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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67화 (67/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67화

‘그나저나, 숙부님께 뭐라고 말하지?’

호기롭게 리스톨행 열차에 오르긴 했으나, 제네비브는 여전히 ‘크루즈 여행이 망할 것 같다’라는 말을 어떻게 에둘러서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조리 있게 말해야 숙부님이 믿을 텐데…….’

제네비브는 한숨을 쉬었다. 제아무리 외숙이 자신을 아낀다고 하여도 그건 어디까지나 조카로서, 레베카 달링의 딸로서였다.

이번에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바뀌거나, 아니면 예정된 것처럼 모두가 개죽음을 당할 거다. 제네비브는 못해도 제 가까운 사람들만큼은 구하고 싶었다.

그녀가 고민하던 사이, 열차는 어느새 리스톨에 도착했다. 리스톨은 수도답게 넓고 번잡했다. 한산한 학교 주변 기차역과 다르게 이곳엔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이들이나 타 지역에 일을 보고 돌아온 사람들. 평일의 모습은 알지 못하나,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값비싼 옷을 기민하게 알아본 장사꾼들은 제네비브와 오웬에게 다가와 물건을 보여 주며 구매를 권했다(둘은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간신히 역에서 벗어난 제네비브는 오웬을 따라 트램에 올라탔다.

오웬을 끌고 온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제네비브가 외국 대도시를 방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약 혼자 왔더라면 분명 길을 잃었을 테다.

“마차를 빌릴 걸 그랬어.”

트램 위에 올라탄 오웬이 후회의 말을 내뱉었다. 그의 말이 이해될 정도로 트램은 느렸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그 점이 외려 좋았다. 매번 마차만 탔던 그녀에게 트램이란 이동 수단은 새로웠다.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카르디르와 다른 건축 양식의 건물들을 구경했다.

트램은 다닥다닥 붙은 벽돌 건물과 광장, 그리고 시장 입구 부근을 지나갔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으니,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부담감이 조금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승차하는 사람보다 하차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어느새 탑승객은 제네비브와 오웬만이 남아, 둘은 남은 거리를 앉아서 갈 수 있었다.

“근데, 우리 아버지는 왜 만나려는 거야?”

오웬이 아이스크림콘 끄트머리를 먹으며 물었다.

“비밀이야.”

제네비브는 짧게 대답했다. 오웬에게 괜히 거짓말을 했다간 그가 눈치챌지도 모른다.

“서운하다, 서운해. 꼭두새벽에 일어나기까지 했는데 아무것도 안 알려 주다니.”

“근데, 언제 도착해? 30분 다 되어 가는 것 같은데.”

제네비브는 노골적으로 말을 돌렸다. 그녀의 말에 오웬은 무심코 창밖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헉, 여기서 내려야 해!”

오웬이 트램에서 허둥지둥 뛰어내렸다.

“여기야?”

그를 따라 내린 제네비브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귀족들이 머무는 곳이라고 하기엔 행인들의 옷차림이 비교적 평범했다.

“트램이 어떻게 에비뉴 안까지 들어와. 더 걸어야 해. 한…… 20분 정도?”

“진짜 마차를 탈 걸 그랬네…….”

한시가 아까운 상황인지라 제네비브는 툴툴거렸다.

조금 더 걷자, 두 사람 앞으로 넓디넓은 부촌이 펼쳐졌다. 아본리아 귀족들이 사교계 시즌 동안 머무는 곳답게 거리는 활기찼다.

곳곳에 양산을 든 귀부인과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가 걸어 다녔고,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마차 여러 대가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몇몇 행인은 오웬을 알아보며 그에게 아는 체를 해 왔고, 옆에 있던 제네비브에게도 관심을 줬다.

‘이 사람들 중에서도 크루즈에 타는 사람이 있겠지…….’

안 좋은 생각을 멈춰야 했지만, 머리는 끊임없이 최악의 상황을 그려 냈다.

‘만일 블라이스 백작 부부와 휴고 블라이스가 죽으면, 오웬이 블라이스 백작이 되는 걸까?’

제네비브는 앞에 당사자를 두고 이런 상상을 하는 자신이 싫어졌다.

“블라이스 타운하우스에 온 걸 환영합니다~”

그런 제네비브의 마음을 알 길 없는 오웬이 평소와 같은 어조로 말했다.

크림색 타운하우스는 블라이스가 남자들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게 꾸며졌다. 제네비브는 이 타운하우스는 블라이스 백작부인의 솜씨이리라 생각하며 입구 계단 앞으로 올라갔다.

“문고리를 두들기는 영광을 드리겠나이다.”

오웬이 마치 하인인 양, 허리를 숙이며 한 걸음 떨어졌다.

제네비브가 문고리를 두들기자, 문이 열렸다.

“누구십니까?”

타운하우스에서 나온 풋맨이 제네비브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려고 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타운하우스 사용인들은 제네비브를 몰랐다.

제네비브는 대답 대신 오웬을 힐끗 쳐다보았고, 그제야 오웬의 존재를 파악한 풋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로건~ 오랜만이다!”

“오웬 도련님? 그럼, 이분은…….”

“제네비브 달링이에요.”

“아,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풋맨은 서둘러 고개를 푹 숙였다.

요란스러운 소리에 사용인들이 불어났다. 예고 없이 찾아온 작은 도련님과 외국 귀족의 방문에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스테판이 허둥지둥 계단 아래로 내려와 둘을 반겼다.

“오, 오웬 도련님! 제네비브 아가씨!”

