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73화
만나기로 한 사람이 약속 장소에 없는 건 에드워드에게 있어 곤란한 일이었다.
아무렴, 처음으로 받은 황실의 초대다.
에드워드는 이번 연회를 기회로 만들어야 할 수도,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니만큼 첫 단추부터 꼬이니 조금 짜증이 났다.
“하아…….”
“…….”
만약 그 옆에 서 있던 제네비브가 더 화내지 않았다면 말이다.
제네비브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기 무섭게 후회하듯 웃어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그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훨씬 당황한 게 눈에 훤했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애써 침착하게 의견을 꺼냈다.
“조금 더 기다려 볼까요?”
“……그래.”
기실 기다릴 여유는 있었다. 크루즈는 아홉 시에 떠난다. 에드워드가 알기로는 마차만 탄다면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제안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제네비브는 기차역을 둘러보았다. 급기야 에드워드를 승강장에 남겨 두고는 기차역을 둘러보려고 했다.
“스테판이 늦을 리가 없는데……. 한 시간 일찍 도착한 거면 몰라.”
작게 중얼거리는 제네비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란 뒤통수를 보며 따라가던 에드워드는 잠시 기차역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이곳만 해도 어렸을 적에 본 것과 많이 바뀌긴 했다. 그때는 승강장이 하나만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복잡한 기차역이 되었다.
높은 유리 천장 너머로 바깥 하늘이 보였다. 주황빛 노을 뒤로 어둑하게 깔린 하늘은 역 안을 어둡게 만들었다.
어둠이 내리쬐자, 기둥마다 있는 가스등이 천천히 빛을 밝혔다.
“왜 없어…….”
그때, 익숙하면서도 처음 듣는 목소리가 에드워드의 주의를 다시금 ‘스테판 찾기’로 돌렸다. 목소리는 어딘지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제네비브가 그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에드워드의 몸은 반사적으로 굳었다. 제가 그 이유가 아닌 걸 알면서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터벅거리는 그녀의 작은 발걸음 소리에선 초조함이 묻어났다.
마지막 기차가 떠나니 인파는 점점 줄어들었고, 에드워드는 어딘지 다급하게 들리는 발소리가 결코 제 착각이 아님을 알았다. 지금, 제네비브는 애써 침착한 척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초조한 걸까?
이런 파티 즈음이야 카르디르에선 질릴 정도로 초대를 받았을 사람이다. 그런데 제네비브는 저보다 더 선상 파티에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니, 마치 가야만 하는 사람 같았다.
“제네비브 선배, 저는 안 가도 괜찮아요.”
그녀의 초조함에 제 비중이 어느 정도 있을 거라고 판단한 에드워드는 부담을 덜어 주고자 말했다.
물론, 실망스럽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의 삶에서 이보다 더 실망스러운 일은 셀 수 없이 많았고, 제네비브와 함께 리스톨에 온 추억이 생겼으니 그렇게 나쁘다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불안한 녹색 눈이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떼려다가 이내 다시 꾹 다물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대화를 나눴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지금의 제네비브는 연회에 못 가서 아쉽다 정도로 가볍게 표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연회에 못 가는 걸 염두조차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스테판은 안 올 것 같아. 우리끼리라도 가자.”
시간이 지났음에도 스테판이 나타나지 않자, 제네비브는 기다리는 걸 재빨리 포기했다. 그녀는 역을 나오자마자 말이나 마차를 빌리기 위해 인근을 절박하게 돌아다녔다.
에드워드는 길을 가로지르는 트램을 제대로 감상하기도 전에 제네비브를 따라 마차 대여점에 방문하기도 했고, 사람 많은 곳을 찾아가 말을 빌려줄 사람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공교롭게도 가까운 마차 대여점은 남은 마차가 없어 불가능했다.
“어쩌면 저곳에 빌려줄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에드워드는 식당 앞 펜스에 묶인 말을 보며 물었다. 두 사람은 그 즉시 식당 안으로 들어가 말을 빌려줄 사람을 찾았다.
제네비브에게 낙점된 사람은 자신을 ‘척’이라고 소개한 남자였는데, 술에 취해 얼굴이 붉었다.
배불뚝이 남자는 제네비브가 끼고 있는 다이아몬드 귀걸이 한 짝을 대가로 부탁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지만 제네비브가 협상할 시도조차 안 하고 쉽게 응하자, 그는 한껏 신나서 취한 상태로 저를 따라오라 말했다.
“내가 앞에서 몰 테니까, 네가 뒤에서―.”
제네비브가 바쁘게 고삐를 풀어내며 말했다.
“이봐, 카르디르 아가씨. 먼저 값부터 줘야지. 귀걸이, 빨리 내놔.”
“……선배.”
“왜?”
에드워드는 조심스레 거래에 끼어들었다. 말을 빌려줄 사람을 찾는 데는 성공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버렸다.
“벌써 45분이에요.”
“…….”
귀걸이를 빼내는 움직임이 느려졌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 거예요.”
제네비브는 고개를 치켜들어 광장 시계를 바라보았다.
8시 45분.
도착했을 때, 이미 크루즈는 떠났을 거다.
“……늦었구나.”
제네비브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늦었어.”
허탈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 말을 끝으로 제네비브는 더 말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의지를 잃은 사람처럼 그저 서 있기만 했다.
“아가씨, 말 안 타? 말 필요 없어?”
