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70화
평소의 제네비브라면 이런 선택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테다.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않을 미친 짓이었다.
시험 기간인 걸 고사하더라도 초대 받지 않은 연회에 대뜸 찾아가는 것만큼 무례한 행동도 없었다.
물론 편지에는 한 명과 동반 입장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제네비브 같은 유학생을 염두에 둔 건 아닐 테다.
초대 받지 못한 아본리아 귀족을 샤프롱으로 대동하는 거면 모를까, 눈치 없이 학교 선배를 데리고 갔다간 제네비브나 그녀를 데리고 온 에드워드 모두 욕먹는 짓이었다.
하지만, 지금 들이닥친 상황은 이 모든 걸 고려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친인척이, 친구의 가족이, 그리고 에드워드가 죽을지도 모르니까.
“…….”
더불어 제네비브는 이 선택이 제게도 위험하다는 걸 잘 알았다.
아무리 소설을 읽었고, 미래를 알고 있다 해도 제네비브는 신이 아니다. 그녀에겐 갑자기 날뛰는 해류를 멈출 힘이나 비를 그치게 할 능력은 없었다.
‘그래도 크루즈에 타야 뭐라도 할 수 있어.’
방관자처럼 손을 놓고만 있을 수 없었다.
모르고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보다 알고 있으면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어날 일을 아는 제가 크루즈에 타는 것으로 작은 기적이 일어나진 않을까.
“……네?”
두 눈을 끔뻑거리던 에드워드는 마침내 그녀의 말을 이해했는지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되물었다.
방 앞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만 해도 당황스러웠을 텐데, 자칫 무례하게 들릴 법한 부탁까지 하고 있으니 그의 입장에선 황당하기 짝이 없을 거다.
“나도 크루즈 타 보고 싶어서.”
제네비브는 치솟는 자괴감을 억누르며 더욱 뻔뻔하게 말했다.
최대한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나서야 차라리 당일에 무작정 따라나서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막심한 후회가 들었다.
모두가 죽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굳었던 머리가 이제야 굴러가기 시작했다. 뒤늦은 후회였지만, 방법이 다를 뿐 어차피 에드워드를 따라가야 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에드워드가 거절하면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하던 차, 그가 입을 열었다.
“저야 상관없는데…… 선배야말로 괜찮아요? 그때, 시험 기간으로 알고 있는데.”
에드워드가 염려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행히 에둘러 거절하는 것처럼 들리진 않았지만, 그의 질문은 정곡을 찔렀다. 어떤 정신이 나간 학생이 시험 기간에 놀러 수도까지 갈까.
“괜찮아! 금요일 저녁에 출발해서 일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이니까. 월요일 시험은…… 자신 있는 과목이기도 하고. 수도에 갔을 때, 다들 선상 파티 얘기만 해서 너무 궁금해진 거 있지.”
찔린 게 있는 사람처럼 혀가 길어진다.
“그리고…… 이기적인 이유도 있는데, 졸업하면 한동안 아본리아에는 못 오니까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 하나 만들어 가고 싶거든. 그간 너무 학교생활만 해 와서.”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학교 행사를 제외하면 3년 동안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틀어박혔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그렇다고 내내 외출을 안 한 건 아니고 좋은 추억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려운 부탁해서 미안해.”
제네비브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에드워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넋을 놓은 듯,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그럼, 금요일 시험 끝나고 같이 갈까요?”
다행히 허락이었다.
“너무 고마워!”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에드워드의 동의가 떨어졌으니, 이제 달링 가문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크루즈에서 할 계획을 세우는 일만 남았다.
“선배와 같이 가게 되어서 기뻐요.”
그때, 나직하게 들려온 에드워드의 한마디가 정신없이 계획을 세우는 제네비브의 머릿속을 멈췄다.
에드워드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제네비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
기실 에드워드의 첫 황실 연회를 망치러 가는 건데, 그가 이렇게 기쁘다는 듯 반응하니 왠지 모르게 미안해졌다.
제네비브는 머쓱함에 시선을 돌리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탈퇴 신청서네? 해결한 거야?”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들고 있던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뇨, 아직 못했어요. 그래도 감독님께 직접 말하는 게 예의 같아서요.”
