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77화
“달링 양께서 지금 어떤 심정일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뇨, 전혀 이해 못 하고 계세요. 당장 내일이 졸업 시험이에요. 안 돌아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저녁에 바로 돌아오겠다고요.”
제네비브는 하녀의 말을 황급히 가로챘다. 자칫하다간 정말 졸업 시험을 못 보게 생겼다.
‘시험을 못 보면…….’
제네비브가 알기로 정당한 사유가 없는데 졸업 시험을 안 보면 제적 처리가 된다. 더구나 이번 사고로 직계 가족을 잃은 것도 아니었기에, 제네비브에겐 시험을 미룰 특별 사유도 없었다.
‘제적이라니.’
상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제적이 되면 자연스럽게 졸업도 건너가고, 그렇게 되면 제네비브는 어떤 짓을 하더라도 달링 가문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게 된다.
달링 가문이 온전히 제 것이 못 된다.
그녀로서 과연 이보다 박탈감이 들게 하는 문장이 있을까? 애초에 제네비브가 세인트 존 칼리지에 입학하는 위험을 감수한 것도 오로지 달링 가문을 물려받기 위해서였다.
“……가야겠어요.”
제네비브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적어도 시험장에는 들어가야 했다. 두 눈으로 시험지를 확인해야 했다.
“달링 양……!”
하녀가 서둘러 제네비브를 말렸다.
성씨를 부르는 것뿐이더라도 일개 하녀가 귀족 자녀를 엄하게 부르는 건 무례한 행위였다. 하지만, 하녀는 제네비브의 치맛자락이라도 붙잡아 말릴 기세로 뒤를 쫓아갔다.
제네비브는 그런 하녀를 무시하며 휴게실 문을 열었다.
“…….”
문밖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하인들이 입는 검은색 옷을 입은 그는 노크하려던 찰나였던 듯 손을 동그랗게 말아 올리고 있었다.
상대를 확인한 제네비브는 그를 지나쳤다.
“달링―.”
“칼리지로 가야겠어요.”
제네비브는 이번에도 하인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말했다. 복도를 빠르게 걸어가자, 하인은 휴게실에서 하녀가 그랬듯 제네비브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하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눈앞의 하인은 아예 앞장서 그녀의 길을 가로막았다는 거였다.
“……달링 양, 부디 이 일이 제국에게 있어 얼마나 큰 비극인지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
“랜돌프 전하를 포함하여 중앙 귀족 절반이 오늘 아침에 죽었습니다. 사건과 관련된 사람을 함부로 보낼 수 없다는 게 제국의 입장입니다.”
하인의 말을 들으니 양심이 찔렸다. 자신이 실패했다는 걸 다시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아서.
“……내일 오후에 돌아오는 것도 어려울까요.”
“네, 어렵습니다. 이 요청이 황명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 주십시오.”
하인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친절을 가장한 협박이었다. 지금은 친절하게 손님 대접을 해 주고 있으나, 그렇다고 기고만장하지 말라는 협박.
지금 네가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건 그저 황제의 명령 덕분이니, 감사하고 지금 받는 손님 대접을 즐기라는 의미였다.
“……알겠어요.”
“황궁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전부 가능하니, 필요하거나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전해 드릴 사항이 있어 찾아왔는데―.”
하인이 다시금 예의 바른 태도로 말했다.
“블라이스 가문은 크루즈에 탑승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네? 그 뜻은…….”
제네비브가 작게 말했다.
답을 알면서도 되묻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 하지만, 모든 희망을 놓은 순간에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왔다.
“초대 받은 세 분 모두 살아 계십니다. 생존이라면 생존이겠, 달링 양……?”
제네비브가 돌연 끌어안았기에,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블라이스 가문이 살아 있다.
이 짧은 문장이 주는 안도감이 얼마나 큰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졸업 시험을 못 본다는 불안감마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못 믿겠다는 듯 정말이냐고 되묻자, 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크루즈에 탄 명부라도 보여 드릴까요?”
“아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전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제네비브는 처음으로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 * *
황제궁은 늘 수많은 하인이 바쁘게 오갔는데, 오늘만큼은 어디에도 궁인이 보이지 않았다. 궁인들은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는 걸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다지만, 그들이 안 보이니 풍경이 다소 허전했다.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황제궁 복도는 궁인들 대신, 황제의 측근들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크루즈 침몰 때문이었다.