그때, 남자가 제네비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제네비브는 남자가 밀치는 대로 흔들릴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 씨……. 사람을 이딴 식으로 무시해?”
술에 취한 남자가 제네비브를 향해 삿대질했다. 와중에 그의 기분 나쁜 시선은 제네비브의 귀걸이에 향해 있었다.
자격 없는 행운을 놓칠 수 없다는 듯, 남자는 결국 귀걸이로 손을 뻗으려 했다.
“이게!”
“아저씨.”
에드워드는 곧장 제네비브에게 손을 대려는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윽,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래도 사람을 때리시면 안 되죠.”
남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에드워드가 손을 떼자, 남자는 욕하며 허둥지둥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선배, 괜찮아요?”
“…….”
“제네비브 선배?”
제네비브는 여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우선 늦었으니까, 잘 곳부터 찾아요.”
크루즈에 탔다면 걱정하지 않을 문제였지만, 마지막 기차마저 떠났으니 칼리지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야겠지.”
제네비브는 짧게 대답했다.
에드워드는 밤을 보낼 곳을 찾았다. 저야 어떻든 상관없었지만, 제네비브를 밖에서 재울 수 없었다.
제네비브는 공허한 눈으로 그를 쫓아갔다. 에드워드는 그런 그녀를 걱정하며 그녀가 편하게 여길 법한 중심지의 고급 호텔 위주로 방을 찾아봤다.
마차가 아닌 두 발로 걸어 들어온 두 사람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직원의 시선이 읽혔지만, 그들은 딱히 제네비브와 에드워드의 출입을 제지하지 않았다.
“남은 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지만, 꽉 찼습니다.”
그러나, 사교 시즌에 성수기까지 겹친 탓에 찾아간 모든 호텔은 마차 대여점과 마찬가지로 남은 방이 없었다.
모든 호텔에게 거절당한 에드워드의 눈에 띈 건, 고급스러운 건물 사이에 자리 잡은 한 낡은 여관이었다.
<매디슨 호텔>
허름한 간판이 낡은 여관의 이름을 알렸다.
다행스럽게도 제네비브는 아무런 불평 없이 그를 따라왔다. 하지만, 이 점이 오히려 에드워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제네비브는 이곳까지 오며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선상 파티에 못 간 것에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아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걸까.
“남은 방이 있나요?”
“있습니다.”
“…….”
하룻밤을 보낼 곳이 있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제네비브가 이곳을 만족스럽게 여길지는 몰랐다.
“어……? 선배?”
에드워드가 제네비브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제네비브가 먼저 끼고 있던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내려놓았다.
“값은 이걸로 치를게요.”
낡은 여관에서 하룻밤 묵는 값으론 터무니없이 비쌌지만, 지금 그녀는 그런 것까지 고려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손톱만 한 다이아몬드를 본 여관 주인은 경악하며 제네비브와 에드워드를 번갈아 보았다. 필시 지금 그의 눈엔 두 사람이 금덩이로 보일 테다.
“……저희가 짐을 안 가져와서, 옷 제공이 가능할까요.”
제네비브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오, 당연하지요.”
갑작스러운 거금에 여관 주인은 제네비브가 요청하는 사항을 전부 받아들였다.
그는 다이아몬드를 만지작거리며 제네비브가 무엇을 말하든 고개를 끄덕이느라 바빴다. 제네비브는 잠옷으로 입을 실내복 두 벌과 두 사람이 씻을 물, 그리고 식사를 부탁했다.
다이아몬드를 받은 여관 주인의 태도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는 손님용 잠옷이 없다면 제 옷이라도 가져다줄 기세였다.
여관 주인이 몸소 안내한 방 내부는 에드워드 기준으론 그럭저럭 괜찮았다. 숙소는 기숙사 방보다 컸고, 바닥을 밟을 때마다 끼익하는 소리가 난다는 걸 제외하면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침대와 소파, 그리고 2인용 식탁이 배치되어 있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여관 주인이 벽난로에 불을 피우자, 서늘했던 방 안은 금세 따뜻해졌다.
제네비브도 괜찮은지, 그녀는 벽난로 맞은편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식사와 물은 금방 준비해 드리지요. 열쇠는 여기, 탁자 위에 올려 두겠습니다.”
주인은 탁자 위 열쇠를 주고는 방을 떠나려고 했다.
“제 방은요?”
에드워드는 두 번째 방을 안내하지 않고 가려는 여관 주인을 붙잡으며 물었다.
“방이라니요? 이게 방인데요?”
“방 두 개, 아닌가요?”
“왜 방을 따로…… 부부 사이, 아니세요?”
여관 주인은 당연히 부부가 아니냐는 듯 물었다.
“…….”
그의 말에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와 자신을 보았다.
이곳과 전혀 안 어울리는 옷차림, 게다가 달링 후작부인의 취향이 어느 정도 들어간 탓에 지금 보니 일부러 맞춰 입은 것 같기도 했다.
‘부부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에드워드는 도움을 찾듯이 제네비브를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악수였다. 그녀 역시 만만치 않게 당황한 듯 뺨이 달아올라 있었다.
제네비브가 당황한 걸 보며 에드워드는 더 당황했다.
“아……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근데, 이거 어떡하지요. 남는 방이 여기밖에 없습니다만…….”
서로 얼굴을 붉히는 두 손님을 본 여관 주인이 난감한 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