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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65화 (65/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65화

살면서 단 한 번도 황실의 부름을 생각해 본 적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생각한 건 어디까지나 황족 중 한 명과의 개인 알현이었지, 지금처럼 아무 고지도 없이 대뜸 초대장부터 받으리라고는 이시스 여신에게 맹세컨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에드워드는 불신의 눈초리로 편지를 살폈다. 인장은 황실의 것이 확실했다.

‘아무리 그래도 콜린스가 황족을 사칭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겠지.’

아무리 저를 싫어한들 중범죄인 황족 사칭을 할 것 같진 않다. 에드워드는 저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며 초대장을 다시 읽었다.

초대장엔 그를 초대한 명분과 행사 일정이 간략히 적혀 있었다.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열리는 크루즈 여행에 에드워드 군을 초대합니다.

블렛 황실과 아본리아 국민들은 마이언 아카데미에서 당신의 활약을 듣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파인트리 서클에서 황금 브로치를 받은 에드워드 군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고 싶습니다.

―랜돌프 블렛]

마이언 아카데미에서 활약해, 솔잎 브로치를 받은 평민 장학생이 궁금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총 이틀에 걸친 여행으로 금요일 밤에 떠나 일요일에 돌아오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일정이었다. 가장 마지막 줄에는 주최자의 이름이 금박으로 박혀 있었다.

“랜돌프 블렛…….”

에드워드는 이름으로만 들어 본, 제 배다른 동생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의식적으로 황족의 소식을 피해 왔기에 에드워드가 이복동생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았다. 아는 거라고는 황태자의 지위와 이름뿐이었고, 생긴 것도 어제 제네비브가 보던 책에서 처음 초상화를 봤다. 제 이복동생이라는 걸 제외하면 에드워드가 황태자에 대해 아는 건 여타 평민들과 다를 바 없었다.

에드워드는 랜돌프가 제 정체를 알고도 초대를 한 건지 궁금했다.

초대장에 서술된 걸 곧이곧대로 믿기엔 설득력이 없었다. 개인 알현으로 먼저 만나고, 그 뒤에 초대하는 거면 모를까. 만일 랜돌프가 자신이 이복형제라는 걸 알고 초대했다면 안 가는 게 상책이었다.

“…….”

초대장 하나로 전전긍긍하며 그 의도를 파악하려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공개된 서자보다 숨겨진 자식의 삶이 더 비참했다. 적어도 전자는 이런 저울질을 안 해도 되지 않은가.

에드워드는 잠시 어릴 때처럼 황제가 이러한 초대를 계기로 자신을 아들로 인정하는 상상을 하다가, 이내 현실감을 되찾았다.

“나 따위가 무슨…….”

에드워드는 헛바람이 단단히 든 자신을 비웃었다.

처음 받은 황실의 공식 초대는 그의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초대 하나에 너무 많은 의미 부여를 하고 있었다.

입안을 씹은 에드워드는 다시금 제 주제를 파악했다.

랜돌프가 제게 신경을 쓸 거라는 생각 자체가 자의식 과잉이다. 아마 랜돌프는 누구를 초대했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지금 에드워드는 황자로 인정받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니라, 가서 조롱을 받더라도 못 들은 체하는 연습을 해야 했다.

‘과연, 이 초대가 내 자리를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될까?’

에드워드는 초대장을 책 첫 장에 끼우고는 방 밖을 나섰다.

* * *

식사 시간이었다.

휴게실만큼은 아니지만, 다이닝 홀도 결코 가벼운 분위기를 띠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미묘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맞으며 테이블을 찾았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사람들이었다. 블랑카는 어디로 갔는지 테이블엔 셋밖에 없었다. 에드워드가 가까이 다가서자, 제임스가 앉으라는 듯 옆자리 의자에 올려 뒀던 가방을 치웠다.

“블랑카 선배 자리 아닌가요……?”

“먼저 온 사람이 임자지.”

제임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에드워드는 가져온 책을 테이블 위에 올리곤 조용히 포크를 들었다. 말을 함부로 꺼내기 어려웠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곧바로 책에 시선을 뒀다. 제네비브만큼은 아니었지만, 오웬과 제임스도 손에 자료를 든 채 집중하며 읽었다.

