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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72화 (72/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72화

제네비브는 통치학 답지를 제출하고서야 찌뿌둥한 허리를 폈다.

아직 시험이 남았지만, 어쩐지 시험이 끝난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했다. 이틀 연속 하루를 전부 시험장에서 보낸 학생들 또한 손목을 움직이거나 목을 굴리며 굳은 몸을 풀었다.

“신이시여, 저희에게 주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험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는 여론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학생들은 그저 자신들에게 복습할 시간이 충분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3학년들은 기숙사로 돌아가며 오늘 치른 시험에 관해 제각기 의견을 내세웠다. 쉬웠다며 거들먹거리는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면 대부분 높은 난도에 불만을 표출하며 가산점의 존재를 감사하게 여겼다.

“뭔가 쓰긴 썼는데, 제대로 쓴 게 맞는지 모르겠다~”

“나, 문학 답 쓰다가 중간에 쥐 나서 다 못 쓸 뻔했잖아. 시험이 하루 더 있다는 게 거짓말이었으면…….”

오웬의 말에 블랑카가 손가락을 꺾으며 말했다.

“그래도 오늘이 어제보다 낫지. 문학은 족보가 없었으면 분명 망쳤을 거야. 블랑카, 엘레노어 선배한테 고맙다고 전해 줘.”

제임스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제네비브는 작게 동조하는 걸 제외하면 입을 다물었다.

“제네비브, 넌 아직도 그 미신을 믿어?”

“응. 점수 나오면 어땠는지 말해 줄게.”

그 이유인즉 제네비브가 굳게 믿는 미신 때문이었다. 제네비브는 중요한 시험의 난이도에 관하여 제 생각이나 예상 점수를 말하면 시험이 망한다는 미신을 갖고 있었다.

시험이 쉬웠던 것과 별개로 다섯 페이지나 되는 분량을 세 번 쓰는 일은 제네비브에게도 고문이었다. 힘이 쭉 빠진 상태로 리스톨에 가고, 선상 파티를 무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체력이 고갈되는 기분이었다.

“주말에는 좀 쉬고 싶어…….”

제임스의 진심 섞인 말에 모두가 공감했다.

“월요일 시험이 끝나면 자유라는 것만 생각하자. 우리, 이번에도 졸업 파티하겠지?”

“안 할 리가 있겠어~ 아, 파티 하니까 궁금한 게 떠올랐는데 제네비브, 너 크루즈에 가서도 공부할 거야?”

제네비브의 유별난 주말 계획을 떠올린 오웬이 물었다.

“……응.”

계획대로만 된다면 크루즈에 있는 시간보다 기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겠지만, 제네비브는 말을 덧붙이는 대신 가만히 웃어 보였다.

기숙사로 돌아온 제네비브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얼마 전에 구매한 화약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이젠 정말 정신 차리고 행동해야 해.”

낡은 주머니를 보자니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무릇 사람이라면 이 상황이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해선 안 된다. 이 일을 저지른 사람이 자신이란 게 밝혀져선 절대 안 되었다.

구매하자마자 물에 적셔 놓았기에 화약은 그 즉시 불량품이 되었다. 제네비브는 연회와 어울리는 비단 주머니에 화약 가루를 옮겨 담은 뒤, 일이 계획대로 잘 풀리기를 기도했다.

“변수 없이 잘 해결되었으면…….”

설령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제 통제하에 해결될 만한 일이길 바랐다.

이후, 제네비브는 서랍을 닫고 달링 후작부인이 보낸 옷으로 갈아입었다.

“…….”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였다.

별다른 손질 없이 길게 늘어트린 금색 머리카락과 유행을 따라간 폭 좁은 치마는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았다. 흰 장갑과 다이아몬드 귀걸이까지 끼고 나서야 제네비브는 얼추 귀족처럼 보였다.

“가서 결혼 상대를 찾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어차피 30분도 안 되어서 해산될 테니까.

제네비브는 노트 몇 권과 화약을 챙긴 후, 방 밖으로 나왔다. 저녁 시간이 다가와서인지 복도는 한산했다.

“오셨어요?”

에드워드는 휴게실 입구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링 후작부인은 에드워드에게 제복처럼 화려한 연회복 대신, 보기 좋은 검은색 조끼와 외투를 보냈다.

도련님들이 입을 법한 옷은 에드워드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오웬과 제임스가 종종 저렇게 입곤 했기에 제네비브에게도 눈에 익은 구성이었지만, 에드워드는 그 두 사람과는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역시 잘 어울리네. 크라바트만 조금 조정하면 되겠다.”

완벽한 모습에 유일한 흠이 있다면, 그건 왼쪽으로 살짝 치우친 크라바트였다.

“이렇게요?”

제네비브의 말을 들은 에드워드가 곧장 크라바트를 당겼다.

“아! 그러면 더 망가져!”

재빨리 그를 말렸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큰 손이 흰 천을 휘젓자 매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가 해 줄게.”

제네비브는 책을 탁자에 내려놓곤 그의 목을 감싼 흰색 천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이에 에드워드는 자연스럽게 몸을 숙여 줬다.

제네비브는 천이 묶였던 자국을 따라, 몇 년 전에 배웠던 대로 크라바트 매듭을 지었다.

순간 느껴지는 시선에 살짝 올려다봤을 때, 저를 바라보는 연갈색 눈이 코앞에서 보였다. 제네비브는 놀란 티를 지우며 황급히 크라바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

이젠 다른 의미로 긴장이 되었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제네비브는 입을 꾹 다문 채, 재빨리 매듭을 마무리 지었다.

“자, 다 됐어.”

