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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78화 (78/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78화

밀포드.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제네비브가 애타게 찾던 이름이었다. 잘못 본 건 결코 아니었다.

“밀포드가 군인 출신이었어?”

제네비브는 안 믿긴다는 듯, 책 제목을 다시 펼쳐 보았다.

<아본리아군: 완전한 역사 I>

아본리아 제국 기사단의 해체부터 군대의 시작까지 적힌 책이었다. 성전을 방불케 하는 두꺼운 책은 그 내용조차 얼마나 방대한지 3권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차례 칼리지에서 아본리아 귀족 가계도를 외우고,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신념을 알아 갈 정도로 공부하였음에도 밀포드를 찾지 못한 데엔 그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찾아야 하는 출발점이 달랐다.

“귀족 서적에서 밀포드를 찾은 것부터가 틀렸어.”

밀포드가 당연히 귀족일 거라는 편협한 생각이 눈을 가렸다.

물론 음지의 인물일 거라고도 의심했지만, 그 뒤로 시험 준비와 크루즈 여행을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 제대로 찾아보지 못했다.

밀포드 조사 대신 대비하던 시험과 크루즈 여행에 실패했기에, 제네비브는 착잡해진 마음으로 다시금 밀포드를 찾아보기로 했다.

제네비브는 밀포드의 이름이 책의 중후반에 나왔다는 걸 떠올리며 목차를 폈다. ‘평민’과 관련된 단어가 언급된 목차와 페이지를 비교하던 제네비브는 비로소 책 후반부에 ‘평민’이 언급되는 목차를 찾았다.

‘귀족과 평민의 군부대 통합.’

책 7장의 제목이었다. 7장인데도 해당 내용은 상당히 뒤에 있었다.

“찾았다.”

한참 페이지를 넘기던 제네비브는 드디어 그토록 찾던 걸 발견했다.

[윌리엄 밀포드]

밀포드의 이름이었다.

제네비브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 사이에 검지를 끼워 두고는 7장의 첫 번째 단락을 읽었다.

[평민이 아본리아군에 입대하는 건 지위를 격상하는 방법 중 하나다. 공을 세우면 준남작 혹은 기사 작위까지 받을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영지와 함께 작위까지 받을 수도 있다…….]

이는 군대 대신 기사단이 있었던 시절에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옛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하는 지금, 작위 수여까지 받을 정도로 큰 공을 세울 만한 일은 없으니 준남작이 최선이리라.

황실 내 평민 기사단도 비슷한 맥락으로 평민들의 입단이 잦았다. 하지만, 평민 기사단의 시설이나 기반이 귀족 출신이 모인 기사단보다 훨씬 뒤떨어진다는 건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그렇담, 밀포드가 준남작이나 기사 작위를 안 받았다는 건가?”

제네비브는 작게 중얼거렸다.

준남작과 기사 목록 또한 찾아보았으나, 밀포드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도…….’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꼬박꼬박 그를 ‘밀포드 씨’라고 불렀다는 걸 기억했다.

권위와 예법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던 그가 ‘밀포드 경’이 아닌, ‘밀포드 씨’라는 호칭을 허락했다니.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과거의 자신이 나름대로 추리했던, 그러니까 밀포드가 음지의 인물일 거라는 데 설득력이 더해진다. 제네비브는 페이지를 넘겨, 밀포드가 직접적으로 언급된 문단을 읽었다.

[귀족과 평민의 군 통합은 카르티스 대륙에서 아본리아 제국이 제국력 705년, 가장 처음 진행했다.

아래는 황실 제2부대장 라몬 블렛 황태자와 황실 제5부대장 윌리엄 밀포드가 705년 만난 순간을 재현한 그림이다.]

숫자가 제1부대에 가까울수록 소속된 사람의 능력이 좋다는 게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직접적으로 황제를 엄호하는 제1부대, 과거에는 제1기사단이라고 불렸던 곳.

“올해가 제국력으로 752년이니까…….”

