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74화
“……뭘 더 어떻게 해. 새로운 숙소 찾기도 힘드니까 그냥 있자. 내가 소파에서 잘게. 그럼 괜찮지?”
제네비브가 먼저 말을 꺼냈다. 금방 안정을 되찾았는지 목소리는 제법 침착했다. 그보다 늦게 정신을 차린 에드워드는 분위기에 떠밀리듯 괜찮다고 대답했다.
“혹시나 남는 방이 생기면 곧장 알려 드리지요. 양해 감사합니다.”
여관 주인은 바닥에 머리를 댈 기세로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탁.
문이 닫혔다. 이젠 정말 저와 제네비브뿐이었다.
에드워드는 몇 달 전에도 유사한 상황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더 정확히는 제네비브를 향한 제 감정이.
이제 그녀를 특별하게 여기는 만큼, 에드워드는 자신이 긴장하여 제발 헛소리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이게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되었다. 대화를 해야 긴장한 티가 나든 말든 할 텐데, 여관 주인이 방을 떠난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적막만이 흘렀다.
에드워드는 제가 실수할까 봐 입을 다물었고, 제네비브는 대화할 생각이 아예 없는 듯 보였다.
제네비브는 대화를 시작하는 대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많이 지쳐 보였다.
“……제네비브 선배, 괜찮으세요?”
에드워드가 물었다.
“솔직하게?”
그 질문에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안 괜찮은 것 같아.”
평소였다면 대화는 제네비브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겠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제네비브의 말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에드워드는 그녀의 불안함과 초조함의 원천이 크루즈 여행인 걸 알았지만, 어째서 제네비브가 크루즈 여행을 이토록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여전히 알 길이 없었다.
제네비브는 자신처럼 선상 파티를 어떠한 기회의 장으로 보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저를 따라온 것뿐이었다.
‘많이 가고 싶었던 건가?’
에드워드는 몇 주 전에 그녀가 제게 부탁했던 모습을 회상했다.
‘나도 가고 싶다’라는 요구는 의외였지만, 에드워드는 제 사심을 살짝 섞어 그 요청에 응했다. 에드워드는 답을 찾아내려는 듯 제네비브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제네비브는 평온해 보이면서도 이따금 눈살을 찌푸렸다. 소파 팔걸이에 상체를 비스듬히 기대다가, 우는 것처럼 이마를 무릎에 묻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불안하게 만들었다.
칼리지를 나올 때부터 갖고 있었던 주머니를 한참 만지던 제네비브는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에드워드가 그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채 묻기도 전에 제네비브는 천천히 주머니를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던졌다. 매캐한 연기와 탄내가 방 안을 채웠다.
연기를 맡은 제네비브가 콜록거리자, 에드워드는 곧바로 창문을 열었다.
연기가 빠져 환기가 어느 정도 끝날 때 즈음, 여관 주인이 다시금 들어와 식사와 실내복을 가져다주었다.
“외출복은 현관 쪽 주머니 안에 넣어 두시면 오전 중으로 세탁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못 알아들었을까 싶었는지 여관 주인은 친히 벽걸이에 걸린 세탁물을 넣을 주머니를 꺼내어 알려 주었다. 세탁물을 방 안에 두는 것만 제외하면 세인트 존 칼리지 기숙사 체계와 비슷했다.
여관 주인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두 사람에게 신경을 썼다. 환경과 받는 서비스의 차이에서 나오는 괴리감이 컸다.
저녁 메뉴는 캐서롤이었다. 지극히 서민적인 음식은 에드워드에겐 맛있었다.
‘선배는 좋아하려나.’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에게 시선을 옮겼다.
제네비브는 맥없이 포크를 들어 캐서롤을 한 입 떠먹었다. 다행히 입맛에 맞았는지 초점 없던 눈은 다시 생기를 되찾았고, 눈썹은 살짝 올라갔다. 그녀가 기력을 되찾은 걸 본 에드워드는 안심했다.
“……내일 돌아가자.”
음식을 삼킨 제네비브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일 일정을 읊었다.
일정은 간단했다. 아침을 먹은 뒤 기차를 타고 칼리지로 돌아간다. 일정을 짧게 말한 후, 제네비브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연회에 못 가서 아쉽네요.”
