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76화
아침에 일어난 제네비브의 눈은 여전히 부어 있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몸은 많이 회복한 것 같았다. 갈라졌던 목소리도 어느 정도 원래대로 돌아왔고, 전보다 식사도 잘 삼켰다.
“에드워드, 신문 어디서 샀어?”
“12번가에 신문 간판대가 있어요. 기차역 주변에도 신문팔이 소년들이 있고…… 그건 갑자기 왜요?”
에드워드는 아침을 먹다가 대뜸 묻는 제네비브를 보며 물었다.
“신문 좀 사려고.”
“그럼 제가 사 올게요.”
혹여 제네비브가 거절할까, 에드워드는 급히 말을 덧붙였다.
“길 잃으면 기차 놓치는 거 아시죠. 게다가 아직 몸도 완전히 다 안 나았는데…… 내일 또 아프면 어떡해요. 시험도 펜 들 힘이 있어야 잘 볼 수 있잖아요.”
자신이 한 말이었지만, 전부 맞는 말이었다. 제네비브도 그 말에 동의하는지 더 고집을 부리는 대신 수긍했다.
“잘 다녀와.”
하여,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의 배웅을 받으며 여관을 나왔다.
고작 이틀이 지났지만, 에드워드는 신문을 사는 게 일과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이런 하루라면 매일 반복되어도 좋았다.
“…….”
그런데, 거리 분위기가 어제와 달랐다.
똑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없듯 제각기 다름에도 이상하리만큼 균형을 맞춰 갔지만, 오늘은 모두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의 입에선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고, 몇몇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거리 가득 슬픔이 느껴졌다.
“그 어린 분께서…….”
그때, 한 여자가 에드워드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지나갔다.
신문을 읽던 여자는 손수건으로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 내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에드워드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신문의 기사 제목을 똑똑히 읽었다.
“저기, 저기요. 잠시 신문 좀…….”
에드워드는 홀린 듯이 따라가, 그녀가 들고 있던 신문을 가져갔다.
지금보다 자신이 틀리길 바란 적이 있었던가.
“지난 8일…… 랜돌프 황태자의 크루즈 여행, 오늘 새벽 갑작스러운 기상 이변으로 배 난파…… 전원 사망으로 추정……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는 3면에.”
에드워드는 급히 페이지를 넘겼다.
랜돌프 황태자, 제프리 카터 공작, 일라이자 카터 공작부인, 빈센트 뷰캐넌 카터, 조지 레이닌 공작…….
“…….”
목록은 끝없이 이어졌다. 작은 글씨로 인쇄된 이름들이 신문 한 면을 빼곡히 채웠다. 아는 사람의 이름도, 들어 보기만 한 사람의 이름도, 처음 보는 이름도 있었다.
어느 백작부인의 이름까지 읽은 에드워드는 곧장 매디슨 호텔로 달려갔다. 그는 다른 사람의 신문을 허락 없이 가져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숨이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매디슨 호텔에 도착하자, 낡은 건물 입구 앞에는 이질적일 정도로 호화로운 고급 마차 몇 대가 서 있었다.
“……이 마차가 왜 여기에.”
에드워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마차 문에는 칼을 든 사자와 목에 왕관을 건 백조의 문장이 화려하게 새겨졌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황실 마차가 있다니. 이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이 사고의 원인을 나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밀포드 씨의 비호는 이제 꿈도 못 꾸는데. 그럼,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었던 선배에게도 불이익이…….
눈에 담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채 정리하기도 전에 에드워드는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항상 로비를 지키던 여관 주인은 없었고, 건물은 기이할 정도로 텅 비었지만, 지금 에드워드는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문이 왜…….”
분명 닫고 나왔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 에드워드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녹슨 경칩이 낸 소리가 고막을 할퀴었다.
“…….”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는 제복 차림의 제국군이 제네비브가 있었다. 키 큰 군인들 사이에서 그녀는 쥐 죽은 듯이 서 있었다.
제국군은 에드워드를 보자마자 일제히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에드워드는 저항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손을 들었다. 헛된 짓을 했다간 제네비브가 다칠지도 모른다. 들고 온 신문은 바닥에 떨어졌다.
“이분은 황자님이시다.”
가운데에 선 남자가 손을 올리며 말하자, 군인들은 그제야 총을 내려놓았다.
“황자님께 무례를 저질러 송구합니다.”