어색하게 돌린 주제였지만, 에드워드는 고맙게도 그녀의 대화를 받아 줬다.
“감독님도 제가 탈퇴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더라고요. 학기 말까지 생각하고, 그때도 똑같으면 코치님을 설득해서 탈퇴 처리해 주겠다고 하셨어요.”
“훈련은 계속 안 나가도 되는 거고?”
“네.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라면서요.”
클럽 관계자가 이렇게까지 학생을 붙잡는 경우는 처음 본다. 귀족 출신의 학생이야 가문이 주는 지원금이 아쉬워 말리는 이유가 투명하지만, 에드워드를 이렇게까지 붙잡는다는 건 그의 실력이 탁월하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니까 황실 초대를 받은 거겠지.’
제네비브는 착잡한 마음으로 에드워드의 반쪽짜리 탈퇴를 축하했다.
이후, 제네비브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 달링 가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식사에서 친구들에게 선상 파티를 참석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너도 간다고?”
오웬이 안 믿긴다는 듯 되물었다.
“응.”
제네비브의 대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웬은 똑같은 질문을 계속했다.
“장난치지 마~ 제네비브, 네가 시험 전날에 외출을 한다고?”
“진짜 간다니까.”
“……정말?”
“정말.”
오웬은 제네비브가 성가시다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나서야 그 말을 믿었다.
“지금 내 눈앞에 제네비브가 시험 2주 전에 내가 리스톨 좀 간 걸로 잔소리한 그 제네비브랑 같은 사람이 맞기는 한 건지…….”
“그때 네가 유급할 뻔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제네비브. 노파심에 물어보는 건데, 우리 금요일에 시험이 끝나는 게 아니라 월요일에 하루 더 하는 거 알고는 있지?”
제임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연회에 가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물론 진저, 네가 알아서 잘하는 건 알지! 근데, 졸업이 걸린 시험이니까…….”
제네비브가 오직 졸업을 목표로 칼리지에 다녔다는 건 모두가 알았다. 그러니만큼 ‘시험 전날에 다른 지역에서 놀다 온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다들 믿기 힘든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머리 식힐 겸 가는 거지…….”
제네비브는 여상하게 말했지만, 친구들의 반응을 보니 부모님이 허락하실지가 걱정이 됐다.
‘허락 안 한다고 안 갈 내가 아니지만.’
제네비브는 눈앞에 놓인 토마토를 푹 찔렀다.
“후배님이 걱정이면 블라이스 가문이 잘 챙길 거야. 네가 공부할 시간을 반납할 필요는 없어.”
“숙부님을 못 믿는 게 아니라―.”
다들 죽게 생겨서 구하러 가는 거라고.
제네비브는 마지막 말을 삼킨 다음, 다른 말을 이어 갔다.
“정말 가고 싶어서 그래. 내가 언제 또 이런 연회를 가 보겠어.”
제네비브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리고, 시험은 정말 괜찮아. 월요일 시험이 역사랑 정치 철학에, 또 뭐가 있었더라?”
“지리학.”
“그래, 지리학. 세 과목 다 쉬운 과목이잖아. 교수님들이 깐깐한 것뿐이지, 점수는 후하게 주는 편이고. 그래도 부족하면 가산점으로 메우면 돼.”
부모님께 보낸 편지를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채워서인지 말은 쉽게 나왔다. 제네비브가 월요일 시험들을 상세히 분석하고 나서야 셋은 어느 정도 납득한 것처럼 보였다.
지금 세 사람의 눈에서 자신이 대체 어떻게 보이는지 몰랐지만, 제네비브는 부디 친구들과 부모님의 생각이 일치하기를 바랐다.
* * *
하루는 대체로 무난하게 흘러갔다.
학기 막바지에 도달한 지금. 3학년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대신, 기존에 배웠던 내용을 복습하거나 대부분 자습 시간을 가졌다.
