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68화
그리하여 제네비브는 난생처음으로 팔자에도 없는 클럽 하우스를 구경하게 되었다. 오웬을 아는 직원은 별도의 검사 없이, 두 사람을 통과시켰다.
“내가 들어와도 되긴 해?”
제네비브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왜냐하면 클럽 하우스는 주로 남자들의 공간이라는 것과 특히나 수도 한가운데에 있는 클럽 하우스는 자국 귀족만 출입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여기서 뭘 한다고.”
오웬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네비브가 그 말을 이해한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역시나, 클럽 하우스에 발을 내딛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인이 없는 타운하우스에서 머무는 건 또 불편했고, 오웬이 클럽 하우스에서 나올 때까지 로비에서 기다리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다고 오웬과 따로 돌아다니자니 제네비브는 리스톨에 마땅히 아는 사람도, 장소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오웬을 뒤따라 클럽 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이 클럽 하우스 주 이용객의 연령대는 척 보기에도 어렸다. 성인식을 앞둔 이들부터 많게는 30대 초반까지, 가문의 수장보다는 그 후계자나 자식들이 즐겨 찾는 장소 같았다.
아직 작위가 없는 귀족 영식들이기에 이곳에서 제 정치적 견해는 공유할지언정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오웬의 말대로 외국인이 들어오더라도 문제 될 것 없었다.
담배 연기가 심하다는 것 제외하면 이곳은 제네비브가 생각하던 것보다 건전했다. 남자들은 부친을 흉내 내는 듯한 말투로 대화를 나누거나, 시가를 피우며 당구를 쳤다.
“아버지께 직접 에드워드 일 부탁하려고 리스톨에 온 거 아니야? 이왕 온 거, 형들한테도 말해 놓으면 좋지~ 에드워드도 아버지뻘보단 또래가 편할 거 아냐.”
“아…… 그렇지.”
오웬은 고민 끝에 제네비브가 블라이스 백작을 찾은 이유를 에드워드라고 추측한 것 같았다.
“…….”
만약 닥쳐올 미래가 다르거나 미래를 몰랐더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제네비브는 리스톨에 온 이유를 굳이 정정하지 않고, 그가 오해하도록 내버려 뒀다.
조금 더 걸어가니 카드 게임을 하는 휴고와 빈센트가 보였다.
누가 누구를 닮은 건지 짐작이 안 될 정도로 오웬 못지않게 가벼운 분위기를 솔솔 풍기던 휴고 블라이스는 그간 제네비브가 기억하던 것보다 진중한 모습이었다.
빈센트와 함께 있는 휴고를 보며, 제네비브는 졸업 뒤엔 오웬도 철이 들지 궁금해졌다.
“……휴고, 네 동생들이 왔는데?”
두 사람을 먼저 발견한 건 빈센트였다.
“휴고 형!”
오웬은 어느새 테이블에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오! 사랑하는 나의 동생들! 여긴 어쩐 일이야.”
휴고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기색과 다르게, 그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반기는 데 성공했다.
‘아까 한 생각은 취소. 예전과 달라진 게 없네.’
제네비브는 조금 전, 속으로 내린 인상을 철회하며 그와 가벼운 포옹을 주고받았다.
“빈센트 형도 여기에 계실 줄 몰랐네요~”
오웬이 서글서글한 미소와 함께 반갑다는 듯 말했다. 분명 스테판에게 휴고가 누구와 동행했는지 들었음에도 모르는 척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근데 너희 둘, 학교는?”
빈센트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내일부터 공부하느라 바쁠 것 같아서! 마지막 자유를 만끽하러 나왔답니다.”
오웬이 싹싹하게 말했다.
“와, 근데 제네비브 너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우리, 마이언에서도 못 보지 않았어?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지난겨울에 세텐에서 만났지. 오빠는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나도 너희처럼 경기 보고 다니느라 정신없었지. 올해는 세인트 존 칼리지가…… 어, 학생들이 열심히 하더라.”
휴고는 이번 세인트 존 칼리지의 낮은 승률을 애써 포장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내년 여름 대회를 기대하겠노라 말하며 제네비브가 능숙하게 손가락 사이로 카드를 굴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제임스와 펜싱 우승이 우리 학교 면을 세웠지.”
반면, 빈센트는 가차 없이 말했다.
“아, 그 펜싱 우승한 애가 이번에 크루즈 여행에 초대를 받았어요.”
오웬이 선상 파티의 운을 띄우자, 제네비브의 속은 착잡해졌다.