황제궁 안으로 하인 한 명이 들어왔다. 머리칼이 조금 벗겨진 그는 익숙하고도 넓은 보폭으로 자연스럽게 황제의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안쪽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하인은 집무실 문을 열었다.
집무실 내부는 사치스러웠다. 높은 천장과 창문, 디아스 시기의 그림과 조각상, 금으로 칠해진 벽지, 반짝이는 샹들리에 등……. 조금만 엇나가도 경박하게 보일 법한 조합이었지만, 놀랍게도 모든 요소가 잘 맞물려 황제의 위엄을 더한층 드높였다.
시대가 풍요롭건 빈곤하건, 언제나 한결같은 호화로움을 유지하는 집무실에서 보좌관이 제 주군과 말을 나누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하인은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반 황제는 익숙한 듯 손짓으로 대충 인사를 넘겼다. 이어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 누른 채 보좌관을 물렸다.
“가드너. 그래서, 레베카의 딸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던가?”
이반 황제는 한숨으로 서두를 뗐다.
그리고 가드너. 그러니까, 제네비브에게 블라이스 가문의 생존 소식을 전달한 하인은 이반 황제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블라이스 가문의 생존 여부조차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블라이스 가문의 단독 소행으로 의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이반 황제는 책상 위 지구본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어 손가락으로 지구본 위에 그려진 카르디르를 톡톡 쳤다.
“하기야, 고작 카르디르인이 이 비극을 예상할 리 없지. 수고했네.”
이반 황제는 그의 충직한 신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귀빈궁에서 황제궁 인력은 이제 빼도 되겠어. 입 무거운 사람 몇 명만 계속 붙여서 주시하도록. 블라이스 가문이 조카에게 뭘 말할지 모르니 말이야. 물론, 그동안 잘 챙겨 주고. 몸과 마음이 편해야 입도 잘 열겠지. 블라이스 백작을 보기 전에 만날 테니, 일정을 잘 조정하도록 하게. 조사도 꾸준히 하고.”
“예, 폐하.”
“그리고 가드너, 자네는 황제궁으로 돌아오도록 하게. 유능한 신하가 없으니 하루가 고되군.”
이반 황제에게 칭찬을 들은 가드너는 그저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기쁨을 전했다.
“블라이스 가문은 언제 올 것 같나?”
“전갈을 보냈지만, ‘친우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다’라고 답신이 왔습니다.”
“……쯧, 시간 끄는 건 그 아비가 하던 짓과 똑같군.”
이반 황제가 혀를 차며 말했다. 가드너는 고위 중앙 귀족의 뒷담화에 말을 얹지 않았다.
“황후의 상태는 어떤가?”
“상심이 깊으십니다. 아무래도, 랜돌프 전하를 잃으셨으니…….”
차마 ‘코델리아 황후가 울다가 광증이 도진 것 같다’라고 말할 수 없었기에 가드너는 예쁘게 포장해 말했다. 하지만 충분히 설명이 되었는지, 이반 황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황후가 진정되면 의사를 보내 주게.”
“알겠습니다, 폐하.”
이반 황제가 이만 나가 보라는 듯 손짓하기에 가드너는 인사를 올리고 집무실을 나서려고 했다.
“아, 그리고…….”
가드너가 문을 열 때, 뒤에서 황제가 다시금 그를 불렀다.
“에드워드를 부르지.”
그가 냉철하게 말했다.
“황실 입적과 관련하여 말을 나눠야겠어.”
“예, 폐하.”
가드너는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소름 끼치도록 닮았었지.’
가드너는 수십 년 전 황제와 똑같이 생긴 혼외 자식을 떠올렸다.
황제와 똑같이 생긴, 지금까지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던 황자는 외견과 다르게 황궁과 도무지 안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 * *
눈을 뜨니 몸이 개운했다. 적당하게 따뜻한 햇살과 새가 지저귀는 소리. 제네비브는 불안한 마음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맡에는 어제 궁정 의사가 피워 준 안정제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제네비브는 빈 유리를 달구던 초를 끄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
아홉 시가 훌쩍 넘어갔다. 졸업 시험은 시작되었겠지. 지금 출발해서 도착한들 시험장에 들어서지도 못할 테다.
“졸업 시험을 미뤘을 수도 있어.”
어쩌면 칼리지까지 사고 소식이 전했을지도 모른다. 하루라면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시간이니까. 제네비브는 애써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했지만, 헛된 망상임을 진작 알았다.
