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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69화 (69/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69화

열차에 내려서야 제네비브와 오웬은 뒤늦게 그 누구도 마차를 부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둘은 늦은 시간, 방방곡곡을 뛰어다녀 겨우 마차 한 대를 얻었다. 결국 두 사람은 예정보다 훨씬 늦게 칼리지에 도착했다.

기숙사 건물엔 빛 한 줄기 없었다. 두 사람이 내딛는 발걸음 소리를 제외하면 건물 안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제네비브는 오웬에게 고생했다 말하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녹초가 된 상태로,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잊곤 기절하듯 까무룩 잠들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제네비브는 여느 월요일처럼 하품하는 학생들을 따라 월요일 아침 미사를 위해 신전으로 향했다. 마이언에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수도에 방문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몸이 무거웠다.

학생들이 무려 2주 만에 참석하는 미사였기에, 톰슨은 눈을 희번덕 뜨며 완벽한 미사를 만들어 내려고 했다.

안 그래도 예민한 톰슨은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상태로 신전 안을 바삐 돌아다녔다. 복장이 부적합한 학생의 이름을 알아내 미사 이후 불러내는가 하면, 성전을 받침대 삼아 몰래 작성하는 과제를 압수하기도 했다.

그런 톰슨이 이따금 너그러운 미소를 지을 때가 있었는데, 바로 개인 기도를 하는 학생들을 볼 때였다. 그리고 그가 미소를 짓는 학생 중엔 제네비브도 포함되었다.

톰슨의 미소를 보자니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제네비브는 그를 무시하며 다시 기도에 집중했다.

‘……이시스 여신님이 정말 존재한다면 제발 숙부님이 그 배에 안 타게 해 주시고, 다른 귀족들도 숙부님을 따라서 연회에 참석하지 않게 해 주세요.’

제네비브는 성호를 긋고 이시스 여신상을 올려다보았다. 당장 기댈 곳이 저 석상뿐인 제 처지가 한스러웠다. 그 누구와 나눌 수 없는 고민을 품는다는 게 이렇게 머리 아픈 일이었다니.

제네비브는 기도 내용을 조금씩 바꿨다.

아무도 죽지 않기를 기도하다가 블라이스 가문과 카터 가문의 안전을 바라기도 했고, 연회 자체가 기적적으로 취소되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불참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연회가 아예 취소됐으면 좋겠다.’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적다는 건 주최하는 입장에선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겠으나, 이게 지금 제네비브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전개였다.

인원이 부족하여 연회를 취소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다. 물론 취소한 이유를 대놓고 ‘참석 인원이 적어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무난하게 ‘황태자가 아프다’ 같은 이유로 둘러댈 거다.

‘그렇게만 된다면 소원이 없겠다, 없겠어.’

그러나 이는 지나친 비약이었고, 그 때문에 제네비브가 블라이스 백작에게 편지를 보낼 때까지만 해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연회가 취소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블라이스 백작이 최고의 결과를 가져다준다면 결과는 상상 이상으로 좋을 테니까.

‘……근데, 연회가 안 열리면 에드워드는 황태자가 못 돼.’

제네비브는 몸을 돌려 에드워드를 힐끔 봤다. 2학년 자리에 앉은 그는 무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안 죽고, 평화롭게 황자로 인정되는 방법은 없으려나.’

만약 에드워드가 평범한 방식으로 황실에 입적될 수 있었다면 그는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황태자로 인정받았을 거다.

기적적으로 선상 파티가 아무런 사고 없이 마무리되고, 에드워드가 그 파티에 참석하더라도 랜돌프 황태자가 살아 있는 한, 바뀌는 건 없다. 에드워드는 어디까지나 ‘황태자의 죽음’이라는 불운 같은 행운으로만 후계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어쩌면 에드워드가 꼭 황태자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지위 없이 1년을 더 보낸다면 굳이 여자 주인공 때문이 아니더라도 똑같은 일이 반복될 테다. 오히려 제네비브로서는 그가 괴롭힘과 무시를 2년 동안 조용히 받아 왔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차라리 같은 학년이었으면 더 나았을 텐데…….’

제네비브는 이제 자신이 2학년이 아니라는 사실마저 한스러웠다.

“하아…….”

그녀는 깊게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신전 안으로 들어온 사제는 성전을 펼치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해결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무도 죽지 않고, 에드워드도 멀쩡하게 황태자 지위를 받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미사 이후, 많은 학생이 톰슨에게 불려 갔다.

“흑흑. 이 오라비는 토미가 주는 징역 받으러 간다.”

“톰슨 성격 알면서도…… 너희도 가?”

제네비브는 우는 척하는 오웬을 무시하다가 놀란 듯 블랑카와 제임스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비교적 뒷자리에 앉았기에 제네비브는 그들마저 걸렸다는 사실을 미사가 끝나고서야 알았다.

“……정치 철학 과제 받으러 가야 해.”

