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79화
제네비브는 소란에서 벗어나, 후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블라이스 백작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에게 할 말과 남발할 질문이 많았다. 어째서 황실은 블라이스 가문을 의심하는지, 스테판은 무슨 이유로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무엇보다…… 숙부님께선 왜 크루즈를 안 타셨을까.’
기실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곧바로 떠올려야 마땅했지만, 제네비브는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심취한 꼬박 하루가 지나고 생생하게 움직이는 그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이유가 궁금해졌다.
물어볼 질문을 꾸린 제네비브는 후원에서 하염없이 블라이스 백작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그가 왜 다른 곳이 아니라 후원에서 만나자고 했는지를 알아챘다.
탐스럽게 핀 여름 꽃을 잘 관리한 정원은 두말할 것 없이 아름다웠지만, 블라이스 백작의 성질을 고려하면 고작 풍경이 예쁜 건 이유가 되지 못했다.
후원은 덤불이 낮아 누군가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엿들을 일 없거니와, 귀족들만 출입이 가능한 곳인지 오가는 궁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공개적으로 밀담을 나누기에 완벽한 장소라는 뜻이다.
흐르는 공기에서 묘하게 침울함이 맴돈다. 랜돌프 황태자와 직접 만날 일이 적은 귀빈궁은 그나마 밝은 축에 속했다. 무언가 사라진 듯, 황궁엔 공허함만이 느껴졌다.
‘설마, 숙부님이 잡혀가신 건 아니겠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제네비브는 합당한 의심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블라이스 백작이 그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 봤다. 황족 모독으로 잡혀가더라도 무방할 정도로.
제네비브는 블라이스 백작이 탑이나 지하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되레 처벌이 없다면 그 점이 더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 뒤로 십여 분이 지나서야 블라이스 백작이 후원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 제네비브.”
그는 아까보단 감정을 덜어 낸 듯 보였다. 분노가 식었는지, 깊게 팼던 눈가 주름이 한층 옅어졌다.
“잘 해결되었나요?”
“임시방편이지만…… 어느 정도 해결은 되었단다. 이미 머릿속으로는 배후를 결론 짓고 묻는 것 같았지만 말이야.”
블라이스 백작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황궁 안에서, 그것도 당사자 앞에서 황족을 모욕하고도 사지가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본리아 제국에서 블라이스 백작뿐일 거다.
“제가 폐하와 나눈 대화는 들으셨어요?”
“뒷부분만 조금 들었다. 로이드 놈의 목소리가 워낙 커야지. 차라리 대놓고 나를 의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낫겠더구나.”
블라이스 백작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리고…… 네가 보낸 편지는 잘 읽었단다.”
제네비브는 조금 크게 뜬 눈으로 블라이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다면 좋았을 텐데.”
그가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숙부님.”
“그래, 조카야.”
블라이스 백작은 애써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오웬과 겹쳐 보였다.
“카터 가문은…… 괜찮나요?”
제네비브는 입술을 달싹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왜 자신을 선상 파티에 데려가지 않았냐는 원망 섞인 투정이 아니라, 카터 가문의 안위가 먼저 튀어나왔다.
블라이스 가문이 크루즈에 올라타지 않은 것 자체가 두 번 일어나기 힘든 기적인 걸 알았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그래도 조금 더 기적이 일어났길 바랐다.
“……제프리. 그러니까, 카터 가문은.”
그가 친우의 이름을 소리 냄과 동시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가 주변이 금방 축축해졌다. 그 모습이 질문의 대답을 대신했다.
“……네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이는구나. 오웬에겐 비밀로 해 주련.”
블라이스 백작은 적절하지 못한 농담을 하며 눈물을 닦았다. 전혀 웃기지 않은 농담에 제네비브는 작게 미소를 짓곤 고개를 끄덕였다.
“다 내 탓이다. 네가 보낸 편지를 진작 알아먹었다면…….”
블라이스 백작이 후회를 토로했다. 그는 자신이 조카가 보낸 편지를 깊게 생각하지 않은 일을 후회하는 것 같았다.
만약 그 편지가 제 역할을 해냈다면 블라이스 백작이 이토록 힘들어하는 일이 없었을까.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기에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내 편지가…… 먹혔던 거야?’
그런데 대체 무슨 계기로 마음을 바꾼 걸까. 분명 그는 정당한 이유 없이 자신의 말을 무작정 따를 수 없다고 했는데.
“숙부님, 갑자기 무슨 이유로 제 편지를—.”
믿으셨어요?
질문을 쏟아 낼 준비를 끝낸 제네비브가 입을 뗐지만, 블라이스 백작은 화들짝 놀라며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쉿. 말조심하거라.”
그가 낮게 속삭였다.
“후원은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하지만, 황궁은 사방에 귀가 있어.”
그가 매섭게 말했다.
“우선, 스테판을 보내지 못한 건 미안하구나. 일이 생겨 스테판 대신 다른 집사를 보냈는데…… 일이 꼬였어. 원래 너와 에드, 그러니까 황자 전하를 블라이스 타운 하우스에 두려고 했는데 그 다른 집사가 너를 데리러 가야 한다는 걸 깜빡했단다. 역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스테판을 보냈어야 했는데…….”
당시 일을 떠올리자 머리가 아픈지, 블라이스 백작이 한숨을 푹 쉬었다.
“……위험한 일에서 멀어지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라 미안하구나. 하지만 제네비브, 네가 이 일을 어떻게 알았는진 몰라도 더 이상 어떠한 티도 내지 말거라. 이건 어른들의 일이야. 더 정확히는 아본리아 제국의 일이지. 나는 더 이상 네가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제네비브는 급하게 끼어들었다. 들어야 하는 답이 너무 많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칠 수 없었다.
