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75화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 에드워드는 천천히 침대 가까이로 갔다.
그가 무릎을 올려놓자 침대는 녹슨 소리를 냈다. 무릎 한쪽을 올린 것뿐인데도 벌써 침대가 꽉 찼다. 제네비브는 이불에 둘러싸인 채 부스럭거리며 침대 안쪽으로 꼬물꼬물 움직였다.
“…….”
그사이 이성을 되찾은 에드워드의 머리는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했지만, 몸은 못 들은 척 뻔뻔하게 그녀의 옆에 누웠다.
제네비브는 벽에 달라붙어 최대한 둘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 두 사람의 거리는 채 손가락 한 마디 차이도 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어깨끼리 부딪칠 것 같았다.
제네비브의 눈높이에 맞춰 자리를 잡은 에드워드는 침대 구석에 누운 제네비브를 보았다.
“…….”
그 순간, 어둑한 녹색 눈과 마주쳤다.
제네비브는 사뭇 진지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 그의 얼굴을 향해 비장하게 손을 내밀었다.
에드워드가 움찔 놀라자, 그녀는 일순 행동을 멈췄으나 다시 손을 뻗었다. 제네비브의 손이 에드워드의 귀에 닿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에드워드는 당황했지만, 그는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귓바퀴 뒤쪽을 더듬거리던 작은 손이 찾던 건 안경테였다. 가느다란 안경다리가 에드워드의 귀를 쓸고 지나가자, 어둡긴 해도 선명했던 시야가 탁하게 변했다.
“안경은 벗고 자야지. 창틀에 둘게.”
“……제가 탁자 위에 올려 둘게요.”
방이 어두워서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밝았다면 그녀는 분명 제가 어떤 불순한 생각을 했는지 알아차렸을 거다.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건네받은 안경을 탁자 위에 놓아두곤, 속으로 성전 구절을 외웠다.
잠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그의 예상과 다르게 잠은 쏟아졌다. 만약 에드워드가 조금만 더 늦게 잠들었다면, 그는 옆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거다.
* * *
“……저기, 에드워드.”
한밤중, 제네비브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요한 적막을 깼다.
“자?”
에드워드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대답을 대신했지만, 제네비브는 그래도 말을 이었다.
“……나는 벌 받을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에드워드 앞에서 평소처럼 행동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그럴 때마다 제네비브는 죄책감이 들었다.
크루즈가 언제 어떻게 침몰할지 모르는데, 안전한 곳에서 아무 걱정 없는 모습으로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크루즈가 침몰하면 어떡하지.
아니, 이미 침몰했으면 어떡하지.
잠든 사이에 침몰하면 어떡하지.
손을 떠나 버린 일에 대한 생각과 후회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에드워드만큼은 구했다는 위로는 그가 잠들며 함께 사라진 것 같았다.
무지는 축복이라는 말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미래를 몰랐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괴롭진 않았을 텐데.
“…….”
눈물이 났다. 차오른 눈물은 뺨을 타고 흘렀다.
차라리 미친 사람 취급을 받더라도 오웬과 제임스에게 말하는 게 나았다.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말을 가렸을까. 미친 취급을 받더라도 막아야 하는 일이었는데.
그동안 떠올린 방법을 기각한 이유가 전부 변명처럼 들렸다. 이전의 자신은 이 일을 혼자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던 거다.
원작의 거대한 운명이란 흐름을 저 혼자 해결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라도 막아야 했다. 하루아침에 친구들은 제 가족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될 거다. 막을 수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은 일어났다. 제네비브의 어깨가 작게 흔들렸다.
눈물을 닦아 낸 제네비브는 고개를 돌려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곤히 잠든 그 모습은 과연 소설의 주인공다웠다.
“…….”
의기양양하게 세운 계획의 반쪽짜리. 아니, 반쪽조차 안 되는 성과. 하지만, 성과는 성과였다.
“내가 너만큼은 꼭…….”
에드워드만큼은 죽어선 안 되었다.
그만큼은 살리고 싶었고, 살아야 했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 위에 귀를 댔다. 싸구려 비누향이 물씬 풍기는 셔츠 아래로 따뜻한 햇볕 같은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몸과 그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최악이야. 제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고, 그렇게 열심히 발버둥 쳐서 나온 결과가 이거라니.”
제네비브는 고동 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왜 자는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몰랐다. 제네비브는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럼에도 눈물은 나왔다.
“…….”
그때, 의외의 감각이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부터 등까지 천천히 쓸었다. 저도 모르게 흔들리던 어깨는 점차 평온함을 되찾아 갔다.
“……에드워드?”
“…….”
제네비브는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잠꼬대야?”
들리는 답은 없었다. 대신, 에드워드는 잠결에 그녀를 부드러이 끌어안았다.
“…….”
자고 있다는 걸 확인한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에게서 벗어나는 대신, 그에 응하듯 끌어안았다.
기분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 * *
동녘이 밝아 오기도 전에 에드워드는 습관적으로 눈을 떴다. 푸르스름한 빛이 낯선 천장을 비췄다. 기숙사라고 하기엔 낡았고, 밀포드 저택이라고 하기엔 좋아 보였다.
몸을 뒤적이던 에드워드는 곧바로 멈췄다. 팔 위로 생소한 무게감이 느껴진 탓이다.
“…….”
제네비브였다.
잠버릇인지,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조금 움직이자 그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지금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끌어안고 있었고, 그건 에드워드도 마찬가지였다.
꿈이라고 하기엔 감각이 너무나 생생했다.
에드워드는 화들짝 놀라며 제네비브의 등 위에 올려놓은 손을 거두었다. 손이 그녀에게서 떨어지자,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그제야 에드워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체온이…….”