“아! 읽은 것도 아니고, 잠깐 의자에 위에 올려 둔 건데. 못 본 사이에 더 극성맞아진 것 같아. 여신이 그렇게 좋으면 사제가 되지……. 진저, 우린 이만 가 봐야겠다.”

블랑카가 저 멀리서 자신을 노려보는 톰슨을 보며 말했다.

제네비브는 교복을 입은 몸뚱이 외에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신전을 나갔다.

“제네비브 선배.”

“어? 에드워드, 나 기다린 거야?”

출구엔 에드워드가 있었다. 이미 학생 대다수가 식당으로 간 덕분에 부근에 사람은 적었다.

“네. 리스톨은 잘 다녀오셨어요?”

에드워드가 제네비브의 보폭을 맞추며 물었다.

불편한 미래가 이렇게 훅 들어올 줄 몰랐기에 제네비브는 조금 당황하다가 말했다.

“생각보다 복잡했어. 리스톨 방문은 처음이라……. 오웬이 없었다면 지금 겨우 에비뉴에 도착했을 거야.”

농담을 들은 에드워드는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제네비브는 맑게 웃는 그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상 파티 준비는 어때?”

어제처럼 노골적으로 묻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제네비브는 가볍게 떠본 다음, 에드워드의 표정을 읽어 내는 데 집중했다.

“준비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요. 저녁에 출발하는지라……. 연회 당일에 열차를 타고 리스톨에 가려고요.”

짤막한 문장에는 기쁨과 설렘이 묻어났다. 에드워드가 기뻐할수록 제네비브는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가 연회에 가지 못하게끔 하는 방법은 많았다. 귀족 절반이 못 가도록 막는 것에 비하면 도리어 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극단적으로는 너 같은 사람과 황실 연회는 안 어울린다는 인신공격부터, 염려하는 척하는 설득까지.

‘내가 얘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저 상상만 한 건데도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역해졌다. 제네비브는 그런 말을 에드워드에게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아. 그리고 블라이스 가문이 너를 챙길 것 같은데, 괜찮아? 숙부님이 안 계셔서 확답은 못 받았지만…… 그래도 휴고한테 말해 뒀거든. 참, 휴고는 오웬의 형이야.”

때문에 제네비브는 미안함에 더욱 밝은 목소리로 이 사실을 알렸다.

한편으로는 에드워드가 연회에 참석하지 않기를 누구보다 바라면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제 모습이 웃겼다.

“저는 좋아요.”

에드워드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나는 또 할 일이 있지.’

제네비브는 예쁘게 미소를 짓는 에드워드를 보며, 블라이스 백작의 편지가 올 때까지 마저 끝내야 하는 일을 떠올랐다.

‘밀포드가 누군지도 알아내야 해.’

정말이지, 처리할 일이 많았다.

* * *

지난주에 마치지 못한 ‘밀포드 찾아내기’를 재개한 것도 어느덧 나흘째였다. 제네비브는 프란시스 부인의 눈초리를 받으며 밀포드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도서관에 있는 황실과 관련된 책을 전부 읽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읽은 책이 산처럼 쌓이는 것과 다르게 단서가 될 만한 건 없었다.

황실 족보를 달달 외울 정도로 책을 읽고, 평생 활용할 일 없는 아본리아 귀족 가계도까지 숙지했지만, 밀포드는커녕 ‘밀’ 자도 안 나왔다.

결국, 제네비브는 결론을 내렸다.

‘나흘 동안 팠는데도 나오는 게 없는 걸 보면, 밀포드는…….’

주야장천 읽었는데도 단서가 없다는 건 셋 중 하나였다.

‘밀포드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거나, 집사처럼 힘은 존재하되 작위는 없는 인물이거나, 음지의 인물이거나.’

제네비브로서는 원작 서브 남주의 주변 인물로 추정하고도 있었기에, 그런 밀포드가 전자라면 안심할지언정 실망할 것 같았다.

“집사는 절대 아니지. 세상 어떤 집사가 여름대회 때 귀빈석에 앉아.”

집사가 아무리 고소득층이라 해도 결코 귀빈석에 앉을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밀포드가 들고 다니던 사치스러운 지팡이와 차림새를 떠올려 보면 집사일 리 없었다.

밀포드가 음지의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린 후, 제네비브는 읽던 책을 덮었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알아내는 데 양지에서 출판되는 책을 읽는 건 무용지물이었다. 제네비브가 책을 읽으며 얻은 거라고는 각 가문의 성향과 지식인이 내놓은 여러 정책밖에 없었다.

제네비브는 나흘의 시간 낭비를 공부라고 생각하며, 오웬이 밀포드를 처음 봤을 때 내놓은 반응을 되새겼다.

‘……무슨 일로 저 사람을 알고 싶은 건지 몰라도, 손 떼.’

‘가문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맹세해. 절대로 저 사람에 대해 알아보지 않겠다고.’

놀라는 일이 거의 없던 오웬이 놀라고, 매사 가볍게 말하던 그가 처음으로 낮은 목소리로 밀포드에게 관심을 끄라고 하는 모습.