“누군데?”
빈센트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에드워드라고, 이번에 랜돌프 전하가 직접 초대하셨어요.”
오웬은 재빨리 설명했다.
“전하께서 직접 초대하셨다면야, 나쁠 건 없지.”
“……괜찮은 애예요.”
제네비브는 조용히 동조했다.
“형, 오데인 교수 기억하지. 걔 아직 2학년인데, 오데인 교수가 만점을 줬어!”
오웬은 입이 마르도록 에드워드를 칭찬했다.
펜싱 클럽에 가입한 지 몇 주 만에 우승을 하고 브로치까지 받았다, 장학생인데 공부를 그렇게 잘한다, 엄청 착하다, 등 당사자가 들으면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칭찬 세례가 이어졌다.
제가 해야 할 말을 오웬이 하고 있으니 미안해졌지만, 제네비브는 그를 칭찬할 여념이 없었다. 블라이스 백작을 못 만난 만큼 휴고나 빈센트에게라도 ‘연회에 가면 안 된다’라는 인상을 남겨야만 할 것 같았다.
“에드워드의 후견인도 함께 참석하나?”
그때, 빈센트가 물었다. 오웬은 올 게 왔다는 듯 제네비브의 팔꿈치를 툭툭 쳤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후견인이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서.”
머릿속에선 밀포드가 떠올랐지만, 제네비브는 말을 아꼈다.
‘그러고 보니 밀포드가 누군지도 알아내야 하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해결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제네비브는 트럼프 카드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어떻게 해야 그들이 크루즈 여행에 안 갈지를 고민했다.
‘미친 척하고 배가 침몰한다고 얘기해?’
그랬다간 달링 가문의 외동딸이 미쳤다는 소문이 돌 테다.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힘들 텐데~ 내가 챙겨 볼게.”
“형이 그래 주면 너무 고맙지! 제네비브, 잘됐다~ 그치?”
제네비브는 오웬의 호들갑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 줬다.
“음……. 근데, 그 크루즈 여행을 꼭 가야 하나요?”
제네비브의 말엔 ‘가지 말아라’라는 뉘앙스가 잔뜩 담겼다. 그러자 오웬은 미쳤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질문이 이상했네요.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졸업 뒤에 황실 초대를 받았을 때, 만약 거절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거절은 서로가 동등한 관계일 때나 할 수 있는 거고, 황실 초대는 정중한 명령에 가깝지. 거절은 해도 돼. 황실과 동등한 입장에 있으면.”
‘황실과 동등한 사람이 존재하긴 하나?’
타국의 황제나 왕이면 가능할 것 같긴 하다.
“그 예로 제국에선 카터 가문이나 헤이븐 가문 정도 있지.”
휴고는 제네비브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가문의 이름을 나열했다.
“헤이븐…….”
헤이븐 공작 가문. 종종 들었던 가문이 남자 주인공의 가문이란 게 새삼스레 체감이 됐다.
“아니면, 어느 정도 황실과 혈연으로 얽혀야 밉보이지 않을걸.”
빈센트는 그녀에게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쭉 들어 보니 황실 주최의 연회를 빠지는 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행해야 하는 일 같았다.
‘블라이스 가문이 대놓고 황실과 대척해서 다행인 거겠지……?’
수십 년간 귀족파로 밉보였지만, 블라이스 가문의 세력은 제국에서 무시하지 못할 만큼 굳건했다. 한 번쯤 참석 안 하더라도 후폭풍은 없을 거다.
미운털이 박힌 상태로도 세력을 키워 가는 블라이스 가문과 황실과 맞먹는 권력을 가진 카터 가문은 문제가 없지만, 다른 가문들이 문제였다.
과연 이들이 가문에 닥칠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선상 파티에 불참할까?
“둘 중 어느 것도 해당이 안 된다면 가는 길에 사고가 나는 수밖에 없고.”
갑자기 극단적으로 치닫는 빈센트의 발언에 제네비브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마차 바퀴가 빠져 발목 정도 부러지면 이해하지 않겠어? 아니면, 몸이 아주 아프거나.”
그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오, 그래도 랜돌프 전하의 선상 파티에 빠지는 건 멍청한 짓이야. 네가 와 봤다면 알 수 있을 텐데.”
‘내 다리를 부러트려서라도 가기 싫다’라고 말할 줄 알았건만, 휴고는 황실 연회에게 후한 평가를 내렸다. 누가 본다면 황실과 블라이스 가문의 사이가 호의적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을 거다.
