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63화
“탈퇴하게?”
제네비브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졸업할 때까지, 아니, 졸업하기 전에 죽었으니까……. 3학년 때까지 하던 취미 생활 아니었어? 왜 갑자기 그만두려는 거지?’
원작을 안 따르고 있다는 증거에 안도를 느껴야 함에도 제네비브는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펜싱 그만두려고?”
“그만두는 건 아니고…… 클럽 탈퇴만 하려고요. 애초에 가입했던 이유도 마이언 방문을 위해서라…….”
“…….”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에드워드가 원작보다 1년 이르게 펜싱을 시작한 건 제네비브 때문이었다. 황태자였던 원작과 다르게 평민 출신인 그가 지금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방금 직접 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제네비브는 왠지 모르게 그가 계속 펜싱을 계속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공부할 시간도 뺏기고, 음……. 수업 진도 따라가는 것도 점점 힘들어져서요.”
에드워드는 클럽 탈퇴를 결심한 표면적인 이유를 쭉 이야기했다. 하지만 제네비브와 에드워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둘 다 그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네가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하는 거지. 행정실에 가서 직원에게 클럽 탈퇴 서류를 달라고 하면 줄 거야. 양식 채워서 클럽 코치 서명 받고, 감독 사인까지 받은 뒤에 다시 행정실에 제출하면 돼. 클럽 관련 서류는 D로 분류되니까…… 서류 코드가 D로만 끝나는지는 확인해 봐.”
“그렇게 간단히 끝나요?”
“보통은? 근데, 실력이 좋은 선수는 클럽에서 붙잡을 때도 있어서 완강한 태도로 끝까지 밀어붙여야 해.”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보며 말했다.
어떤 정신 나간 지도자가 첫 출전에 솔잎 브로치를 받아 오고, 백 년 만에 우승컵을 갖고 온 학생을 놓칠까.
“수업 진도, 많이 놓쳤어?”
수업이 그저 구색 좋은 핑계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제네비브는 예의상 물었다.
“공용어 수업만 조금 놓쳤어요.”
“내가 2학년 때 쓰던 노트 한번 찾아볼까? 2학년은 <공용어 연구>로 수업하는 거, 맞지?”
제네비브는 작년 공용어 수업 때 이용한 교재를 떠올리며 말했다.
“빌려주신다면 감사하죠.”
“노트 찾으면 바로 줄게. 아, 지금 행정실 가려고?”
제네비브는 침대에서 일어서는 에드워드를 보며 물었다.
“네.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서요.”
에드워드더러 쉬고 있으라고 말하기에 그는 이미 굳건하게 다짐한 상태였다.
* * *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알려 준 그대로 행동했다.
행정실 직원은 볼이 부어오른 에드워드를 보며 놀란 듯 보였지만, 그가 요청한 서류를 정확하게 줬다.
행정실에서 서류를 받은 그는 그 자리에서 서류 번호가 D로 끝나는지 확인한 후, 복도 바닥에 앉아 탈퇴 신청서 양식을 적었다.
[이름: 에드워드 / 소속 학년: 2학년 / 소속 클럽: 펜싱]
에드워드는 여기까지 작성하고 이를 물었다.
‘후배에게 아주 관심이 많으시네요. 이 새끼가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설치길래 교육 좀 시키고 있는 건데.’
제네비브를 함부로 비하하는 찰스에게 에드워드는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못 했다.
찰스에게 대드는 것만으로 퇴학을 각오해야 하는 제 상황이 싫었다. 말 한마디로 찰스를 손쉽게 제압하는 제임스와 다르게 뭘 해도 소용없는 제 위치가 싫었다.
탈퇴 사유로 자주 언급되는 이유가 객관식으로 있을 거라는 에드워드의 예상과 달리, 서류는 본인이 직접 탈퇴 이유를 적어야 했다.
에드워드는 신경질적으로 문장을 휘갈긴 후, 벽에 머리를 기댔다.
[탈퇴 사유: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간결하고 타당한 이유였다.
에드워드의 석차는 전교에서도 상위권에 속했기에 ‘네가 무슨 공부를 하냐’라며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행사도 안 남은 지금, 귀중한 시간을 보기만 해도 피곤한 사람들로 가득한 펜싱 클럽에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생아가 아니었다면.’
사생아더라도 여태 다른 황실 사생아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번듯한 가문에 입적되었더라면 이런 일은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황실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더라도, 눈 가리고 아웅 하듯 제 이름을 방계 귀족 족보 어딘가 즈음에 올리기라도 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고작 탈퇴 신청서의 양식을 채우고, 본인 서명란에 ‘에드워드’라고 적어 놓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니.
‘이런 걸 생각해서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에드워드는 헛된 상상을 하는 자신을 비웃었다.