오웬이 알아볼 정도면 엄청난 사람이 맞다.

‘이런 걸 읽을 게 아니지.’

음지는 음지에서 찾아야 하는 법.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밀포드에게 지금 내가 네 뒤를 캐고 있다며 공개하는 꼴이다.

‘막말로 무슨 어둠의 집단 수장이면 어떡해.’

제네비브는 꺼낸 책들을 제자리에 꽂으며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숙부님 답장이 올 때도 됐는데…….”

제네비브는 마지막 책까지 책장에 꽂은 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화요일에 돌아온다고 했으니 늦어도 수요일에 보낸다면 도착할 때도 되었다. 카르디르에서 오는 편지도 사흘이 안 걸리는데, 리스톨에서 오는 편지가 이렇게 늦을 일 없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제네비브는 아침에 온 편지들을 재차 확인했다.

‘저택, 엄마, 고모, 아빠…….’

제네비브는 발송인의 이름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졸업 시험을 3주 앞둔 지금, 기숙사로 오는 편지가 부쩍 많아졌다. 제네비브는 ‘졸업 시험 준비하느라 고생한다’라는 내용의 편지들을 넘기며 블라이스 백작의 편지를 찾았다.

“설마, 오웬한테 갔나?”

그렇다면 설명이 된다. 오웬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답은 한 달이 걸리면 그나마 짧을 정도로 그는 편지 확인을 안 했다.

제네비브는 생각을 떠올리기 무섭게 오웬의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뭐, 뭐야? 제네비브? 어떻게 들어왔어?!”

“너, 문 안 잠그고 살잖아. 나한테 편지 온 거 있어?”

“확인 안 해서 모르겠는데…… 편지는 저기, 책상 위에 있어. 근데, 왜 편지를 나한테 찾아?”

오웬이 가리킨 책상 위엔 역시나 편지로 가득한 박스가 있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오늘과 어제 온 편지는 가장 윗줄에 있다고 덧붙였다.

“숙부님 답신이 올 때도 됐는데 아직도 안 와서. 혹시 너한테 왔을지도 모르잖아.”

제네비브는 대답하며 편지 더미를 뒤졌다.

“나도 한 장 주라. 오랜만에 연락 좀 봐야지.”

제네비브는 대충 맨 위에 있는 편지를 오웬에게 던졌다. 오웬은 그걸 한 번에 잡고, 편지를 개봉해 내용을 읽어 갔다.

“휴고에게 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기꺼이 그 에드워드라는 친구를 챙기겠다. 잘됐네~”

마침 블라이스 백작이 보낸 편지였다. 제네비브는 오웬이 편지의 상당 부분을 생략하는 걸 들으며 계속 편지를 찾았다.

[제네비브 달링에게]

아니나 다를까, 편지는 오웬에게 도착해 있었다.

발송인이 ‘블라이스’로 되어 있던 탓에 오웬의 방에 온 것 같았다. 다행히 오웬이 읽은 흔적은 없었다.

제네비브는 떨리는 마음으로 실링 왁스를 뜯었다. 이렇게 긴장됐던 게 얼마 만이더라. 3년 전, 마이언 아카데미의 통지서가 왔을 때보다 더 긴장이 됐다.

[제네비브 달링에게,

편지는 잘 읽었단다. 무슨 이유로 이번 크루즈 여행을 걱정하는지 모르겠지만, 정당한 이유 없이 네 말을 무작정 따르기엔 어렵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곧 졸업 시험이라는 걸 들었단다.

잘하고, 졸업 뒤에 보자꾸나.

필립 블라이스 백작.]

“…….”

정중한 동시에 엄한 답이었다. 형식을 따른 편지는 숨겨진 의미 따위가 없음을 알렸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잠시나마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자신이 우스워졌다. 도미노처럼 황실 파티가 취소되는 건 영영 일어나지 않겠구나.

“뭐라고 보내셨어?”

“……비슷해, 걱정하지 말라고.”

제네비브는 대충 얼버무렸다. 다행히 오웬은 그저 제 아버지가 왜 같은 내용을 굳이 두 번 썼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 갈게.”

제네비브는 편지를 구기며 오웬의 방 밖을 나갔다.

그녀는 곧바로 에드워드의 기숙사를 찾아 문을 두들겼다.

“에드워드, 안에 있어?”

제네비브는 긴박한 목소리로 에드워드를 불렀다.

계획이고 나발이고, 이젠 그럴 시간이 없다. 일단 자신이 배에 타야 했다.

“……제네비브 선배? 여기서 무슨 일이세요?”

그의 목소리는 방 안에서가 아닌, 뒤쪽에서 들렸다.

“에드워드!”

제네비브는 그를 평소보다 반갑게 맞이했다.

에드워드가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입을 뗐지만, 더 빠른 건 제네비브 쪽이었다.

“그 크루즈 여행 말이야, 나도 데려가 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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