‘졸업을 못 한다니.’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충격이 덜어지는 건 아니었다. 몸이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으면 반응조차 제대로 못 한다는 걸, 제네비브는 이제야 처음 알았다.
“……내가 제적이라니.”
침대에 엎어진 제네비브는 낮게 중얼거렸다. 현실적인 고민들이 제네비브를 찾아왔다.
부모님 얼굴은 어떻게 보지? 세인트 존 칼리지에 입학하려고 가문 재산을 얼마나 썼는데. 제적이면…… 시험을 정말 못 보려나? 졸업을 못 하면 결혼을 해야 하는데, 대체 누구와…….
불필요한 걱정이 불어났다.
제네비브의 마음을 알 방도 없는 하녀들은 그저 위에서 지시를 받은 대로 손님을 돌봤다.
‘에드워드는 잘 적응하고 있을까.’
자신만 해도 이토록 당황스러운데, 갑자기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에드워드에겐 이 상황이 얼마나 비현실적일지 상상이 안 됐다.
“에드워드, 아니, 황자 전하는 잘 계시나요?”
제네비브는 황자라는 호칭이 어색하다고 생각하며 테이블 위에 아침을 내려놓던 하녀에게 물었다. 어제 시중을 들던 하녀와 다른 사람이었다.
“황자 전하께선 귀빈궁에 머무르지 않으셔서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어린 하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제네비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서 나가는 걸 제외하곤 모든 게 가능하다던 하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침을 끝마친 제네비브는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황궁 안내를 받았다.
“달링 아가씨께서 머무는 곳은 귀빈궁입니다. 주로 외교 사절단이나 외국 귀족들이 머무는 궁이죠. 이곳은 유리 궁전으로, 처음 토대가 되는 궁전 중에서도 입구와 가장 먼 곳입니다. 그만큼 사적인 공간이죠.”
그는 황족 일가가 머무는 궁을 제외한 황궁 대부분을 소개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순응한 제네비브는 아본리아 황궁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눈을 돌리기만 해도 책에서 본 것 같은 예술 작품이 (전혀 즐길 기분이 아님에도) 눈을 즐겁게 했다. 마이언 아카데미조차 감히 견주지 못할 정도였다.
‘에드워드가 좋아하겠다.’
마이언 아카데미에서 신난 모습으로 디아스 시대와 프락티스 시대를 설명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앞으론 좋아하는 예술을 제약 없이 즐길 수 있는 에드워드를 생각하며 위안을 삼아야 하나, 제네비브는 고민했다.
“이쪽으로 나가시면 후원이 보이고, 그 뒤로는 새로 지은 영빈관과 온실이 있습니다. 동쪽으로 가시면 황실 도서관이 있고요. 어디로 가실까요?”
제네비브는 당연하게 도서관을 골랐다.
과연, 황실 도서관은 규모부터가 남달랐다. 세인트 존 칼리지 도서관의 족히 열 배는 되어 보였다. 시종은 그녀에게 줄로 쳐진 출입 금지 구역만 들어가지 말라 경고했다.
제네비브는 어제 그녀와 에드워드를 안내한 군인들을 떠올리며 도서관 2층을 향해 올라갔다. 그녀는 길이 막힌 도서관 구역은 피해 다니며, 어제 저와 에드워드를 황궁까지 데리고 온 군인들을 상기했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선 아본리아군에 대해 가르치지 않지.’
군사학을 가르치긴 하지만, 전쟁사(戰爭史)라고 과목명을 바꿔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르치는 게 거의 없었다. 세인트 존 칼리지는 사관 학교도 아니거니와, 까닥하면 국가의 취약점을 타국 귀족들에게 밝히게 될지도 모르니까.
제네비브가 고른 책은 흔하기 짝이 없는 아본리아 군대와 관련된 책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몇 번 스치듯 보기도 했다. 민감한 정보는 일절 없는, 아본리아 군대의 역사를 설명하는 지루한 책이었다.
어제 본 군인의 가슴에 찰랑이는 훈장들만 아니었다면 고를 리 없는 책이기도 했다. 제네비브는 건조한 눈으로 책을 빠르게 넘겼다.
“……?”
그리고, 빠르게 바뀌는 페이지 사이에서 익숙한 이름이 스쳤다.
“……밀포드?”
그녀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존재가 한순간에 시선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