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80화
제네비브는 황실 근위대의 호위를 받아 기차에 올랐다. 호위가 세인트 존 칼리지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걱정은 다행히 불필요했다.
황궁에서 정신없이 지나갔던 일련의 사건들 덕분에 잠시 옅어졌던 죄책감은 세인트 존 칼리지가 눈에 들어오자 다시금 짙어졌다.
저녁 무렵의 세인트 존 칼리지는 어둡고 공허했다. 언제나 일정 수준의 활기를 유지하던 학교는 한차례 소식이 퍼졌는지 침울함만이 맴돌고 있었다. 여름 동안 짧게나마 존재하던 맑은 하늘도 오늘따라 유독 흐렸다.
제네비브는 느리게 기숙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저거, 제네비브 아니야?”
휴게실을 지나칠 때, 그녀를 발견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봐, 살아 있잖아.”
학생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얹었다. 제네비브는 도망치듯 휴게실에서 멀어졌다.
그녀는 급히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문부터 걸어 잠갔다. 가족을 잃은 친구들을 직접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따라올 질문들 역시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
제네비브는 문에 기대어,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품 안에 있던 총을 꺼냈다.
황실 근위대에게 총을 소지했단 사실을 들키지 않은 것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졌다. 제네비브는 조심스럽게 실린더를 총에서 분리했다.
블라이스 백작의 말대로 모든 실린더엔 총알이 장전되어 있었다. 언젠가 봤던 것처럼 실린더를 돌리자, 원형의 실린더가 빙그르르 돌았다.
“이걸 내가 전부 쓸 리가…….”
무작정 가져오긴 했지만, 여섯 발을 전부 쏘는 자신이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 총알이 전부 어딘가에 박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제네비브는 장전된 총알을 전부 빼내었다. 위협은 껍데기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도 진짜 총알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겠지.”
블라이스 백작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의 불안감이 자신에게까지 전염된다. 생각을 바꾼 제네비브는 총알 하나를 장전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방법이었다.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제네비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총을 떨어트릴 뻔했다.
“잠시만!”
제네비브는 문을 향해 소리쳤다. 총과 총알을 재빨리 서랍장 안에 넣은 다음, 문을 열었다.
방문 너머로 오웬과 블랑카가 있었다. 두 사람은 그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온 건지 숨에 찬 모습이었다.
“제네비브!”
“이시스 여신님, 감사합니다…….”
오웬은 신에게 기도를 올리며 안심한 표정으로 제네비브를 끌어안았다. 그러다가도 못 믿겠다는 듯 떨어져 몇 번이나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
오웬이 이토록 놀란 모습은 처음이었고, 블랑카가 제 이름을 온전히 부른 것도 오랜만이었다.
“오웬, 숨 막혀…….”
제네비브는 자신을 끌어안는 오웬의 팔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한참 동안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서 곧 힘이 줄어들었다.
“크루즈 사고가 났다고 하지, 네 상태는 확인이 안 된다고 하는데 실종자 이름은 늘어만 가지……. 기다리고 있으라고만 말하는데…… 난, 정말 네가 죽은 줄, 아니…… 안전하니까 됐어.”
언제부터 울었는지, 오웬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진저, 정말 살아 있어 줘서 너무 고마워.”
블랑카가 제네비브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가도 붉게 부어 있었다.
“……제임스는?”
제네비브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제임스는…… 카터 공작령으로 돌아갔어.”
“…….”
카터 가문 사람들이 죽었으니, 제임스가 카터 공작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인…… 가?’
제네비브는 지금 이곳에 제임스가 없다는 사실에 안심한 자신이 싫어졌다.
그를 마주했을 때 어떤 말로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만 살아 있어서 미안하다, 살리지 못해 미안하다. 어떤 말이 나올지조차 감이 안 잡힌다.
“……어때 보였어?”
제네비브는 힘겹게 물었다.
“…….”
두 사람은 침묵으로써 대답했다. 제네비브는 더 질문하지 않았다.
“죄책감 갖지 마. 네 탓이 아니야.”
제네비브의 표정을 읽은 오웬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티가 났나. 제네비브는 얼굴을 푹 숙였다.
“얘 말대로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 설령 알았더라도, 기상 이변인데 그걸 어떻게 막아.”
블랑카는 급하게 오웬의 말을 지원했다.
“응…….”
친구라면 마땅히 건넬 만한 위로인 걸 알았지만, 우습게도 마음의 짐이 덜어졌다.
“에디는 괜찮아? 둘이 같이 왔어?”
블랑카가 제네비브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둘이 크루즈를 안 탄 거야? 아버지께서 아무것도 안 알려 주셔서…… 어려우면 말 안 해도 돼.”
오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제네비브는 주말 동안 일어난 일을 대강 요약해서 설명했다.
어쩌다 크루즈를 놓치게 되었는데 길을 몰라 주변 여관에서 머물렀다. 토요일에 곧바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몸살에 걸려 움직이지 못했다. 어제, 그러니까 일요일에 돌아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황실은 왜 나타난 건데?”
황실에서 에드워드를 찾았다는 대목에 들어서자, 오웬이 의아하게 물었다.
“……에드워드가 황자래.”
혹여 누군가 들을까, 제네비브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응?”
오웬과 블랑카는 제각기 다른 반응을 내보였다.
“이게 무슨……. 내가 아는 에드워드가 황자라고? 다른 에드워드가 아니라?”
그들의 반응을 보자, 제네비브는 아직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마. 아직 공개는 안 된 것 같으니까……. 우리가 아는 2학년 에드워드가 맞아.”
“말도 안 돼…….”