‘다음 학기부턴 신청 기간 잘 지켜야지.’
가을부터 제네비브를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행사를 잘 참석하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거다. 에드워드는 느린 걸음걸이로 알렌 코치의 사무실 앞까지 걸어갔다.
“그럼, 소개비로 경기 수수료 10퍼센트를…….”
에드워드는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사무실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몸에 밴 습관이라 저도 어쩔 수 없었다.
“메이슨, 10퍼센트라니. 하하! 못 본 사이에 더 뻔뻔해졌구먼. 5퍼센트.”
“8퍼센트. 졸업 전까지 내가 훈련시키는 것도 고려해야지. 일 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그 모든 걸 가르쳐야 하는 나를 생각해.”
두 목소리는 진지하게 협상을 나누고 있었다.
“6퍼센트. 연금이나 다름없어. 이 이상은 나도 어렵다네.”
“……좋아.”
그 뒤로 무의미한 대화가 오갔다.
“에드가? 대체 그런 애는 어디서 찾았나?”
“에드워드야. 그냥 제 발로 들어왔지. 껄껄. 고쳐야 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까, 7퍼센트도 좀 생각해 줘.”
숫자 놀음의 이유를 짐작한 에드워드는 질린다는 듯 문을 노려봤다.
대화가 완전히 끝났음을 확인한 에드워드는 몇 초 뒤에 문을 두들겼다. 안쪽에서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벽에 걸린 상장과 감사패 서너 개 정도가 많아진 걸 제외하면 알렌 코치의 사무실은 전과 비슷했다.
대화 상대는 에드워드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펜싱에서 우승한 뒤, 알렌 코치가 소개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오오! 마침 네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잘 왔다, 잘 왔어. 이분은 협회에서 오신 분이야. 하워드, 얘가 바로 네가 본 에드워드.”
“안녕하세요.”
알렌 코치보다 열 살쯤 많이 보이는 남자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연한 하늘색 눈이 에드워드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치, 고기에 등급을 매기듯이 꼼꼼하게 보는 시선이 불편했다.
“얼굴은 왜 다쳤냐?”
“그게…….”
“음, 팔이나 다리는 안 다쳤네. 천천히 얘기해도 된다. 아무튼 에드워드, 이분이 너를 키우고 싶다고 하셔.”
알렌 코치가 두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그의 말을 보충하듯 하워드가 말을 이었다.
“한 달에 2천 루오르는 금방 벌고, 승 하나에 천 루오르입니다. 5년 정도 시합에 나가기만 해도 수도에 타운하우스 하나쯤 쉽게 장만할 수 있어요. 이렇게 돈 벌 기회, 흔치 않은 것 아시죠?”
하워드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특히 에드워드 군 같은 평민이라면 더.”
하워드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에드워드는 열 장 남짓한 두툼한 계약서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읽을 필요가 뭐 있어! 이 메이슨 알렌이 보증하는 사람이야. 네 경기를 보고, 좋아서 하도 사정하길래 데리고 왔지. 이거 하나면 졸업 뒤에 먹고살 걱정은 넣어 둬도 된다. 몇 년 선수로 구르다 보면, 너도 칼리지 감독이나 나처럼 코치 정도는 될 수 있을 거고.”
알렌 코치가 껄껄 웃으며 계약서를 자연스럽게 마지막 장으로 넘겼다. 이미 계약서 서명란엔 알렌 코치와 하워드의 사인이 있었고, 에드워드만 제 이름을 적으면 됐다.
“용어가 어려울 수도 있으니, 제가 직접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제가 읽어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에드워드는 하워드를 경계했다.
“하하! 꼼꼼하면 좋은 거죠!”
호탕한 웃음과 다르게 하워드는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천천히 읽어 본 계약서는 그야말로 독소 조항으로 가득했다. 좋은 건 극단적으로 부풀려 과장하고, 문제가 될 법한 조항은 교묘하게 우회했다.
하워드가 에드워드를 보자마자 꺼낸 ‘시합’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불법 투기장이었다. 물론, 대놓고 ‘투기장’이라 언급하진 않았지만, ‘판돈’이나 ‘배당금’ 같은 의미심장한 단어들을 조합하면 투기장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됐다.
특히나 문제가 일어날 경우, 그 책임은 오롯이 에드워드의 몫이었다.
세인트 존 칼리지 펜싱 클럽에서 훈련한 비용을 이자까지 포함하여 경기 배당금으로 갚아야 한다는 건 물론이고(산술한 바로는 5년간 수입이 없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그가 자랑스럽게 홍보한 2천 루오르는 수수료를 떼지 않은 값이었다.