“제네비브, 나는 내 누이를 떳떳하게 보고 싶어. 네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네.”
“그래, 지금 네게 말하면 레베카는 날 죽어도 용서하지 않을 게다. 부디 어른들의 일은 어른들이 끝낼 수 있게 도와주렴.”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제네비브의 귀엔 어쩐지 간청처럼 들렸다.
“……알았어요.”
제네비브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캐물을까.
“……이해해 줘서 고맙구나. 언젠가 네게 설명해 줄 수 있는 날이 올 테지.”
“…….”
“손을 줘 보겠니?”
블라이스 백작의 요구에 제네비브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블라이스 백작은 주변을 빠르게 살핀 후, 안주머니에서 비밀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블라이스 백작이 안주머니에서 꺼낸 건 작은 총이었다. 투박하고 작은 총은 주머니에 넣어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제네비브는 기겁을 하며 내밀었던 손을 재빨리 거두었다. 조금 전까지 위험한 일에 연루되지 말라는 사람이 맞나 의심이 되었다.
“그러니까, 숙부님. 방금 알현실에서 이걸 가지고 계셨던…….”
제네비브는 충격 받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르디르에 돌아갈 때까지 이걸 몸에 지니고 있거라.”
“전 지금 언제 칼리지에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는걸요.”
그 기약 없는 시간 동안 황궁에서 총을 갖고 있으라니. 들키면 그 자리에서 읊을 수 있는 죄목만 수십 개였다.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폐하께 말해 놨으니, 오늘 중으로 칼리지로 돌아가게 될 게야. 일이 끝나면 그 즉시 카르디르로 돌아가도록 하고.”
블라이스 백작은 기어코 제네비브에게 총을 쥐여 주었다.
“……제가 왜 이걸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제네비브는 총을 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던 블라이스 백작이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그날 에드워드, 아니, 황자 전하와 있었다는 사실이 제국 내에서 소문이 많이 퍼졌단다. 아직까지 세간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알 사람은 알고 있어. 그러니 널 누가 어떻게 해코지할지 아무도 몰라. 세상엔 미친놈들 천지란다. 네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지.”
그렇다고 평소에 총을 소지하고 다니자니 영 껄끄러웠다.
“차라리 방어 마법 같은 걸 거는 게 낫지 않아요? 그런 마법도 존재할 거 아니에요.”
“제네비브, 너는 방음 마법도 안 드는 체질인데 어떻게 방어 마법으로 안심할 수가 있니. 설령 방어 마법을 걸더라도 공격할 수단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해.”
“…….”
“그리고, 이제부터 사람들에게 네 취약점을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말거라.”
블라이스 백작이 말한 제 취약점이 방음 마법을 의미한다는 걸 제네비브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고작 방음 마법이 안 듣는 제 체질을 걱정하는 건 이해가 안 됐지만, 블라이스 백작의 태도가 워낙 진지했기에 제네비브는 차마 그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또, 이런 상황에서조차 제 안위까지 걱정하는 블라이스 백작을 보자니 조금 고맙기도 했다.
“신형 리볼버란다. 여섯 발 장전되어 있고, 잠금장치를 푼 다음에 방아쇠를 당기면 돼. 당연한 소리겠지만, 황궁에서는 되도록 들키지 말고.”
총이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쇳소리를 듣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끼쳤다.
“구, 궁금한 게 있으면 오웬이나…… 아무튼, 주변에 잘 쓰는 사람에게 물을게요.”
제네비브는 급히 그에게서 총을 받아 갔다.
* * *
블라이스 백작의 말대로 제네비브는 저녁이 되기 전에 황궁을 떠나게 되었다.
“황자 전하께선 안 오시나요?”
“황자 전하께선 황궁에서 며칠 머무르실 예정입니다.”
문득 에드워드의 행방을 묻자, 하인이 대답했다.
이로써 에드워드는 소설 전개대로 황실에 입적이 되고, 이후엔 정해진 수순으로 황태자 책봉을 받을 거다.
소설 속 에드워드가 황태자가 된 계기는 마무리가 되어 간다. 이제 제네비브의 앞에는 또 다른 과제가 펼쳐졌다.
에드워드가 본격적으로 흑화를 하게 된 계기. 제네비브가 선상 파티를 비롯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미래이자, 소설의 과거.
그녀가 아는 에드워드는 아무 이유 없이 180도 바뀔 사람이 아니다. 작위로 으스댈 사람이었다면 그를 찾아온 군인이 그를 ‘황자’라고 지칭한 순간부터 태도가 변했을 거다.
하지만, 그때도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아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조차 본인보단 자신을 걱정했다. 한때, 그의 미래를 두려워했던 스스로가 우스워질 정도로.
“…….”
크루즈 사고가 에드워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이라면, 이제 남은 건 그의 인격을 바꿀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의 성격이 돌변하게 된 시발점. 제네비브는 순하디순한 그에게 그런 참혹한 과거사를 붙인 작가가 원망스러웠다.
‘에드워드는…….’
제네비브는 이어지는 문장을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지난날. 제네비브는 그가 흑화하게 되는 계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너무도 참담하기에 애써 머릿속 한편에 밀어 두었다. 그래선 안 되었는데, 도저히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그러나 이젠 이것만큼은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야 했다. 대가가 무엇이던 크루즈 여행 때와 달라야 했다.
소설 내용대로라면, 에드워드는…… 강간을 당한다. 그것도, 같은 칼리지 학생에게.
정확한 날짜나 상황은 모른다. 애초에 소설에선 가볍게 지나가는 식으로 서술되었을 뿐이니까. 이 부분을 기억하는 자신이 신기할 정도였다.
절대로 총을 쓸 일 없을 거라는 생각은, 황궁에서 멀어짐과 동시에 점점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