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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64화 (64/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64화

에드워드는 제 처지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처럼 자신의 위치를 뼈저리게 실감한 적도 없었다.

다른 학생들이 졸업한 뒤에도 큰 변화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에드워드의 인생 역시 큰 반전은 없을 것이다. 작위와 성공은 그와 먼 이야기이기에 어쩌면 그에게 있어 최고의, 최선의 수입원은 투기장에 흐르는 판돈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가문을 물려받을 제네비브, 그리고 투기장에서 귀족들의 유흥거리가 되는 에드워드.

또한, 그가 설령 싸움질을 하지 않더라도 졸업 이후에는 지금보다 더 제네비브에게 민폐인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애초에 지금 에드워드가 귀족과 접점이 있는 것도 세인트 존 칼리지라는 환경 덕분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에드워드는 평생 귀족과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말을 섞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거다.

‘힘을 얻어야 해.’

무능함은 권력의 부재에서 나타난다.

황실의 일원이 되는 배부른 상상은 꿈도 꾸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그저 제 몸 하나 간수할 수 있고, 이곳에서만큼은 다른 학생들과 대등한 입장으로 관계를 맺고, 이어 가고 싶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켜야 하는 상대보단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른 학생과 싸우더라도 동급생끼리의 다툼으로 끝내고, 찰스 콜린스를 상대할 때마다 퇴학을 걱정하지 않았으면 했다.

아직 이룬 건 하나 없는데, 벌써 원하는 것만 늘어나는 제 모습이 웃겼다.

“…….”

머릿속에 떠오른 가장 빠른 방법은 밀포드 씨를 이용하는 거였다.

그는 에드워드의 법적 후견인이고 (비록 대우가 저택 하인보다 못하지만),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재력가였다. 권력엔 금화가 따른다. 에드워드는 전 대륙에서 유명한 거부와 어떻게든 아는 사이였다.

에드워드는 밀포드 씨에게 도움을 부탁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밀포드 씨가 비웃는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럴 줄 알았다며, 이게 결국 칼리지에 가지 말라는 제 말을 무시해서 겪게 된 일이라는 날 선 말들이 그려진다.

설령 그 반응을 감안하더라도 어떻게 서두를 열고, 어떤 식으로 요구를 구체화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밀포드 씨가 도와줄 거라는 확신이라도 있었다면 에드워드는 그의 타박을 몇 번이고 들었겠지만, 밀포드 씨에 대한 기대감은 언제나 그렇듯 없었다.

밀포드 저택 주소를 쓰던 에드워드는 자괴감에 펜을 내려놓았다. 1초 전까지만 해도 편지였던 종이는 그의 손에 갈가리 찢겨, 한낱 종잇조각이 되어 버려졌다.

에드워드는 하루가 지나서야 자기 비관에서 한 발 멀어졌다. 그러곤 늘 하던 것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감독님께 말해야 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뒤에 내린 결론이었다.

알렌 코치에게 클럽 탈퇴 의사는 충분히 전했지만, 그가 내보인 반응을 보아 스미스 감독에게 제대로 전할 거라는 믿음이 없다. 더불어 알렌 코치가 어떤 내용을 생략할지 쉬이 짐작이 갔다.

에드워드는 본인이 직접 스미스 감독에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확실하게 해서 손해 볼 건 없다.

“…….”

다시금 행정실에 방문한 에드워드는 문이 잠긴 걸 보고서야 오늘이 주말인 걸 깨달았다.

여름 대회가 끝난 지금, 휴일에 스미스 감독이 칼리지에 있을 리 없었다. 에드워드는 큰 수확 없이 기숙사 건물로 돌아갔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주말답게 휴게실 안은 3학년 학생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보드게임을 즐기거나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던 이전과 달리, 공기가 다소 침착했다.

모두 옆구리에 책을 낀 채 공부하고 있었고, 두런거리며 학업적인 말을 나눴다. 복도에서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던 일이 학년생들은 휴게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치껏 말소리를 줄였다.

제네비브도 공부하는 학생 중 하나였다.

테이블엔 여러 책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 중얼거리며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방해하지 말자.’