“……그래.”
나름 분위기를 풀고자 한 말이었는데, 주제가 잘못되었는지 제네비브는 어렵게 되찾은 활력을 다시 잃었다. 에드워드는 제 말실수를 깨달으며 혀를 깨물었다.
제네비브는 깨작거리며 나온 음식의 3분의 1을 겨우 끝냈다. 그녀가 침울한 걸 보자니 에드워드도 기분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학습된 죄책감과 미안함이 느껴졌다. 빨리 기분이 나아졌으면 좋겠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잘 모르겠다.
“식사는 잘하셨나요?”
“네, 맛있었습니다.”
남은 음식이 잘못된 답을 줄까 싶어 에드워드는 대답했다.
여관 주인은 별다른 말 없이 접시를 치우며 목욕물 준비가 끝났다는 걸 알리곤 욕실 방향을 알렸다.
“먼저 씻어도 돼?”
제네비브가 피곤한 어투로 물었다.
“아…… 네, 선배가 먼저 씻으세요.”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
제네비브가 욕실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한 물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제야 이 상황을 체감하게 되었다.
* * *
제네비브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
그녀는 욕조 안에 가득 담긴 목욕물에 머리까지 넣어 잠수했다.
‘이젠 어떡하지.’
물속에서 숨을 작게 내쉬자 물방울이 보글보글 생겼다.
‘……결국 배는 못 탔고, 크루즈는 출발했고.’
늦더라도 가 봐야 했나?
하지만 두 사람은 아본리아 제국의 공작이나 후작도 아니었고, 그저 칼리지 장학생과 그의 파트너였으니 나타나지 않은 걸로 연회가 미뤄질 리 없었다. 만일 제네비브가 떠나는 크루즈를 두 눈으로 직접 봤다면 그때야말로 정신을 놓았을 거다.
‘나는 길도 모르니까.’
제네비브는 현실적인 척, 애써 현실을 회피했다. 어차피 나는 길을 모르니까, 에드워드도 피차 마찬가지다. 말을 타 봤자 늦었을 거다.
하지만, 이게 영양가 없는 자기 위로라는 걸 당사자가 가장 잘 알았다.
‘난 결국 사람이 죽은 걸 방관했구나.’
애써 미뤄 뒀던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호기롭게 계획을 세웠지만, 스테판이 안 온 것으로 계획은 완전히 망가졌다.
제네비브는 누구에게라도 책임을 전가하고 싶었다. 오라는 곳에 나타나지 않은 스테판? 아니면, 하필 오늘 마차를 빌린 사람들? 제 손님에게 마차 한 대 보내지 않은 랜돌프 황태자?
“아니면, 나…….”
진작 알았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만약 에드워드를 만난 순간부터 모든 상황에 대비했다면. ‘원작의 순리를 못 이긴 것뿐이다’라는 얄팍한 문장 뒤로 감히 숨을 생각이 안 들었다.
그러니 리스톨에 하루라도 더 있으면 미쳐 버릴 것 같다. 그렇기에 칼리지로 돌아가기로 했지만…….
“…….”
오웬과 제임스, 그리고 친구들을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이대로 물에 잠기고 싶었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허억……!”
제네비브는 가쁜 숨을 쉬며 물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에드워드는 살렸어.’
제네비브는 그나마 성과라고 할 만한 것에 집중했다.
‘……에드워드는 살렸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성과였지만, 그래도 에드워드는 살렸다. 에드워드는 예정대로 황태자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괴롭힘도 끝이겠지.
수많은 사람의 불행이 그에게 행운으로 다가온다. 제네비브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생각하며 욕실 문을 쳐다봤다.
‘에드워드는 상황을 모르니까, 티 내지 말자.’
일이 일어나면 가장 당황스러울 사람은 에드워드였다. 이제 그의 앞으로 숨 막히는 상황들이 펼쳐질 텐데, 굳이 얼마 남지 않은 평화를 눈치 보며 보내게 할 이유는 없었다.
제네비브는 검지로 입꼬리를 위로 쭉 잡아당겼다. 일렁이는 물 위로 일그러진 미소가 보였다.
* * *
한 시간가량이 지났을 때, 제네비브가 욕실을 나왔다.
