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66화
만약 제네비브에게 실과 바늘이 있었다면, 그녀는 테이블을 지나치는 모든 학생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게끔 그들의 입을 꿰맸을지도 모른다.
가면 안 된다고 뜯어말려도 모자른 판에 오히려 하나같이 와서 부럽다고 말하고 있으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가고 싶어요.”
그리고 에드워드가 이렇게 대답했을 때, 제네비브는 억장이 무너지는 게 어떤 건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포가츠 아카데미가 문을 닫았을 때도 이렇게 정신이 아득하지 않았다.
“…….”
생일날 들뜬 아이처럼 옅은 미소를 짓는 에드워드를 보자니 눈앞이 더 캄캄해졌다.
‘그거 타면 너 죽어!’
제네비브는 자리를 박차고 미래를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작은 머리가 팽팽 돌았다. 제네비브는 비록 등장인물의 이름을 까먹었더라도, 주요 사건만큼은 기억했다.
선상 파티는 제네비브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두 가지 과거 사건 중 하나인데, 알고 있는 정보를 이렇게 멍청하고 허무하게 낭비해선 안 됐다. 에드워드의 방 앞에 드러눕는 한이 있어도 말려야 한다.
‘그 크루즈에서 살아남으면 그거야말로 주인공의 기적이지…….’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선상 파티가 초대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괜찮았다.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르게 흘러간 데 조금 충격을 받았지만, 한 달 동안 머리를 굴리면 에드워드를 배에 못 타게 할 방법 서너 개쯤은 떠올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더 큰 문제가 생겼다. 학생들이, 친구의 가족이, 제 친척이 그 크루즈에 탈 줄은 생각지 못했으니까.
‘귀족 절반이 죽는 일인데, 왜 내 주변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안일했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블라이스 백작 부부가 죽는다.
카터 공작 부부가 죽는다.
내 가족이 죽고, 친구의 가족이 죽는다.
“…….”
거짓말이길 바라는 문장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질 나쁜 거짓말쟁이로 낙인되는 게 오히려 나았다.
틱, 틱.
제네비브는 식탁 아래에서 손톱을 뜯었다.
옆에선 친구들이 에드워드의 선택을 지지하며 신나게 계획을 세우는 말소리가 들렸다.
블라이스 가문에게 언질해 두겠다는 오웬, 빈센트가 도울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제임스, 연회가 어땠는지 다녀와서 이야기해 달라는 블랑카까지.
암만 귀족이어도 가문의 수장과 후계자에게만 주어지는 초대장인 만큼 궁금한 게 많은 건 자연스러웠다.
제네비브는 손끝에 피가 나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계속 손톱을 뜯었다.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작게 한숨을 쉰 제네비브는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제네비브 달링, 정신 차려. 긍정적으로 생각해.’
아직 선상 파티까지 시간이 있다. 곧 죽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슬퍼할 시간에 살릴 방도를 생각해 내야 했다.
몰랐던 정보를 이번 기회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오웬이 알려 준 것처럼, 기존에 했던 대로 방학에 진행되었더라면 제네비브는 손쓸 새도 없이 그저 운에 맡겨야 했을지도 모른다.
‘당장 파티가 다음 주가 아닌 게 어디야.’
한 달이란 시간에 집중해야 했다.
“한 달이면 충분하지.”
이건 기회야.
한 달은 파티를 없던 일로 만들기 충분했다. 아니, 충분해야만 했다. 제네비브는 자신을 세뇌하듯 그 말을 되풀이했다.
“뭐가 충분한데?”
심연 안으로 들어가려는 제네비브의 정신을 다시 테이블로 끌어 올린 건 오웬이었다.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제네비브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에드워드만 초대 받아서 배가 아프기라도 한 거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표정이 좀 풀라고 하는 소리지~”
‘선택된 소수에게만 주는 초대장’이 주는 설렘에 부푼 테이블에서 저 홀로 속을 태우고 있으니, 이들이 괴리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졸업 시험 생각하느라…….”
