가 나오고 있지도 존재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떠들어 대? 네가 그렇게 잘났어?”
틀린 말 하나 없었다. 하지만, 맞는 말투성이였기에 찰스를 더욱 자극하는 말이기도 했다.
찰스는 몸을 일으켜 제네비브에게 한 걸음 가까워졌다.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고는 제네비브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을 더 줬다. 마치, 한 대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손까지 올렸다.
“전부터 거슬렸는데…….”
‘아, 한 대 맞겠구나.’
제네비브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된 이상, 제네비브는 그저 빨리 맞고 일을 끝내고 싶었다. 상상만 해도 아프지만, 일이 잘 풀려 찰스가 퇴학당할 수 있다면 오히려 한 대는 싸게 먹히는 일이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그때, 구경꾼 사이에서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손목을 휘어잡은 찰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붉게 자국이 생긴 걸 보니, 한두 시간 뒤에 멍이 질 것 같았다.
“……카터 선배.”
찰스는 ‘선배’를 죽기보다 말하기 싫은 듯 호칭을 반 박자 느리게 붙였다.
제임스가 싸늘한 눈으로 찰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편에서 신나게 셋을 구경하던 학생들은 제임스의 등장으로 점차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제임스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가 알면 재미있어 하시겠어.”
제임스가 콜린스 백작을 언급하자, 찰스는 그제야 동요했다.
말이 계속 안 통할 것 같던 찰스는 더러운 거라도 만진 양 손을 툭툭 털었다. 출신과 폭력만을 내세우는 찰스에게 가장 적절한 대처법이었다.
소동이 흐지부지 끝나자, 학생들은 내심 아쉬운 눈치로 뿔뿔이 흩어졌다. 제네비브는 <블렛 황실 족보>를 줍고서 벽에 기대어 앉은 에드워드를 보았다.
에드워드의 몰골은 엉망진창이었다. 찰스에게 맞은 뺨은 붉게 부었고, 입술은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누구라도 아픔을 호소하고도 남을 일인데, 에드워드는 여러 번 겪은 일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덤덤하게 가방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고, 아픈 소리를 내거나 눈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말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드워드가 제네비브와 제임스에게 말했다.
한 대 더 때려 줄걸, 하는 생각이 든 게 무색할 만큼 담백한 목소리였다. 대화로 상황을 잘 해결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태도였다.
“……병동에 가자.”
제네비브의 말에 에드워드는 별다른 반항 없이 그녀를 따랐다.
병동으로 향하는 내내 에드워드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제네비브와 제임스가 하는 말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콜린스 백작과 아는 사이였어?”
“방학 때 몇 번 만난 게 전부야. 소동을 싫어하시는 성향이셔. 뭐, 조금 늦은 것 같지만…….”
협박이 통한 건 ‘에드워드에 대한 행동이 잘못되어서’가 아닌, ‘외국 귀족에게 위협을 가해서’에 가까웠다.
복도를 걷는 세 사람 모두 해당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제임스는 늦게 온 자신을 탓하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사과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도착한 병동엔 브라운 선생이 있었다. 그는 여러 약초를 배합하고 있었는데, 얻어맞은 에드워드를 보곤 자연스럽게 침대로 안내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굳이 캐묻지 않았다.
“친구랑 그만 싸워라?”
깔끔한 손놀림으로 치료를 끝낸 브라운 선생이 덕담하듯 친절히 말했다. 이후 그는 일이 있다며 쉬고 나오라는 말을 끝으로 병동을 나왔다.
아마 브라운 선생은 에드워드가 친구와 치받고 싸운 줄로 알았을 거다. 비록 치료하러 온 학생은 에드워드뿐이고, 지금 칼리지에서 에드워드에게 동등한 친구 따위 존재하지 않았지만.
에드워드는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제임스가 병동을 나갈 때까지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제네비브 역시 그에게 말을 채근하지 않았다.
‘이게 에드워드의 일상이구나.’