제네비브는 손가락을 접으며 연도를 계산했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의 일이었다. 47년 전 모습을 묘사한 그림은 환하게 미소를 짓는 라몬 황태자와 인상을 찡그리며 어두운 표정을 짓는 윌리엄 밀포드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기사 작위조차 못 받은 남자와 황태자의 조합이라…….’

듣기만 해도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첫 번째 군 통합이라니. 사이가 그렇게 좋았을 것 같지도 않은데. 혹시, 선대 황제에게 당한 걸 에드워드한테 화풀이하는 건가?’

그게 사실이라면 비열하기 짝이 없는 복수였다.

제네비브는 혹시나 밀포드가 더 언급되었을까 싶어 뒷장도 읽어 보았지만, 군 통합 이후 그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래도 정보는 많이 얻었어.’

밀포드가 군인이라는 것, 그리고 선대 황제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는 것. 허탕을 친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성과는 충분했다.

‘라몬 황제의 군 시절을 파 보면 뭔가 더 알 수 있겠지.’

제네비브는 책을 원래 자리에 꽂아 두었다. 아본리아 황실 족보를 볼 게 아니라, 아본리아군 관련 책을 읽어야 했다.

하여 제네비브는 책장 사이를 지나며 50년 전 아본리아 군대를 서술하는 책이 있는지 찾아봤다.

“달링 아가씨,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새로운 책을 꺼내려던 차, 그녀를 찾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네비브는 마치 들켜선 안 되는 짓을 한 어린애처럼 책장 사이에서 서둘러 튀어나왔다.

제네비브는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알현실로 향했다. 알현실 밖에는 문지기 둘과 어제 본 하인이 서 있었다.

“여신의 미소가 언제나 함께하기를.”

제네비브가 살짝 인사하자, 하인이 대뜸 미사 시간에서나 들을 법한 축복의 말을 그녀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순간, 미사를 보러 온 줄 알았다. 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제네비브는 이를 의아하게 여기며 인사를 흘려 넘겼다.

‘어제도 내게 이런 인사를 해 줬던가?’

하지만 하인은 그게 아니라는 듯,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께 하는 인사말입니다. 인사는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로 시작하고, 이후에 축복의 말을 하면 됩니다.”

“아…….”

자신에게 인사하는 줄 알았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후, 하인은 여러 주의 사항을 빠르게 알려 줬다. 황제가 부르기 전까진 고개를 들어선 안 된다, 인사는 간단한 컷시로 해도 괜찮다, 황제가 질문하지 않았는데 먼저 말을 걸어선 안 된다— 같은, 카르디르에서도 통용되는 예법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십여 개의 주의 사항이 끝나고서야 하인은 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냈다.

“카르디르 제국의 제네비브 달링 양이십니다.”

문지기들이 문을 열자, 화미한 알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가고, 입이 저절로 떠억 벌어졌다. 유리로 된 천장에서 내려온 햇살이 내부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순간 넋이 나가 자신이 저지른 무례를 깨달은 제네비브는 하인에게 배운 대로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발을 밟을 때마다 부드럽게 꺼지는 카펫은 분명 최상품이었지만, 그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가 조금 버거웠다.

‘아직 카르디르 국왕 폐하와도 알현해 보지 못했는데.’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타국의 왕을 알현하게 되다니. 제네비브는 이 어이없는 상황을 되뇌며 계단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여신의 미소가 언제나 함께하기를.”

“여신의 축복이 달링 여식과 함께하기를. 고개를 들라.”

중후한 목소리가 위에서 들렸다. 제네비브는 황제의 명에 따라 고개를 올렸다.

‘……와, 진짜 에드워드랑 똑같이 생겼다.’

아본리아 황제를 본 첫 감상이었다. 초상화를 보면서도 에드워드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실물로 보니 그에게서 에드워드가 훨씬 더 잘 보였다.

“워낙 큰 사건인지라 질문의 수가 많더라도 성실히 답해 주도록.”