블랑카는 쓰러지듯이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급기야 황족에게 해선 안 되는 일을 한 과거의 행동들이 떠올랐는지, 둘 다 당황한 것 같았다.
제네비브는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공개되기 전에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시험은 어떻게 됐어?”
제네비브는 아직 충격이 안 가신 두 사람을 보며 궁금한 사항을 물었다. 오면서 대화를 나눈 사람이 오웬과 블랑카뿐인 지금, 그녀가 알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오웬과 블랑카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둘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제네비브의 눈치를 봤다.
“그게, 우선 크루즈 일이랑 엮인 게 확인된 애들은 집으로 보냈어.”
“그리고?”
제네비브는 재촉하듯 물었다.
“아본리아 학생들은 시험이 미루어졌어. 1, 2학년들이 보는 날에 같이 봐. 보든 말든 본인 선택이라는데, 물론 안 보면 졸업을 못 하겠지만…….”
“시험이 미뤄진 거야?”
“아니. 유학생은 예정대로 시험을 봤어. 시험은 다섯 시에 끝났고…….”
오웬은 작게 자신도 오늘 시험을 봤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그 말은, 제네비브가 결국 제적 처리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데, 예외로 쳐 주지 않을까?”
블랑카는 제네비브의 희망 사항을 그대로 말했다.
다른 때처럼 재시험을 치를 수 있을지 모르고, 다른 아본리아 학생들처럼 밀린 시험을 같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이반 황제에게 배려란 게 존재한다면 그가 직접 칼리지에게 연락을 취했을 거다.
“진저, 어디 가?”
“……교수님을 뵈어야겠어.”
망상을 끝마친 제네비브는 그게 이루어지기를 무작정 기다리는 대신, 교수들을 직접 찾기로 결심했다.
가만히 앉아 학교가 저를 동정하여 재시험의 기회를 주거나 황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다. 크루즈 사건이 그녀에게 가르친 게 하나 있다면, 성과는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고 언제나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는 거다.
제 감정을 정리할 틈도 없이 제네비브는 교수들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채점하느라 정신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제네비브는 방문을 감행했다.
‘달링 학생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어렵네요. 학교 규정이란 게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면 모르겠는데, 졸업 시험이라서…….’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전부 똑같았다. 그나마 헤더스 교수만이 해결책을 줬다.
“총장님의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할 것 같군요.”
헤더스 교수는 제 퇴근을 막는 제네비브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총장님의 허락을 받으면 될까요?”
“우선은 그렇겠죠…… 하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방문하시길 바랍니다.”
헤더스 교수는 ‘늦었으니’를 강조하며 말했다. 또한, 벽걸이 시계를 보며 눈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아본리아 학생의 졸업 시험을 미루는 것도 회의 끝에 나온 결론이란 걸 알아주세요. 저라면 큰 기대는 안 하겠습니다.”
헤더스 교수는 냉정하게 말했다.
* * *
제네비브는 그다음 날, 헤더스 교수가 말한 대로 총장 사무실을 찾아갔다.
입학 이후, 처음 찾아온 총장 사무실은 마치 가문 수장의 집무실을 연상케 했다. 벽 한쪽에는 모두가 이름은 알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는 학교의 설립자 성자 존의 초상화가 장식했고, 그 반대쪽은 책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이 장식했다.
중앙에 있는 소파 상석에는 세인트 존 칼리지의 총장이 앉아 있었다.
“제 방문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장님.”
제네비브는 예의 바르게 말했다.
“편하게 데클렌이라고 불러요. 여기에 앉으면 된답니다.”
“네.”
데클렌 총장은 인자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반겼다. 제네비브는 그의 안내대로 움직였다.
“왜 찾아왔는지 알아요. 헤더스 교수가 미리 언질을 해 뒀습니다.”
“…….”
“슬픈 일이죠. 가족을 잃은 학생들의 슬픔을 감히 상상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제네비브 학생처럼 유능한 인재가 그런 일에 엮일 뻔했다는 것도요.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에 그저 이시스 여신님께 감사하죠.”
“네…….”
데클린 총장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교칙은 교칙입니다. 만약 제네비브 학생이 그 크루즈에 탔다가 살아서 온 거라면 칼리지도 후속 조치를 취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네비브 학생은 크루즈에 타지 않았죠.”
데클린 총장은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제네비브는 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네비브 학생은 곧바로 돌아올 수 있음에도 돌아오지 않으셨죠. 월요일에 시험이란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그건…….”
“물론, 황궁에 묶여 있었단 소식은 들었습니다.”
데클렌 총장은 부드럽게 말했다.
“제네비브 학생의 부모님이 3년 전에 똑같은 소파에 앉았다는 건 알고 있나요?”
“…….”
모르는 일이었다. 부모님의 이야기가 뜬금없다고 생각하면서 제네비브는 고개를 저었다.
“훌륭한 아이고, 실망시킬 일이 없다고 거듭 말씀하셨죠. 포가츠였나, 포가트였나. 카르디르의 아카데미가 폐교되면서 다양한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입학을 원했지만, 직접 찾아와 부탁한 사람은 달링 후작 부부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그 말을 믿기로 했습니다.”
“…….”
“저는 이미 달링 학생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줬습니다. 또 한 번의 기회를 줄 필요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데클렌 총장은 여상하게 말했다.
“……여기까지가 제 입장입니다. 하지만, 황실에서 편지가 왔어요.”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편지 앞면에 눈에 익은 황실 문장이 찍혀 있었다.
“칼리지는 제네비브 달링 학생에게 제적 대신, 유급을 권하고 싶습니다.”
“유급…… 이요?”
제네비브는 데클렌 총장을 보았다. 그는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