‘서로 물어뜯지 못해 안달 난 사이 아니었나?’
블라이스 가문은 부부부터 그들이 낳은 자식들, 사용인, 그리고 저택 지하에 수북이 쌓인 먼지까지 전부 뼛속부터 귀족파였다.
그 예로 블라이스 가문의 일원은 말조심할 필요를 모르겠다는 듯 노골적으로 황실의 정책에 반대하고, 싫다는 걸 굳이 숨기지도 않았기에 이렇게 예의 차린 모습을 보자니 영 어색했다.
‘황실과 사이가 좋아졌나 봐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제네비브는 구태여 예민한 사항을 건드리진 않았다.
“우리 집에서 점심을 갖지 않겠어?”
제네비브가 여러 고민을 잇던 사이, 빈센트가 둘에게 물었다.
오웬은 곧바로 긍정의 답을 내놓았고, 그렇게 제네비브와 블라이스 형제는 카터 가문의 타운하우스에서 남은 일요일을 보내게 되었다.
카터 하우스는 수도의 그 어느 타운하우스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영지의 성을 연상케 하는 건물 내부를 보며 제네비브는 감탄했다. 카터 가문과 어울리는 황금 장식이 적절한 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사용인들은 소공작의 손님을 극진하게 모셨다. 블라이스 저택과 마찬가지로 음식은 훌륭했다.
“다른 분들은 안 계시나요?”
제네비브는 테이블 상석에 앉은 빈센트를 보며 물었다.
비록 카터 공작과는 친분도 없고, 가끔 카터 영지를 방문할 때 스치듯 본 게 전부였지만, 지금 제네비브는 얼굴에 철면피를 까는 한이 있더라도 선상 파티에 대해 말을 꺼내 보고 싶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잠깐 영지에 방문하셨어.”
“아, 몰랐네요…….”
“근래 영지에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제네비브는 블라이스 백작 부부도 영지에 돌아갔다고 하는 말을 들으며 고기를 썰었다.
다섯 코스로 나오는 점심은 장장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이제는 더 못 먹겠다 싶을 때쯤 디저트가 나왔다.
식사 이후, 남은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빈센트는 손님들을 서재로 안내했다. 높은 책장 사이에는 당구대가 있었는데, 남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벽에 걸려 있는 큐대를 꺼내 클럽 하우스에서 미처 하지 못한 포켓볼을 쳤다.
제네비브는 그들을 무료하게 구경하다가 책 한 권을 꺼내 목차를 노려봤다.
‘어떡하지.’
잘 풀릴지 확신이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본다 한들, 바뀌는 게 과연 있을까.
눈에 안 들어오는 글씨를 꾸역꾸역 읽는 행위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해는 뉘엿뉘엿 져 갔고, 그녀가 모르는 사이 떠날 시간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 줘도 되는데…….”
“너희는 내 손님이잖아. 아, 그리고 이거.”
빈센트가 제네비브에게 상자를 건넸다.
“세텐산 초콜릿이야. 공부 열심히 해. 저녁도 먹고 가면 좋을 텐데, 시간이 안 맞아서 아쉽구나.”
빈센트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아, 아니에요. 마차만으로도 너무 감사한걸요. 제임스에게도 전해 줄게요.”
“빈센트 형, 내 건?”
포켓볼을 치는 동안 말까지 놓은 오웬이 물었다.
“네 것도 준비했지. 제임스는 집에서 많이 보내 주니, 굳이 안 줘도 돼.”
하지만 그 말과 달리, 그는 오지 못한 블랑카와 제임스의 선물도 챙겼다.
“졸업 시험, 잘 보고. 다음에는 애들이랑 다 같이 와.”
“오웬, 모르는 거 있으면 제네비브한테 물어봐.”
마차는 빈센트의 제안과 휴고의 당부가 끝나고서야 출발했다.
“아~ 보람찬 하루였다. 에드워드 샤프롱도 잘 구했고, 밥도 맛있었고! 학교 식당은 괜찮은데, 가끔 질린단 말이지~ 너는 어땠어?”
“……다음에도 꼭 오고 싶어.”
제네비브는 빈센트가 준 초콜릿 상자를 끌어안으며 마차 쿠션 사이로 몸을 욱여넣었다.
그녀는 다음번 방문에도 휴고와 빈센트가 오늘처럼 있기를. 다음번 방문에 오늘 일을 즐겁게 얘기할 수 있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