제네비브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가 괴롭힘당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찰스는 거슬려서, 눈에 띄었기 때문에, 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괴롭힘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본 본인조차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데, 에드워드는 어떨지 감히 상상도 안 됐다.
이제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의 반응이 덤덤한 것조차 안쓰러웠다.
얼마나 익숙했으면.
제네비브는 동정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이곳에서 동정이 실질적인 도움까지 가는 경우가 없었으니.
“하아…….”
양쪽 볼에 약을 두껍게 바른 에드워드를 보며 제네비브는 작게 숨을 쉬었다.
에드워드는 조금만 버티면 된다. 랜돌프 황태자는 몇 주 뒤에 죽고, 시기상 에드워드는 7월 즈음에 황태자 책봉을 받는다. 제네비브는 그때까지 옆에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면 되었다.
‘그리고, 랜돌프 황태자가 죽는 이유는…….’
제네비브는 주머니 안에 스치는 종이를 느끼며 원작 내용을 회상했다.
랜돌프 황태자는 여름마다 친한 귀족들과 선상 파티를 즐기는데, 호수에서 돛단배를 띄워 노는 작은 뱃놀이가 아니라 대규모 호화 크루즈로 대양을 가로지르는 바다 여행의 성격을 띠었다.
귀족 입장에서 그 초대장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황실의 초대장은 누구나 바랐고, 또 이틀간 연회에서 그들은 장차 제국을 이끌어 갈 지도자와 든든한 친목을 쌓을 수 있으니.
하지만 바다를 이틀간 짧게 항해하는 선상 파티는 이번 여름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기피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얌전하던 해류가 갑작스러운 기상 이변 때문에 미쳐 날뛸 예정이고, 이로 인해 크루즈에 탄 모두가 죽게 되니까.
제네비브는 이걸 막을 능력도, 생각도 없었다.
크루즈 침몰로 인해 모두 죽는다는 걸 떠들고 다니면 불필요한 의심을 사는 건 당연하다. 괜스레 그런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만약 정말로 막고 싶었다면 제네비브는 세인트 존 칼리지가 아니라, 블렛 황실의 측근이 되는 쪽을 선택했을 거다. 현재로선 크루즈 침몰이 일어나는 게 에드워드가 황태자 지위를 받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으니.
제네비브는 곧장 병동 서랍을 바쁘게 뒤졌다. 약초를 피운 것과 비슷한 알코올 램프를 찾아, 불을 켜고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손안에서 구기고, 주머니 안에서 구르느라 종이는 너덜너덜해졌다. 종이를 살짝 펼친 제네비브는 ‘랜’까지 확인하고는 종이를 불에 붙였다.
‘에드워드만 돕자. 에드워드만.’
에드워드가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면 지금 같은 수모는 더 안 겪어도 된다.
작은 종이쪼가리가 검은 재로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테이블 위에 생긴 잿더미를 정리한 후,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
침대에 꼿꼿하게 앉은 그는 제네비브가 빌린 <블렛 황실 족보>를 읽고 있었다. 정확히는 조금 전 그의 머리맡에 펼쳐졌던 가족 초상화를 보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아?”
제네비브는 의자를 끌어, 에드워드의 침대 부근에 앉았다.
에드워드가 급히 책을 덮곤 대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선배는 치료 안 하세요?”
“나는 왜?”
“다쳤잖아요.”
에드워드가 제네비브의 왼쪽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손목은 이제 점점 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잡은 건지, 벌써부터 징그러운 보라색 반점까지 생겼다.
뒤늦게 제 상처를 확인한 제네비브는 괜찮다는 듯 웃어 봤다.
“금방 사라질 거야.”
“……차가운 거라도 대고 계세요.”
에드워드의 재촉에 못 이긴 제네비브는 차가운 거즈를 꺼내 손목에 붙였다.
그 뒤로 둘은 대화를 그다지 하지 않았다. 제네비브는 조용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머릿속에 정리하며 되새겼다.
침묵을 깬 건 에드워드였다.
“제네비브 선배.”
“왜?”
“클럽 탈퇴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어?”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제네비브의 예상에 없던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