제네비브는 마지막으로 크라바트 끝을 당기며 주름진 곳을 폈다.

“그럼…… 출발할까?”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에게서 한 걸음 떨어지며 뻣뻣하게 말했다.

“리스톨에 도착하면 스테판이 있을 거라고 했지?”

달링 후작부인의 편지와 소포가 도착하고 그다음 날, 블라이스 가문에서 보낸 편지가 제네비브와 에드워드에게 각각 도착했다.

“네. 스테판 씨가 마차까지 안내해 주신다고……. 그리고, 열차는 여섯 시 반에 출발한대요. 표는 마차에서 드릴게요.”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두고 간 공책을 챙기며 말했다.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간 시험 준비로 바빴던 제네비브를 대신하여, 에드워드가 리스톨까지 가는 모든 일정을 홀로 챙겼다.

밖으로 나오자, 두 사람을 기다리는 교내 마차가 보였다. 제네비브가 마차 안으로 올라타려던 찰나, 흰색 장갑을 낀 손이 시야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늘 해 왔던 것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고마워.”

제네비브는 작은 웃음을 짓고는 에드워드의 손을 잡았다.

장갑 너머로 온기가 느껴졌다.

누구 것인지 모를 손끝이 뜨거웠다.

제네비브가 그의 손을 받침대 삼아 마차에 오를 때, 에드워드는 손에 힘을 줘 그녀가 편하게 올라탈 수 있게끔 도와줬다.

‘크루즈에 타자마자 화약을 뿌리는 거야.’

마차에 탄 제네비브는 머릿속으로 크루즈에 탄 이후 상황을 상상했다. 화약 주머니를 든 손에 유독 힘이 들어갔다.

블라이스 가문이 보낸 편지에는 연회 일정도 간략히 적혀 있었는데, 황실 연회라고 다를 건 없었다.

선상 파티는 다른 연회가 그렇듯 밤에 시작해 새벽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연회는 거의 배에 탑승하자마자 진행되기 때문에 탑승한 순간이 곧 기회였다.

“……선배가 말하는 모습,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말을 안 했던가?”

마차에서 한동안 이어지던 긴 침묵은 에드워드가 깼다. 그의 뜬금없는 말에 제네비브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말수가 줄어들던데요. 그러고 보니, 시험은 잘 보셨어요?”

시험보단 크루즈 여행이 그 이유였지만, 제네비브는 바로잡는 대신 그가 궁금한 사항에 답해 주었다.

“생각보다 쉬웠어. 사실, 이런 말 하면 시험 망치는 게 내 징크스인데…… 지금 그게 처음으로 미신처럼 느껴질 만큼 자신 있거든.”

제네비브는 농담을 섞어 가며 말했다.

“1학년 때 성적 자랑하고 다니다가 이름을 써서 망쳤었어. 왜,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선 배부 받은 번호만 써야 하잖아? 헤더스 교수님이 봐주셔서 낙제는 면했었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탓에 제네비브의 안색은 조금 창백해졌다.

“에드워드, 너는 혹시 징크스 있어?”

“……저한테 있어서 좋은 일은 항상 안 좋은 일의 전조예요.”

에드워드는 길게 생각한 뒤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해요.”

“…….”

“곧 나쁜 일이 생기겠지, 이건 또 없는 일이 되겠지, 하고요.”

에드워드가 여상하게 말했다.

“뭔가 항상 제 잘못으로 꼬이거든요. 제가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도 몰랐네요……. 너무 무거운 얘기였나요?”

‘비가 올 때마다 우산을 안 챙긴다’ 정도의 답을 생각했지, 설마하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다.

“일이 안 풀리는 게 왜 네 탓인데!”

제네비브는 황당하다는 듯 따졌다.

그런 생각을 하는 에드워드가 안타까웠다. 그의 삶이 어둡다는 건 충분히 알지만, 그가 비난하는 대상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에드워드, 정말 중요한 얘기니까 잘 들어야 해.”

제네비브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원래 삶이 다 그런 거래. 좋은 시기가 있으면 힘든 시기가 있는 거고, 힘든 시기가 있으면 좋은 시기도 있는 거고.”

“…….”

“좋은 일이 있으면 기쁘게 받아들이고, 시련은 더욱더 단단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정말 거지같이 힘들 때도 있을 건데, 그 뒤에는 더 좋은 일로 보답 받게 될 거야. 어떻게 사람이 평생 행복하고, 평생 불행하게 살아. 그리고, 일이 안 풀릴 때는…….”

“…….”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세상이 잘못한 거야. 알겠지?”

제네비브는 그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네.”

에드워드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듣고서야 제네비브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열차에서 노트를 펼쳐 복습에 매진할 거라는 계획과 달리,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와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 크라바트 매는 건 어떻게 배우셨어요?”

“몇 년 전, 신부 수업에서…….”

제네비브는 말을 흐렸다.

익히 약혼 이야기를 들었으니 신부 수업을 받았다는 것 또한 숨길 사실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에드워드에게 말하는 건 꺼려졌다.

“그런데, 너는 리스톨에 자주 가는 편이야?”

제네비브는 어색하리만큼 급하게 주제를 돌렸다.

“……어렸을 때 한 번 가 봤어요.”

“그럼 너도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겠네.”

“그런 셈이죠.”

리스톨행 열차는 언제나처럼 두 시간 운행 뒤, 목적지에 도달했다. 에드워드가 어린 시절의 방문과 지금을 비교할 시간도 없이 두 사람은 재빨리 스테판을 찾았다.

“4번 정거장에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왜 아무도 없지?”

스테판이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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