제네비브는 사실을 털어놓는 대신, 가장 그녀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진저, 저기 앉은 오웬도 태평한데 네가 왜 걱정이야.”
“오늘은 후배님한테 역사적인 날이니까~ 걱정은 넣어 두고 축하해 주자고!”
“응, 진짜 잘된 일이지.”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보며 말했다.
“선배가 아니었다면 이런 기회도 없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내가 뭘 했다고.”
제네비브는 미소를 힘겹게 지었다.
불편한 진실이었다. 에드워드에게 황실 초대장을 안겨 준 브로치는 그녀의 작품이 맞으니까.
남은 음식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빵을 겨우 다 먹은 제네비브는 친구들의 뒤를 따라 휴게실을 천천히 걸어갔다.
“—그래서, 크루즈 여행은 24시간 연회라고 봐야 해. 힘들기야 하겠지만 자연스럽게 친분 쌓기가 편하거든.”
“착장은 걱정 말고~ 고모님, 아니 달링 부인이 준 옷이면 충분해.”
“무리해서 안 맞는 옷을 입을 필요는 없어.”
“생각보다 복잡하진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대화에 호응하기란 어려웠다.
“애들아, 나 잠깐 방에 좀 다녀올게.”
대화를 더 듣다간 미래를 발설할 것 같았다.
제네비브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방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입술과 손톱을 얼마나 씹어 댔는지, 방에 도착하니 아랫입술에선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우선순위를 정하자.”
제네비브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목숨의 귀천을 정하는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최악을 대비해야 하는 법이었다.
“파티가 아예 안 열리는 게 제일 좋지. 그게 어려우면 학교 애들이라도 구하고…… 블라이스 가문이나 카터 가문이라도…….”
제네비브는 방 안을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주최자가 없으면 연회도 안 열릴 텐데…….”
주최자 없이 연회가 열릴 리 없다, 라는 지극히 일차원적인 생각에서 나온 극단적인 해결책이었다. 제네비브는 그걸 선택지랍시고 내놓은 제 머리를 벽에 찧었다.
“미친, 황족 시해범으로 잡혀 갈 일 있나.”
무엇보다 수백 명을 살리자고 한 명을 희생시키는 건 정답이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건…… 내가 뭘 알고 있다는 티를 내선 안 된다는 거야.”
조금 전, 다이닝 홀에선 블라이스 가문과 카터 가문이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워낙 충격적이라 반응이 격하게 나왔다.
같은 실수는 반복해선 안 되었다. 에드워드나 친구들이 저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기도 했으나, 다시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괜찮을 거다.
귀족이 무더기로 사망하는 사고다.
만약 제네비브가 연회를 무산시키지 못해 사고가 예정대로 흘러간다면 아본리아에선 이 사건을 샅샅이 조사할 거다.
제네비브가 아는 대로라면 사고로 결론은 나겠지만, 제네비브가 이 일을 알고 있었다는 게 들통난다면 일은 순식간에 복잡해질 거다.
그저 갑작스러운 기상 이변으로 벌어진 불운한 사건인데, 카르디르가 배후에 있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건을 능숙하게 해결하는 외국 귀족보다 어설프더라도 자국민이 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도 능력이 출중한 아본리아 귀족이 훌륭하게 해결하는 게 가장 좋지.’
순간, 제네비브의 머리에선 한 사람이 지나쳤다.
“……내가 능력 있는 아본리아 귀족을 모르진 않지.”
생기를 되찾은 제네비브는 휴게실로 향했다.
꺼진 벽난로 소파 앞에 앉은 친구들은 각자 선호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제네비브는 1인용 소파에 앉은 에드워드와 블랑카를 지나쳐, 제임스의 무릎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소파에 편히 누워 있는 오웬 앞에 멈춰 섰다.
“아까보단 괜찮아 보이네.”
오웬이 제네비브를 슬쩍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멀쩡했어.”
하지만, 그는 안 믿는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네비브는 생각해 온 본론을 꺼냈다.
“오웬, 블라이스 백작님은 지금 어디에 계셔?”