“너무 오래 걸렸지.”
그녀의 두 볼은 열기로 붉게 익어 있었다. 본인 또한 알고 있었는지, 손등을 볼에 댄 채 에드워드를 보았다.
분홍색 외출복은 실내복으로 바뀌었는데, 여관 주인이 가장 좋은 잠옷이랍시고 준 건 얇은 네글리제였다.
“…….”
굳이 거울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에드워드는 지금 제 얼굴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욕조 물은 내가 썼는데 괜찮아? 보니까 샤워실도 있는 것 같더라고. 잠옷은, 음…… 숄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제네비브는 난처한 눈길로 제 옷차림을 보았다. 위로 얇은 가운이 있었지만, 솔직히 입으나 마나 했다.
몸을 돌린 에드워드는 침대 위에 잘 세팅된 이불을 들고는 제네비브 앞으로 갔다.
“응?”
“감기 걸려요.”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의 몸을 이불로 칭칭 감으며 말했다.
“……아, 고마워.”
제네비브는 이불에 감싸여 두 손과 발이 결박된 채 종종걸음으로 소파에 가 앉았다.
에드워드는 이불에 싸여 있는 제네비브를 눈에 한 번 담고는 엉거주춤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욕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제 뺨을 찰싹 때렸다. 그러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에드워드 역시 샤워를 마친 후,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의 옷은 평범한 셔츠와 바지였다. 다시 안경을 쓴 에드워드는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어 내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제네비브는 그녀를 꽁꽁 싸매던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제네비브는 무거운 이불을 어깨에 올려놓은 채 머리를 빗는 중이었다.
그런데, 달라진 점은 이불만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안 곱슬거리지?”
“네.”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연한 곱슬기를 머금었던 머리카락이 쭉 펴져 있었다. 처음 본 만큼 익숙지 않았지만, 제네비브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이게 내 원래 머리야. 밤이면 파마가 풀려서 평소엔 머리에 뭘 하고 자는데…… 마땅한 도구가 없어서.”
제네비브는 밤마다 머리에 무엇을 하고 자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에드워드는 그 말소리를 들으며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
에드워드는 자신도 모르게 금색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각이 미치도록 좋았다.
“왜?”
제네비브가 뒤를 돌아보자, 에드워드는 황급히 손을 뒤로 숨겼다.
“제, 제가 소파에서 잘게요.”
“……네가?”
소파에 앉아 있던 제네비브가 되물었다.
“네, 선배가 침대에서 자요.”
“네가 침대에서 자는 게 더 나을 텐데.”
제네비브가 의문스럽게 말했다.
“너는 워낙 키가 있으니까, 소파는 비좁을 거야.”
“괜찮아요. 제가 여기서 잘게요.”
에드워드는 고집을 부렸다.
“네가 정 괜찮다면…… 불편하면 말해. 내일 떠나야 하니까, 잘 자고.”
제네비브가 영 탐탁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네. 선배도 안녕히 주무세요.”
웃어른에게나 하는 인사말에 제네비브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에드워드는 소파에 누웠다. 제네비브의 말이 옳다는 걸 입증한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제네비브가 누우면 딱 맞는 소파는, 에드워드가 눕자 종아리가 팔 받침대에 걸렸다. 어깨 둘 곳도 부족했고, 조금만 뒤척여도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걱정했던 대로 에드워드가 자세를 바꾸려 조금 움직였을 때, 그는 미끄러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에드워드! 괜찮아?”
둔탁한 소리에 제네비브는 놀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역시, 네가 침대에서 자는 게 낫겠지?”
“……그러면 선배가 불편하잖아요.”
“나는 네가 불편한 게 더 싫어.”
“…….”
제아무리 당사자가 그러한들 에드워드가 제네비브를 이 소파에 재울 리 없었다.
‘차라리 내가 밤을 새웠으면 새웠지.’
에드워드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어떻게 해야 제네비브를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럼, 같이 잘까?”
그리고 제네비브는 기실 모두의 머릿속에 스쳤지만, 차마 꺼낼 수 없었던 제안을 했다.
“…….”
그리고 에드워드는 마치 홀린 듯, 거절할 생각조차 못 하며 고개를 멍청하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