열감이 있었다.
제네비브는 쌕쌕거리며 숨을 버겁게 쉬었다. 이마는 불구덩이 같았다. 축 처진 몸에는 힘이 없었다.
“선배, 제네비브 선배.”
밤사이에 아예 의식을 잃은 거면 어쩌지? 최악의 상상까지 한 에드워드는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으음.”
그러자 제네비브가 이마를 구기며 싫다는 듯 웅얼거렸다.
“하아…….”
다행히 의식은 있는 것 같았다.
에드워드는 당연한 수순으로 제네비브를 병간호했다.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놓는가 하면, 날이 밝자마자 여관 주인을 부탁해 의사와 수프를 준비하기도 했다. 여관 주인은 장성한 자식에게 여관을 맡기고, 친히 의사를 데리러 갔다.
에드워드의 지극한 노력 덕분일까. 제네비브는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즈음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 그녀는 언제 앓았냐는 듯 기력을 금방 되찾았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으나 의식이 있는 제네비브는 없을 때보다 훨씬 힘들어했다. 눈은 부어올랐고, 움직임도 상당히 둔해졌다.
“지금 몇 시야?”
“열한 시 반이에요. 몸은 좀 어때요?”
“……누군가 내가 자는 동안 나를 몽둥이질한 것 같아.”
제네비브는 갈라진 목소리로 제 몸 상태를 설명했다. 보기보다 훨씬 아픈 모양이다. 에드워드는 의사를 부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네 손, 차가워.”
아픈 데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제네비브가 짜증을 조금 담아 말했다. 아예 힘이 없는 것보다 이편이 나았다.
“손을 찬물로 씻어서 그런가 봐요.”
에드워드는 손으로 체온을 확인하는 대신, 허리를 숙여 제네비브와 이마를 맞대었다.
“…….”
“…….”
자각 없이 나온 습관에 에드워드는 적잖게 당황했지만,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열은 많이 내린 것 같은데…… 의사를 불러올게요.”
에드워드는 자연스럽게 주제를 바꿨다.
“……기차표 금방 매진될 것 같은데, 일단 학교로 가자.”
이 몸 상태로?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일말의 거짓도 없다는 듯 침대에서 일어서려고 했고, 에드워드는 별다른 말 없이 제네비브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힘은 전혀 안 줬지만, 제네비브는 저항조차 못 하며 다시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저, 손에 힘 안 준 거 아시죠.”
“……응.”
제네비브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내일 나가는 걸로 해요. 의사는 불렀으니까, 그래도 진찰은 한번 받아 보고요.”
“벌써 의사를 불렀어?”
“네. 지금 밖에서 기다리는 중이에요.”
제네비브는 문 앞에 에드워드가 부른 의사를 보고는 고집을 버렸다. 저명한 마을 의사 (여관 주인이 의사를 그렇게 소개했다) 는 아플 때 전문가의 소견은 필수적이라며, 그들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제네비브는 졌다는 듯 진찰을 거부하는 대신, 에드워드에게 오늘 신문과 내일 기차표 예매를 부탁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에드워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의 부탁을 들어줬다. 에드워드는 신문팔이 소년에게 제국 신문 한 부를 사고는, 역으로 가서 다음 날 기차표를 구매했다.
“……왜 안 오셨을까.”
에드워드는 승강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설령 블라이스 가문이 에드워드를 싫어하더라도 제네비브에겐 호의적이었다. 조카를 챙기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쓸데없는 잡념에 빠진 에드워드는 매디슨 호텔로 발길을 돌렸다.
에드워드가 심부름을 끝마치고 돌아오자, 의사는 진찰을 끝냈는지 없었다. 대신 보랏빛이 감도는 수증기가 방 안을 채웠다.
원래는 없었던 알코올램프 위엔 보라색 액체가 보글거리며 끓고 있었다. 액체의 부피에 비해 나오는 수증기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았다. 약초를 배합해 만든 듯, 유리 플라스크 안엔 풀잎 같은 게 떠다녔다.
“몸은 어때요?”
조리 있게 플라스크를 피한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에게 물었다.
“몸은 괜찮아. 긴장이 풀려서 갑자기 아팠던 거래. 거기에 열차까지 탔으니까…… 신문은 샀어?”
“여기요.”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준 신문을 받았다. 그러곤 긴장한 기색으로 신문을 읽었다.
에드워드가 오면서 조금 읽은 바로는 그리 중요하거나 큰 뉴스는 없었다. 1면은 귀족의 양도세가 줄었다는 중요하지만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정치 기사였고, 2면에는 어느 새장 가게에 불이 났는데 주변 주민의 도움으로 재건에 성공했다는 훈훈한 미담이 적혔다.
특별히 찾는 기사가 있는지, 아니면 그저 세상 돌아가는 걸 보고 싶었는지 제네비브는 대충 제목을 훑어보며 신문을 넘겼다. 1분 만에 신문을 완독한 그녀는 걱정을 떨친 동시에 새로운 근심이 생긴 것 같았다.
“향은 얼마나 간대요?”
막연히 원인이 신문에 있다는 걸 알아챈 에드워드가 말을 돌렸다.
“두 시간 더 끓는다고 했나……? 영양제 같은 거래. 안정제도 조금 들어갔다는데, 효과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
어제와 다르게 주제 선정을 잘했는지 제네비브는 평소처럼 대답했다. 선상 파티와 신문에 대해 말하지 말 것. 에드워드의 머릿속은 무의식적으로 규칙을 만들었다.
보라색 수증기는 그녀의 말대로 2시간 뒤에 끝났다. 약효가 확실히 들었는지, 제네비브는 오전보다 훨씬 나아진 안색으로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