밀포드 씨가 아닌 사람에게서 저 낯선 호칭을 들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분위기를 읽은 에드워드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황명을 전하러 왔습니다. 제국의 제1황자, 에드워드 블렛은 즉시 황궁에 오도록.”
이름만 알고 있던 부친이 처음으로 자신을 찾았다.
* * *
제국군은 돌연 찾아온 이유를 알리지 않았다. 제네비브도 형식적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기만 할 뿐,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제네비브는 가슴에 훈장과 별이 가득 걸린 군인을 보며 결국 일이 터졌다는 걸 직감했다.
“에드워드 군은 언제 오십니까?”
군인은 눈치껏 입조심을 하는 제네비브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까보다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신문을 사러 가서…… 저도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몸은 불안하게 떨려 왔다. 제네비브는 팔을 쓸며 안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때, 문이 떠들썩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에드워드는 숨을 가쁘게 쉬며 방 안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군인은 미래의 주군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그리고 이어진 황제의 명을 들었을 때, 제네비브의 사고는 정지되었다. 이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제네비브는 제 의지가 들어가지 않은 몸으로 방을 걸어 나왔다. 에드워드가 떨어트린 신문으로 향한 눈은 ‘배 난파’라는 단어를 잡아챘고, 머리는 이 모든 게 소설 내용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거대한 나무줄기에 잔가지 몇 개가 생겼다고 나무가 무너질 리 없다.
“…….”
그게 마치, 제네비브에겐 사형 선고처럼 다가왔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뒤를 따라갔다. 자신이 걱정되는 듯 에드워드는 고개를 살짝 돌려 제 상태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에드워드.”
제네비브는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왜 갑자기 에드워드를 불렀을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제국의 황자님이십니다. 예의를 차리십시오.”
불과 몇 분 전까지 그에게 총을 겨눈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 에드워드는 이제 황태자야.’
이젠 장학생 에드워드를 대했던 것처럼 황태자 에드워드를 대할 수 없다.
에드워드의 보폭에 맞춰 걷던 군인들은 그가 멈추자, 따라서 멈춰 섰다.
“칼리지 선배입니다. 저는 괜찮아요.”
에드워드가 제네비브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위계질서를 완전히 위반하는 말을 들은 군인들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또 황족에게 지적해도 되는 건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닙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제네비브는 그의 변호를 받는 대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여기서 나를 변호하면 안 돼.’
그들 입장에선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것이니, 예비 황태자가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얽혀 있는 걸 보여 줘선 안 되었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의 시선을 피해 신코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미동 없이 있던 에드워드의 발이 느리게 움직였다.
“타시죠.”
건물 밖으로 완전히 나오자, 황실 마차가 보였다. 에드워드는 가장 앞쪽의 마차를 탔고, 제네비브는 그 뒤의 마차를 탔다.
군인이 제네비브 대신 마차 문을 열었다.
“어디로 데려가는 건가요?”
“폐하께서 에드워드 전하의 주변인도 데려오라 명하셨습니다. 짧은 참고인 조사가 있을 겁니다.”
아본리아 제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의 명이었다. 제네비브는 더 질문하지 않았다. 그녀가 마차 의자에 앉은 걸 확인하고서야 군인은 문을 닫았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동시에 저릿하게 아파 왔다. 아파서 답답해진 건지, 아니면 답답해서 아픈 건지 모르겠다.
겨우 회복한 몸이 다시 나빠지는 것 같았다. 제네비브는 가슴께를 쥔 채 숨을 가쁘게 쉬었다.
블라이스 가문이 죽었다. 제임스는 부모님을 잃었다. 결국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은 그걸 손을 놓고 보기만 했다.
“…….”
매일 밤 저를 무겁게 짓누르던 죄책감이 다시 찾아왔다. 밤마다 그렇게 울어 댔는데도 몸에는 남은 눈물이 있었다.
* * *
금으로 된 아본리아 궁전 문이 활짝 열렸다.
웅장한 정원을 본 제네비브는 바쁘게 눈물을 닦았다. 먼저 도착한 에드워드는 다른 곳에 갔는지 안 보였다.
상황 파악이 아직 안 된 제네비브 주변으로 하녀 한 명이 왔다.
“카르디르의 제네비브 달링 양을 뵙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시죠…….”
제네비브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말은 편히 하시지요.”