지리학 담당 교수인 샐리 교수 역시 다른 교수들처럼 자습 시간을 주고는 제 할 일을 했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와 팔락이는 종이 소리가 가득한 교실에서 제네비브는 지난 일주일간 자습 시간 동안 그랬듯, 크루즈 여행 때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크루즈 침몰에 대해 아는 게 많을수록 좋겠지만, 제네비브가 아는 건 침몰한 원인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기상 이변과 바뀌는 해류.’
여자 주인공 위주로 흘러가던 소설답게 크루즈 침몰은 당시의 상세한 묘사 대신 조연의 입에서 전해지는 걸로 간결하게 서술되었다.
돌이켜 보면 ‘에드워드가 황태자가 된 계기 역시 다른 사람의 죽음이다’라는 묘사로 그가 흑막이라는 밑밥을 깔았던 것 같다.
‘참 나. 에드워드가 크루즈에 탄 사람들을 죽인 것도 아닌데.’
물론, 원작에 따르면 일 년 뒤에 학생 다섯 명을 손수 죽이고, 학교를 불태우면서 전교생이 죽긴 하지만…… 어쨌든 그건 에드워드가 억울할 만한 부분이었다.
‘적어도 언제 침몰하는지 알면 대비하기 편할 텐데.’
제네비브는 지리학 교재를 뒤적이며 생각했다. 이어 리스톨을 설명하는 단원에 시선을 멈추곤 고개를 괴었다.
‘크루즈 타자마자 누가 폭약을 설치한 걸 봤다고 얘기해?’
참사는 안 일어나겠지만, 잡혀갈 게 분명하다.
마땅한 해결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제네비브는 황태자를 바닷속에 밀어 버리는 것까지 상상하다가 제 뺨을 때리고는 교재에 시선을 돌렸다.
[리스톨은 해안 도시로 무역의 중심지다. 리타스해는 가장 얌전한 해양 중 하나며, 리스톨 항구는…….]
“……리타스해.”
제네비브는 침몰 당시 아는 정보에서 바다 이름을 추가했다.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왔지만, 제네비브는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커다란 상자가 방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보냈네.”
제네비브는 편지와 소포에 적힌 ‘레베카 달링’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소포를 방 안으로 밀어 넣고선 그 위에 올려 둔 편지부터 읽었다. 자그마치 10페이지나 되는 편지는 편지라기보단 종이 더미가 더 맞는 표현이었다.
아무튼 이 편지는 아니나 다를까, 달링 후작부인의 염려 섞인 말로 시작되었다.
‘그다음 날이 시험인데 무슨 생각이냐’라는 걱정 섞인 타박은 5페이지 즈음에선 ‘네가 어련히 잘하겠지’로 바뀌었고, 8페이지 정도 되자 남동생, 그러니까 블라이스 백작에게 말을 잘해 뒀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마지막 장은 보낸 옷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달링 후작부인은 리스톨에 가는 동안 그 옷을 입으라고 강조했다), 제네비브에게 보낸 것처럼 에드워드에게도 편지와 소포를 보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옷이나 연회 동안 필요한 물건은 블라이스 가문에서 해결해 줄 테니, 따로 짐을 챙기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추신: 우리 제네비브가 알아서 잘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엄마는 걱정이 된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네 아버지는 돌아와서 선상 파티가 어땠는지 말해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단다.
조심히 잘 다녀오렴.]
제네비브는 편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을 읽었다.
달링 후작부인이 보낸 상자를 열자, 편지 한 장과 함께 고급스러운 재질의 외출복이 그녀를 반겼다. 아본리아에서 유행하는 복식을 그대로 따라간 외출복이었다.
다시 말해, 유행을 따라가다 도리어 눈에 띄지 않는 옷이었다. 그녀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짧은 시간 동안 급하게 준비한 티가 났다.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던지, 달링 후작부인은 그 옷 위에서도 해당 사실을 언급했다.
[크루즈에선 블라이스 백작부인이 주는 옷으로 갈아입으렴.]
모친의 엄한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카르디르에서 찾기 어려웠을 텐데…….’
제네비브는 특색 없는 외출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못 막으면…… 엄마도 가족을 잃게 되겠지.’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크루즈 침몰을 막아야 했다.
달링 후작부인의 편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너무나 간단한 해결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