골똘히 책을 보던 제네비브가 무언가 안 풀리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곤 가방에서 또 다른 책을 꺼내 페이지를 넘겼다. 작게 중얼거리며 책을 읽던 중, 드디어 원하던 정보를 찾았는지 제네비브가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식사 시간이라기보단 밥이 제공되는 공부 모임 같았다. 에드워드가 자신도 책을 펼쳐야 하는지 고민하던 사이, 블랑카가 도착했다.

뒤늦게 합류한 그녀는 차분했던 공기를 한순간에 바꿨다. 붉은 단발머리를 뒤로 넘긴 후, 의기양양한 미소와 함께 종이를 친구들에게 건넸다.

“엘레노어 선배가 보낸 족보가 벌써 도착했더라! 그래서, 부실에서 몇 부 찍어 왔어.”

처음 듣는 이름에 에드워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시스 여신님, 감사합니다…….”

족보를 받은 제네비브가 여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블랑카, 내가 진짜 사랑하는 거 알지.”

“호호, 진저 너도 참. 뭐 이런 걸 가지고.”

블랑카가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오웬과 제임스에게까지 족보를 건넨 뒤, 블랑카가 에드워드에게도 한 부를 나눠 줬다.

“작년 문학 졸업 시험 문제인데, 에디 너도 하나 가져.”

“아……. 잘 쓰겠습니다.”

“선배는 이러라고 있는 거지! 우리 졸업 시험 끝나면 그 시험지도 줄게!”

블랑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객관성이란 실재하는 개념인가, 믿음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문제는 줄줄이 있었다. 미리 족보를 봤다는 블랑카를 제외한 모든 이가 진지하게 글을 읽어 갔다.

“…….”

문제 자체는 일반 시험이나 과제 때 보던 것과 유사했다. 하지만, 출제자의 의도나 정답 범위를 예측하다 못해 대놓고 알려 주던 부가 설명이 존재하던 전과 달리, 족보는 질문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아리송한 표정으로 문제를 끝까지 읽은 제네비브는 곧 종이를 팔락거리며 앞뒤로 넘겼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다르게 뒷장은 잉크 하나 안 묻은 백지였다.

“……요약본이야?”

제네비브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족보를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드는 감상평이었다.

“아니, 딱 이렇게 나온대.”

블랑카는 고개를 저었다.

“지문도 없잖아!”

오웬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블랑카는 친구들의 항의에 깊게 공감하며 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주섬주섬 꺼냈다.

“엘레노어 선배 말로는, 제시된 질문 열 개 중에서 두 개를 골라 써야 한대. 두 시간 안에 각각 두 장 분량씩 써야 한다고 하더라.”

“……두 시간 안에 작문 두 개를 끝내야 한다고?”

제임스가 허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엘레노어의 편지를 받아 직접 확인한 블랑카가 제네비브와 오웬도 읽도록 편지를 보여 줬다.

“나, 졸업은 그른 것 같다.”

맞은편에 있던 오웬이 테이블 위로 엎어지며 말했다. 근심이 많은 건 제네비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족보를 노려보며 빵을 느리게 오물거렸다.

“거짓말…….”

커다란 녹색 눈이 현실을 부정하듯 편지와 족보를 번갈아 바라봤다. 제임스는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 같았고, 블랑카는 현실에 수긍하기로 했는지 가장 타격이 없어 보였다.

‘앞으로 교수님 성향을 봐 둬야겠어.’

기실 이들 중 졸업까지 가장 여유가 있던 에드워드는 조용히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베일리 교수의 시험과 출제 의도를 유심히 살펴보겠다는 결심과 함께 에드워드는 족보를 책 사이에 끼웠다.

“어? 황실 초대장이네?”

그때, 책 사이에 끼워 둔 초대장을 발견한 오웬이 물었다.

오웬이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던 차에 에드워드는 자신이 문장이 보이도록 보관했다는 걸 알아챘다. 아차 싶었으나 굳이 거짓말할 이유를 찾지 못한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크루즈 여행에 초대되었어요.”

“큽……!”

순간, 제네비브가 음식을 잘못 삼키기라도 했는지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물을 건네며 오웬의 말을 들었다.

“잘됐네~ 여행은 너무 거창한 단어고, 엄청나게 긴 연회라고 생각하면 편해.”

오웬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고요한 식당을 타고 퍼졌다.

황실 초대장이 가져다준 파장은 컸다. 공부에 질린 학생들이 귀를 쫑긋 세우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저를 힐끗거리며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세상에! 황실 초대를 받은 거야?”