“보시면 계약금은 5천 루오르입니다. 평민이 평생 일해도 쉽게 벌 수 없는 거금이지요.”
간사한 혀가 달콤한 제안을 발음했다.
“……이것도 갚아야 하는 빚이군요.”
에드워드는 여상하게 말했다.
“그저 형식상 존재하는 조항입니다. 우리 협회에서 에드워드 씨의 실력 정도라면, 경기 서너 개를 뛴 뒤에 갚을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경기 중에 제가 다친다면요? 보아하니…… 병원비도 제 부담이고, 시합도 불법인 것 같은데.”
그럴듯한 상호명은 있지만, 아마 서류상 존재하는 회사일 거다.
전적으로 하워드에게 유리하고, 알렌 코치는 중간에 소소하게 이득을 보고, 에드워드만 고생하는 구조였다. 떠나기로 결심한 지금, 조금 남은 정도 없앤 펜싱 클럽이 대단할 지경이었다.
“저를 좋게 봐주시는 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십여 분 전까지 열심히 채웠던 클럽 탈퇴 신청서였다. 종이를 받은 알렌 코치는 심드렁한 눈으로 종이를 읽어 내리다가 내용을 파악했는지, 화들짝 놀란 눈치였다.
“저는 펜싱에 제 인생을 그렇게까지 걸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찾아온 이유도 코치님의 사인을 받기 위해서예요.”
에드워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졸업도 안 한 학생에게 이상한 계약서를 내민 알렌 코치는 역겹기 짝이 없지만, 에드워드는 이런 사소한 일에서까지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그저 빨리 알렌 코치의 서명을 받은 뒤,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아하하! 요즘 애들은 패기가 넘쳐 나는구먼!”
종이를 쥔 알렌 코치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보며 하워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속단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편견 없이 본다면, 정말 괜찮은 제안이란 걸 알게 될 겁니다.”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미성년자에게 서명한 계약서는 무용지물일 텐데요.”
에드워드가 말했다.
“계약서 8항을 보면 열여덟 살 생일에 계약 연장을 위해서 당사자의 서명이 필요하다는데, 사실 계약 연장이 아니라 그때부터 계약 시작 아닌가요? 유감스럽지만 저는 몇 년이 지나도 하고 싶지 않을 거 같습니다.”
에드워드는 확고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마음이 바뀌면 메이슨을 통해 이야기하면 되겠습니다.”
하워드는 기분 나쁜 내색 하나 띠지 않은 채,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을 떠났다.
이후, 알렌 코치가 길길이 날뛰었다.
“……내, 내가 뭐 너 나쁘라고 이런 걸 권유하는 거겠어? 전부 너 잘되라고 얘기하는 거라고! 성적 잘 받으면 졸업 뒤에 작위 받고, 떵떵거리면서 살 것 같지? 절대 아니야. 너 같은 애들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것 같아? 지금 귀족들 사이에 있어서, 네가 걔네랑 비슷한 것 같지? 코가 아주 여기까지 올라왔어. 어? 지금 네 눈앞에 일생일대의 기회가 있는데, 대체 안 잡고 뭐 하는 거냐?”
알렌 코치는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출신 좋은 애들이야, 펜싱이 취미일 수 있지! 펜싱 좋아! 얼마나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야? 하지만 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알렌 코치가 하는 말을 반박할 수 없다는 게 가장 억울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너 같은 애한테 펜싱이 취미인 건 사치야! 미래를 생각해야지, 미래를!”
학생 대다수가 에드워드를 달라진 것처럼 대했지만, 어떻게 본다면 그는 여전히 우승 전과 달라진 게 하나 없었다.
에드워드는 귀족 자제의 심기를 거슬러선 안 되었고, 명백하게 상대가 잘못했음에도 반항 없이 맞아야 했다. 그에게 펜싱을 잘하는 건 자랑스레 내세울 수 있는 취미가 아니라 살아남을 방도였고, 제시된 길은 불법이었다.
앞으로도 자신은 계속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서명 안 한다. 아니, 못해! 내일 훈련 나오는 걸로 알고 있겠어.”
알렌 코치는 에드워드가 건넨 탈퇴 신청서를 구겨 바닥에 집어 던졌다. 에드워드는 찌그러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서명은 안 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래!”
알렌 코치가 소리를 빽 질렀다.
“하지만, 앞으로 제가 클럽 활동을 참여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에드워드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쯔쯧, 독한 놈…….”
그가 사무실을 나올 때, 뒤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알렌 코치의 말소리가 들렸다.
마음 같아선 그가 투기장 싸움을 권했다고 고발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문서상 아무 문제가 없는 계약서였기에 에드워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내 몸 하나 제대로 못 지키는데.’
도대체 누구를 지키겠다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