“음…… 사교 시즌이니까, 리스톨 타운하우스에 머물고 계시지?”
다짜고짜 부친의 행방을 묻는 질문에 오웬은 순순히 대답했다.
리스톨은 세인트 존 칼리지와 멀지 않았다. 만약 블라이스 백작이 영지에 있었다면 일이 번거로워졌을 텐데, 리스톨에 있다니 이보다 일이 생각보다 빨리 풀릴 것 같았다.
“너, 내일 시간 많지?”
“없진 않지.”
오웬이 대답했다.
“나, 숙부님을 만나야겠어.”
제네비브가 비장하게 말했다.
“지금 나도 같이 가자는 얘기지?”
두 문장이 내포하는 의미를 읽은 오웬이 재차 확인했다.
“리스톨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야. 사촌인 네가 안내해 줘. 그리고 나는 여태까지 블라이스 영지만 방문했으니까, 네 타운하우스 사용인들이 나를 알 거라는 보장도 없고…… 아, 또—.”
“예의가 없어 보이니, 나를 연막으로 쓰고 싶기도 하고?”
오웬이 끊임없이 이유를 나열하는 제네비브의 말을 가로챘다.
“응, 네가 있어야 그래도 방문이 그럴듯하게 보이잖아.”
제네비브는 부정하지 않았다.
“진저, 그러면 내일은 리스톨에 가는 거야?”
“응, 숙부님께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생겼거든. 그래서 오웬, 같이 가 줄 수 있어?”
“오랜만에 수도 구경한다고 생각하지, 뭐. 정말 내일까지만 놀고 월요일부터 시험공부 한다.”
오웬의 동행이 결정되는 즉시, 제네비브는 모든 일을 속전속결로 진행했다.
기숙사 사감을 찾은 제네비브는 외출증 2장을 받고는 교내 마차 예약을 마치고, 다시 기숙사 휴게실로 돌아갔다.
그녀는 오웬에게 외출증 하나를 건네고는 바닥에 앉아, 열차 운행표를 살펴봤다.
“내일 아침 여덟 시 열차로 하자.”
“여덟 시? 너무 이른 거 아니야?”
“그래야 열 시에 도착해서 둘러볼 시간이 있지. 리스톨 역에서 타운하우스까지 얼마나 걸려?”
“트램으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 같던데…….”
“생각보다 가깝네. 아무튼, 우리는 여섯 시 반에 휴게실 앞에서 만나는 거야. 조금 졸리겠지만, 부탁할게.”
제네비브는 일요일 일정을 오웬에게 알리고는 내일 블라이스 백작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
그리고, 제네비브가 블라이스 백작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본리아 황실에 대해 안 좋게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아.’
블라이스 가문은 아본리아가 건국된 순간부터 강경한 귀족파였다. 그의 정치적인 성향은 황제와 정반대였고, 이는 오웬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블라이스 백작은 노골적으로 황제에 대한 불만을 말하고 다녔는데, 카르디르 귀족인 제네비브에게도 종종 불만을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러니 ‘황태자가 주최하는 연회가 망할 것 같다’라는 말 정도는 꺼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제네비브는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폭 좁은 드레스는 움직이기 편했다.
휴게실 앞엔 이미 오웬이 있었다. 그는 방금 일어난 듯, 머리는 까치집이 졌다. 또한 자칫하면 실내복으로 보이는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안 늦었네?”
“하암……. 네가 이 시간에 나오라며…….”
오웬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제네비브는 꾸벅꾸벅 조는 그를 끌고 마차를 탔다.
이후, 기차역에 도착한 둘은 표를 2장 구매하고는 열차에 올라탔다.
“리스톨까지 얼마나 걸려?”
오웬이 여태 잠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두 시간. 좀 자.”
일반 열차는 그랜드 익스프레스에 비하면 비좁고 열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오웬은 어떻게든 잠을 잤다.
그리고 제네비브는 오웬의 코골이를 배경 음악 삼아 열차 창문에 기댄 채 빠르게 바뀌는 풍경을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