하녀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동문서답을 했다.
그녀는 제네비브를 궁전 안으로 안내했다. 곧바로 조사에 들어갈 거라는 예상과 달리, 제네비브를 기다린 건 대여섯 명의 하녀였다.
폐하께서 조사 전까지 손님을 잘 모시라고 명하셨다고 전한 하녀는 받은 명령을 그대로 따라 제네비브를 정성껏 돌봤다.
오랜만에 받는 시중이었다. 따뜻한 물에서 마사지를 받으니 우습게도 긴장이 풀렸다. 하녀들은 온갖 진귀한 향료를 제네비브의 몸에 발랐고, 제네비브는 그 시중을 군말 없이 받았다.
내색 없이 제 일을 하는 하녀들을 보자니, 마치 아무 사고도 안 일어난 것 같았다.
“그, 사고가 있다는 걸 들었는데…….”
언제 물어보는 게 맞을까, 적당한 순간을 재던 제네비브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녀가 사고를 언급하자, 팔을 주무르던 하녀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블라이스 가문은 괜찮나요?”
애석하게도 제네비브의 입에선 그 누구도 아닌, 제 가족의 안부가 가장 먼저 나왔다. 제네비브가 절박하게 묻자, 하녀는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생존자 수색은 진행 중에 있습니다.”
아직 생존자를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제네비브가 고개를 푹 숙이자, 하녀들은 저들끼리 안타까운 눈빛을 교환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지던 관리는 분명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야 했지만, 제네비브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시중 받을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바로 조사를 받는 건 안 될까요?”
제네비브는 저를 정성스럽게 꾸미는 하녀들에게 물었다.
가벼운 참고인 조사라고 하기엔 모든 게 과했다. 설령 잘 돌보라는 황제의 명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 모든 게 지나쳤다.
“못 들으셨나요?”
“무엇을요?”
“달링 양께선 폐하를 뵙게 될 거랍니다.”
“네? 저는 알현 신청을 한 적이 없는데요?”
제네비브는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직접 참고인 조사를 하실 예정이랍니다.”
“……네?”
제네비브가 되물었다. 하녀들은 마치 확인 사살하듯 말을 반복했다.
제네비브가 황제를 알현하게 된 제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이, 황궁 하녀들은 제네비브를 아본리아식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하지만 아름답게 치장한 겉모습과 달리, 제네비브의 속은 썩어 갔다. 이렇게 꾸미고 있을 기분도, 상황도 아니었다.
인형 놀이가 끝나자 궁전 사용인은 제네비브가 머무는 방에 먹을거리를 넣었다. 제네비브는 떨리는 손으로 차를 몇 모금 넘겼다.
궁인들은 친절하게 보이지만, 어쩐지 말을 함부로 하기 힘들었다.
“…….”
이곳엔 오늘 사고와 연상되는 물건이 단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신문 한 부 정도는 있을 줄 알았지만, 그조차도 없었다.
제국의 황태자가 하루아침에 죽었는데 하인들은 크게 상심한 것 같지 않았다. 적어도 이 방만큼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졌다.
‘나름 배려인 건가.’
이게 제게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모르겠다. 제네비브는 느리게 차를 몇 모금 마셨다.
“지금 몇 시지?”
식은 차를 끝낼 때 즈음, 제네비브는 길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물었다.
“여섯 시랍니다.”
“학교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내일 졸업 시험을 보거든요. 폐하와의 알현은 언제 즈음 될까요?”
제네비브는 다시 차 한 잔을 채워 주는 하녀에게 말했다.
물론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와의 만남, 그것도 황제 쪽이 먼저 원한 만남이기에 재촉할 수도 없고, 재촉한들 소용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마지막 열차를 타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이 와중에 졸업을 걱정하는 제 모습이 조금 혐오스럽게 느꼈다.
“확답을 드리기 어렵네요. 죄송합니다.”
“……그렇군요.”
일개 하녀가 황제의 일정을 정확하게 알 리 만무했다. 최대한의 포용력을 발휘한 제네비브는 가만히 기다렸다.
‘마지막 열차마저 놓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알현은 저녁 일곱 시가 넘어가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러다간 정말 못 돌아가게 생겼다.
“화요일에 다시 돌아와서 조사를 받으면 안 될까요?”
제네비브는 조급하게 물었다. 그래도 지금 출발하면 아슬아슬하게나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