하지만 에드워드와 다른 생각을 가졌는지, 제네비브가 고개를 들다 그를 발견하곤 오라는 듯 손짓했다. 제네비브가 제 옆자리를 가볍게 치며 그가 앉기를 권유했다.

“얼굴은 좀 어때? 탈퇴는 잘했어?”

제네비브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 말처럼 탈퇴가 어렵네요.”

에드워드는 짧게 속삭였다.

그는 구태여 알렌 코치와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 제 구차한 처지만 더 생각날 것 같았다. 비록 제네비브가 제 형편을 알고 있다 한들, 클럽 코치에게서까지 그런 취급을 받는 건 모르길 바랐다.

어제 일을 생각하자 속이 다시 뒤틀렸다. 다행히 얼굴에선 티가 안 났는지, 제네비브는 짧게 수긍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에드워드가 말을 덧붙였다.

“탈퇴는 못 했지만, 연습은 안 나가려고요.”

“그래! 그쪽에 네 의사를 전했으면 괜찮을 거야. 나오는 것까지 강제할 수는 없으니까. 고생했어.”

제네비브가 격려하듯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공부하고 있었어요?”

에드워드는 그녀가 든 책을 보며 자연스럽게 주제를 바꿨다. 클럽 관련으로 더 말했다간 실수로 알렌 코치의 일을 꺼낼 것 같았다.

“응, 졸업 시험공부.”

졸업 생각만 해도 기쁜지 제네비브가 눈을 반으로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

입안이 썼다.

이제 제네비브의 졸업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 학기부터 제네비브를 못 본다. 아무리 연락처를 받았다 하여도 편지로 근황을 묻는 것과 직접 만나는 건 다를 것이다.

“맞아. 그리고, 작년에 쓴 공용어 노트 찾았어.”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제네비브가 유독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널린 교재 사이에서 공책 하나를 꺼냈다.

“감사합니다…….”

예의상 찾아보겠다고 말한 줄 알았는데, 정말 공책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안 돌려줘도 돼. 다른 노트도 줄까?”

“괜찮아요. 지금도 감사한걸요.”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건넨 노트를 펼쳤다. 학년 차석이라는 그녀의 필기 방법이 궁금했기도 했고, 공부를 안 하면 휴게실을 나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맞춘 것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정갈한 필체였다. 가독성 좋은 깔끔한 필체가 제네비브다웠다.

“어때, 어때? 진짜 잘 썼지?”

“하하…….”

기실 에드워드가 다시 쓸 일 없는 1학기 때 배운 내용을 흘겨보던 중, 휴게실 입구 부근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블랑카가 이가 보이도록 환하게 웃으며 커다란 종이 뭉치를 팔꿈치에 낀 채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에디도 있었네!”

눈이 마주쳤을 때, 블랑카가 활발하게 말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휴게실을 잔뜩 메우자, 그녀는 뒤늦게서야 분위기를 파악했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블랑카를 보며 제임스가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신났어?”

“<더 칼리지>를 완성했어! 특별히 너희한테만 먼저 공개하는 거야.”

블랑카가 <더 칼리지> 5월호를 에드워드에게 건넸다.

에드워드가 <더 칼리지>를 펼치자, 제네비브가 그의 가까이로 자리를 옮겼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에 놀란 탓에 에드워드는 1면 기사 제목이 <새로운 무패 신화를 만든 챔피언!>이라는 것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에드워드는 무려 작년 우승자였던 마이언 아카데미의 테오도르 우드빌을 꺾고 플뢰레 우승을 했다. 그는 승 하나 내주지 않고 이겼다.’ 맞아, 그랬었지.”

즐거운 듯한 어조로 신문을 읽는 제네비브와 다르게 에드워드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블랑카는 에드워드의 실력을 과장 없이 서술했지만, 그녀 특유의 문체는 그 일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에드워드는 지금 귀 끝이 불타오르는 게 기사 때문인지, 아니면 제 옆에서 신문을 읽는 제네비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더 칼리지>는 앞으로 세인트 존 칼리지의 펜싱 클럽을 이끌어 갈 에드워드의 앞날을 응원한다.”