그가 크게 놀란 목소리로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새로 들어온 풋맨이라 아가씨를 알아보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해야 하는 일을 한 건데요. 뭐, 저라도 몰랐을 거예요.”

제네비브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연락 없이 갑작스레 방문해서 죄송해요. 폐를 끼친 건 아니겠죠?”

“폐라뇨!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하…… 오웬 도련님 주변에 제네비브 아가씨가 있어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스테판이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년의 집사는 자기 좋을 대로 옷을 입은 오웬을 보며 해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제네비브가 오웬의 감시차 따라온 걸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도련님. 언질도 없이 잠옷 차림으로 무슨 일이십니까?”

“잠옷이라니~ 스테판도 너무하지. 아버지를 뵈어야 해서 찾아왔어. 지금 집무실 안에 계시나?”

“백작님과 백작부인께선 지금 리스톨에 안 계십니다. 블라이스 영지에 일이 생겨, 마이언에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그쪽에 가셨습니다.”

‘숙부님이 안 계시다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제네비브는 불안한 심경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미리 편지를 보내셨다면 아셨을 텐데 말이죠…….”

스테판은 오웬의 예법을 지적했지만, 찔린 사람은 제네비브였다.

“언제 돌아오신대?”

“화요일에 오실 것 같습니다만…… 급한 사항이라면 전달하겠습니다.”

오웬은 대답하는 대신 의견을 물어보듯 제네비브를 바라보았다. 제네비브가 고개를 젓자, 오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음~ 편지를 쓸 테니, 대신 전달해 주겠어?”

“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응접실에 계시지요. 아침은 드셨습니까?”

두 사람이 대답하기도 전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꼭두새벽부터 수도로 향한 둘이 먹은 건 아이스크림밖에 없었다. 제네비브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스테판은 흔쾌히 음식을 준비하겠노라 말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블라이스 자택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온갖 음식을 대령했다.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스테판은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응접실 책상 위에 종이와 펜, 그리고 실링 왁스까지 내려놓은 그는 정중하게 인사한 후, 응접실 밖으로 갔다.

수프를 한두 입 떠먹던 제네비브는 고기를 먹는 오웬을 보며 책상을 향했다.

‘블라이스 백작님께’까지만 쓴 제네비브는 벌써부터 막막해졌다.

직접 말하는 것과 편지로 전하는 게 같을 리 없었다. 즉각 반응이 보여 설득할 말을 그 자리에서 꾸며 낼 수 있는 전자와 다르게, 편지의 경우 이 한 장에 모든 내용을 논리 정연하게 써야 했다.

“하아…….”

제네비브는 펜을 손가락 사이에 굴리며 고민했다.

어떻게 말해야 보기 좋은 동시에 경고의 의미가 담길까. 하지만 외국 귀족이 ‘너희 나라 행사 망할 것 같다’라고 하는 건 어떤 식으로 보더라도 좋아 보이진 않을 듯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편지 내용이 그저 ‘조카의 투정’으로 보여선 안 된다는 거다.

여러 고민 끝에 제네비브는 원래 쓰던 편지를 구기고는 새로운 편지지를 꺼냈다.

[숙부님께.

안녕하세요, 숙부님.

저와 오웬의 갑작스러운 방문 소식에 당황하셨을 거라 생각해요.

6월에 열리는 랜돌프 황태자 전하의 크루즈 여행 건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는데, 리스톨에 안 계시기에 길게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 짧게 몇 글자 적어 봅니다.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말하자면, 이번 크루즈 여행에 안 가셨으면 좋겠어요.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에요.

G. 달링]

제네비브는 편지를 밀봉하기 전, 내용을 점검했다.

언뜻 보면 감정에 호소하는 글처럼 보이겠지만, 온갖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작은 선물 하나에도 의미가 담긴 귀족 사회답게 이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낼 거다. 격식 없는 양식은 지극히 사적인 편지임을 의미하니까.

더불어 제네비브는 스테판이 블라이스 백작에게 이걸 건넬 때, 그가 오웬이 보낸 편지라고 덧붙일 걸 알았다. 그렇다면 블라이스 백작도 이 편지 내용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도 숨겨야 한다는 걸 알아차리고, 제네비브대로 진지하다는 걸 눈치챌 거다.

이렇게 블라이스 백작이 불참 의사를 내비친다면, 그를 따르는 세력도 참석하지 않을 거다. 제네비브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거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유의미한 변화는 있지 않을까. 제네비브는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네가 스테판에게 줘.”

녹인 녹색 밀랍에 블라이스 가문의 인장을 찍은 후, 제네비브는 오웬에게 편지를 건넸다.

식사를 마저 끝마친 둘은 소파에 기댔다. 볕 좋은 자리에 앉으니 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스테판, 아버지께 이걸 전해 드리면 돼.”

오웬은 정리하러 들어온 사용인들과 함께 온 스테판에게 제네비브가 쓴 편지를 건넸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궁금한 게, 형은 어디에 있어?”

“휴고 도련님은 카터 소공작님과 함께 클럽 하우스에 계십니다.”

“어디 가려고?”

제네비브가 물었다.

“어차피 일곱 시 열차잖아. 내일부터 공부하느라 고생할 우리를 위한 마지막 자유인 거지.”

“뭐? 나도 가?”

제네비브는 경악하며 물었다.

“그럼, 너만 두고 가게? 난 네가 칼리지 다니면서 수도 한번 안 와 본 것도 신기하다.”

오웬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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