가장 먼저 말을 걸어온 사람은 3학년의 어느 여학생이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접시를 에드워드 앞에 내려놓고는 그가 들고 있던 편지를 가져가 읽었다.

“어머나, 정말 황실 초대장이네!”

“레일라, 좀 돌려주지 그래?”

에드워드가 건넨 물을 마시던 제네비브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레일라’라는 학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에드워드에게 축하한다 말했다.

“대단하다! 이번 선상 파티는 작년보다 더 화려하게 진행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네가 초대를 받다니!”

“……네.”

“랜돌프 전하가 널 높게 사셨나 보다.”

에드워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던 사이, 다른 3학년생들도 말을 걸어왔다. 테이블 주변은 금세 바글바글해졌다.

“한 명 동행이 가능하네! 에드가, 같이 대동할 보호자가 필요하면 말해 줘. 우리 아버지가 도움이 될 거야.”

이름 모를 남학생이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에드가가 아니라, 에드워―.”

“윽, 졸업 시험 사이에 하네. 어쩐지 어머니께서 말씀이 없으시더라니. 나는 못 가겠다……. 우리 가문 중에서 나만 못 가네.”

“초대장 보니까 더 가고 싶어졌어. 클라라는 가겠지……. 부럽다.”

“마지막 날에 하는 불꽃놀이가 최곤데. 아, 대체 어떤 천재가 시험 일정을 이딴 식으로 정했을까?”

목요일, 금요일, 월요일은 좀 아니잖아. 누군가 불만을 토로하자, 학생들이 하나둘 동조했다.

“초대장은 이제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건 어떨까? 식사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에드워드가 황실이 건넨 초대장의 값어치를 저울질하던 사이, 오웬이 유들유들하게 인파를 해산시켰다.

에드워드에게 한마디씩 얹던 학생들은 친구들과 선상 파티 일화를 꺼내며 식사를 했다. 식당은 어느새 학생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로 평소와 같은 활기를 되찾았다.

갑자기 많은 사람을 상대한 에드워드는 온몸에 기력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에드워드……. 그, 갈 거야?”

그때, 제네비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갈지 말지 고민할 사항이 아니지! 황실이 아무나 초대하지 않잖아.”

에드워드가 대답하기 전에 오웬이 냉큼 말했다.

“랜돌프 전하까진 아니더라도, 가서 귀족들에게 눈도장을 찍어 두면 졸업 뒤에 자리를 잡을 때 도움이 될 거야.”

제임스가 건설적인 제안을 했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에드워드가 선상 파티에 참석할 경우, 따라올 이득을 말했다.

“근데, 진짜 대단한걸? 전하의 선상 파티는 나도 못 가는 연회거든.”

“그런가요?”

“가문의 수장과 그 반려, 그리고 물려받는 후계자만 참석할 수 있어. 내 위로는 형제가 있거든.”

“숙부님도 가셔?”

대화를 듣던 제네비브가 오웬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다급하게 들렸다.

“아마 가지 않을까~ 우리 가문은 매년 초대를 받으니까.”

“나는 왜…… 이런 연회가 있다는 걸 몰랐지?”

제네비브가 작게 물었다.

“올해가 유독 빠른 감이 있긴 해. 평소엔 방학에 진행했으니까.”

오웬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서 블라이스 가문은 너 빼고 다 가는 거고.”

그 말에 오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터 공작님과 공작부인은? 빈센트는?”

“뭐…… 부모님과 형은 가겠지.”

제임스가 말했다.

“진저, 괜찮아? 안색이 창백한데…….”

“그러게, 내가 공부 좀 쉬엄쉬엄하라고 했잖아~”

“이상한 거 먹었어?”

제임스가 제네비브의 접시 위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에드워드…… 넌 갈 거야?”

의아하게도 제네비브가 조금 힘겹게 물었다.

“준비하는 게 걱정이면 이 오웬한테 말하면 돼. 우리 가문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해 놓을게.”

오웬이 눈을 찡긋거렸다.

“다른 귀족들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연회야. 경험 삼아 한번 가는 것도 난 좋다고 생각해. 얘네 가문이 영 못 미더우면 나도 아버지께 말해 볼게.”

제임스가 격려하듯 에드워드의 등을 쳤다.

에드워드는 처음 초대장을 봤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갈 생각이 없었지만, 두 사람의 설명과 주변 학생들의 반응을 보니 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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