이반 황제가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위기를 푸는 짧은 대화조차 없이 질문이 들어왔다. 전해 들은 것과 달리, 이반 황제는 직접 질문하지 않았다.

제네비브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황제 옆에 있던 보좌관으로, 그는 두루마리에 적힌 질문을 읽었고 그 옆에 앉은 사람이 대화 내용을 받아 적었다.

제네비브는 황명에 따라 질문에 성실히 임했고, 이반 황제는 턱을 괴며 제네비브와 보좌관을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블라이스 가문과 크루즈 여행 전에 따로 연락을 했습니까?”

“블라이스 가문이 크루즈 여행 참석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말을 했습니까?”

그런데, 질문은 가면 갈수록 어쩐지 황실이 사건의 배후를 블라이스 가문으로 추측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물론, 보좌관은 틈틈이 황궁에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을 묻기도 했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직감적으로 황실이 그녀에게서 듣고 싶은 건 토요일에 먹은 아침이나 처방 받은 안정제 따위가 아닌, 블라이스 가문을 의심할 적당한 이유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블라이스 가문이 반대파여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게다가 블라이스 가문은 제네비브가 가지 말라는 암시를 가득 넣은 편지를 보냈음에도 기어코 연회에 가겠노라 대답했었다.

“블라이스 가문은 저와 에드워드, 아니, 황자 전하를 보호자 자격으로 연회에 데려가는 데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황실에서 주최한 연회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네비브는 거짓 없이 털어놓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보좌관은 아쉽다는 듯 두루마리를 정리했다.

“달링 양께서는 어째서 그다음 날이 시험인데도 크루즈 여행에 가기로 마음먹었죠?”

이 질문은 당연히 나오리라 짐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인 만큼, 아마 자신에게 있어 가장 궁금한 질문일 테다.

“그건…….”

제네비브는 이반 황제와 보좌관을 한 번씩 보았다.

“이번 학기에 황자 전하와 많이 친해졌습니다. 제가 본래대로라면 이번 여름에 졸업을…… 하게 될 예정이었는데.”

기실 오늘 시험은 시험장에 얼굴만 비췄더라도 아무 문제없이 졸업하게 되었을 테다. 백지 시험지를 냈어도 그녀는 가산점으로 충분히 졸업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았기에 제네비브는 제적이 확정되었다.

제네비브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을 쌓고자—.”

하지만 제네비브는 말을 다 이어 가지 못했다. 뒤에서 굉음과 함께 알현실 문이 거세게 열렸기 때문이다.

알현실 안으로 흉흉한 표정의 블라이스 백작이 들어왔다.

“……숙부님?”

“블라이스 백작! 이게 무슨 무례인가!”

죽은 줄 알았던 숙부가 살아 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 이 순간을 그녀가 감사하게 여기는 것도 잠시, 블라이스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정녕 정신을 잃으셨습니까?”

그는 알현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마저도 자중한 편에 속한 양, 황족 모독을 듣고 기겁하는 제네비브와 다르게 블라이스 백작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심지어 흔한 일인지 보좌관이나 배치된 근위대 정도만이 형식적으로나마 그를 엄벌하려고 할 뿐, 정작 당사자인 이반 황제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달링 양, 대답은 잘 들었네. 이만 나가 보도록.”

넋을 놓고 아수라장이 된 알현실을 보던 제네비브는 얼떨떨한 와중에도 짧게 인사를 했다.

“제네비브, 후원에서 기다리거라.”

블라이스 백작이 원래 그녀가 알던 다정한 어조로 작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만큼은 왕좌에 앉은 이반 황제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제네비브는 근위대의 안내를 받으며 알현실 밖으로 나갔다.

“제가 제네비브와 마주치게끔 만들려고, 일부러 애를 불러들이신 겁니까?”

닫히는 알현실 문 사이로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블라이스 백작이 당장 결투라도 할 기세로 이반 황제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었다.

“달링 양, 이쪽으로 나가시죠.”

“……네.”

제네비브는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무거운 걸음을 떼어 알현실 복도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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