“어때? 마음에 들어?”

제네비브가 기사를 끝까지 읽었을 때, 블랑카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 네. 괜찮은 것 같아요.”

민망할 정도로 저를 찬양하는 글귀를 읽자니 얼굴을 제대로 못 들겠다.

어디서부터 짚어야 할지 모르던 에드워드는 제대로 된 감상을 내놓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제임스만이 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3학년이 마지막으로 참여한 <더 칼리지>는 여름 대회 기간 동안 바쁘게 뛰어다닌 흔적이 여실히 보였다. 기사 내용은 푸짐했고, 구성도 미묘하게 이야기가 있었다. 특히나 제임스의 졸업을 알리는 기사 뒤로 에드워드의 인터뷰가 시작되며 인수인계가 된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너무 나와 에드워드 얘기밖에 없잖아.”

제임스가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더 칼리지> 5월호는 에드워드와 제임스 특집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형식적으로 대회 결과와 경기 내용을 대략 쓴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에드워드와 제임스는 특집 기사만 5개나 있었다.

“너희가 잘했잖아.”

하지만, 블랑카는 꿋꿋했다.

“어떻게 마지막까지 이럴 수가 있냐…….”

“이게 바로 나야.”

제임스는 블랑카와 대화가 통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바람 빠진 웃음과 함께 흐린 눈으로 교과서를 폈다.

그간 에드워드가 겪은 바로, 사람 간의 의견 차이는 언제나 주변 공기를 딱딱하게 만들었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연을 끊어 버리는 경우를 자주 봤던 탓일까? 제임스와 블랑카처럼 언제나 같은 주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별다른 말 없이도 분위기를 풀어 가는 모습은 볼 때마다 신기했다.

“…….”

그리고, 에드워드는 그런 관계가 부러웠다.

한 발 걸쳐 알게 된 관계가 아니라, 스스럼없이 대하는 저 관계가. 좋고 싫음을 확실하게 말하고, 농담 정도는 너그럽게 허락되는 저 관계가.

멍청한 가정이지만, 아마 제네비브가 없었더라면 그는 사람 간에 이런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어디 가?”

에드워드가 소파에 일어서는 찰나, 제네비브가 물었다.

“잠시 방으로 가려고요.”

에드워드가 행선지를 알리자, 제네비브는 그럼 이따가 점심을 같이 먹자며 약속을 만들었다. 에드워드는 제임스와 블랑카에게 대강 인사한 후, 방으로 돌아갔다.

툭.

“……?”

기숙사로 돌아와 방문을 여는 순간, 허전한 입구를 장식하는 낡은 매트 위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에드워드는 의아해하면서도 허리를 숙여 편지를 주웠다. 손에 닿기 무섭게 느껴지는 촉감은 그간 그가 쓰던 종이 재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품이었다.

제게 이런 편지를 보낼 사람은 밀포드 씨를 제외하면 없기도 하거니와 그는 자신에게 이런 사치품을 쓰지 않는다.

다른 학생에게 가야 하는 게 실수로 온 건 아닌가.

에드워드는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편지를 뒷면으로 넘겨, 본래 받아야 하는 사람을 확인하려고 했다.

[에드워드]

하지만, 편지에 적힌 수취인은 본인이 맞았다.

에드워드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낸 이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편지를 밀봉한 푸른색 실링 왁스에 익숙한 문장이 찍혀 있었다. 칼을 든 사자와 왕관을 목에 건 백조가 방패를 휘감은 모양.

“…….”

황실의 인장이었다.

인장을 확인한 순간, 에드워드는 마치 만져선 안 되는 걸 만졌다는 양 편지를 침대 위에 던졌다.

이불 위로 가볍게 떨어진 고급스러운 편지는 단조로운 침대와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에드워드는 침대 맞은편에 앉아, 편지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황실이 저를 부를 이유가 있는가?

있다면, 왜 불렀는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이게 함정일지, 아니면 기회일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곧, 에드워드는 잡념을 접고 편지를 조심스레 열었다.

“황실 크루즈 여행에 초대합니다……?”

에드워드는 편지에 적힌 글씨를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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