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82화
제네비브가 손님이 누구냐고 거듭 물었지만, 스테판은 확답 대신 그저 미소만 띨 뿐이었다. 답답함에 독심술을 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즈음, 두 사람은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제네비브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상대는―.
“……엄마.”
당연하게도 달링 후작부인이었다.
“오, 제네비브!”
달링 후작부인은 딸을 보자마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니,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무한한 안도감이 몸속에서 샘솟았다. 다 털어놓은 줄 알았는데 저도 모르게 남았던 불안감과 초조함, 그리고 응어리진 죄책감이 전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기분이 든다는 게 신기했다. 달링 후작부인은 넓은 치마폭을 들어 올리고는 제네비브 가까이 다가왔다.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단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달링 후작부인이 딸의 양 뺨을 감싸 쥔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제네비브를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끌어안아, 딸의 이마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제네비브는 그에 화답하듯 팔에 힘을 줬다. 친숙한 향수 향 아래로 느껴지는 찬바람 냄새가 긴장이 풀리게 했다.
“오, 세상에. 손이 떨고 있구나. 제네비브, 괜찮니?”
제네비브의 머리는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좌우로 움직였다.
“…….”
괜찮지 않았다. 괜찮을 리 없었다.
하지만, 말을 하면 또 궁상맞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해결해 주는 것 하나 없는 눈물을 보이는 것도 이젠 적당히 해야 했다.
“나도 참, 멍청한 질문을……. 무사해서 다행이야. 엄마는 그걸로 충분해.”
달링 후작부인은 제네비브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제네비브는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우리 딸, 많이 힘들었지.”
하지만, 그 다짐은 문장 하나에 무너졌다.
“……언제 오셨어요?”
한참이 지나서야 울음을 그친 제네비브는 달링 후작부인이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먹먹한 목소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달링 후작부인은 사용인들이 준비한 과일을 그녀의 입에 물렸다.
“오전에 도착했단다.”
제네비브는 시원한 수박을 오물거리며 어머니가 하는 말을 경청했다.
달링 후작부인의 대답으로 시작한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무난하게 이어지는 대화는 달링 후작부인의 공이 컸다.
‘말을 어떻게 꺼내지…….’
졸업을 못 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달링 후작부인은 그쪽엔 그리 큰 관심이 없다는 듯 언급하지도 않았다.
유급과 제적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을 알리려고 입을 뗄 때마다 목이 메었다. 부모님이 자신을 세인트 존 칼리지에 입학시키기 위해 총장과 면담했다는 것까지 떠오르자, 더더욱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저, 졸업 못 해요.”
제네비브는 담담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분명 오웬과 블랑카에게 이 소식을 말했을 땐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서 제네비브는 자신이 처한 이 비현실적인 현실에 수긍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모친에게 이야기하자니 그간 묵혀 놓았던 설움이 나왔다. 졸업을 위해 썼던 제 시간과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된 기분이었다.
제네비브는 데클렌 총장과 나눈 대화를 전부 알려 줬다. 달링 후작부인은 귀를 기울여 그녀가 하는 말을 전부 들었다.
“데클렌 총장과 그런 대화를 나눴구나.”
“네…….”
제네비브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달링 후작부인은 제네비브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재시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된다는 거니?”
“네, 그런 것 같아요.”
제네비브는 데클렌 총장이 얼마나 확고해 보였는지 말했다.
“……엄마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오, 제네비브. 여기서 중요한 건 내 의견이 아니야. 네가 어쩌고 싶은 거지. 나는 네 선택을 지지한단다. 그건 네 아버지도 마찬가지이고.”
달링 후작부인이 말했다.
“이 어미가 걱정하는 건 하나란다. 과연, 내가 우리 딸을 또 타국으로 보낼 수 있을까.”
“…….”
“그리고 잘 적응할지, 친구는 잘 사귈지, 괴롭힘은 안 당할지, 밥은 잘 챙겨 먹을지…….”
달링 후작부인은 장난스럽게 걱정을 나열했다. 그녀는 식사는 제대로 하냐며, 어렸을 때처럼 제네비브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카르디르로 돌아가서 여름 동안 생각해 보자꾸나. 고민할 시간은 많으니까.”
“카르디르로요?”
“그래, 녹서스로 돌아가야지. 계속 머무는 것도 필이 불편할 테고. 제네비브? 어디로 가니?”
달링 후작부인은 갑자기 일어서는 제네비브를 보며 물었다.
“숙부님께도 인사를 해야겠어요. 엄마, 곧바로 돌아올게요.”
제네비브는 응접실을 나와 블라이스 백작을 찾았다.
지금 제네비브는 카르디르로 돌아가선 안 되었다. 제네비브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아직 아본리아에 있는 이유가 블라이스 백작 덕분임을 알았다.
‘지금 갈 수 없어.’
무엇보다 제네비브에겐 아본리아에 남은 일이 있었다.
“제네비브, 언제 도착했느냐.”
블라이스 백작이 제네비브를 보며 말했다.
“방금 도착했어요. 숙부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아니다. 가족끼리 재회가 먼저지. 방금 오웬이 왔단다. 지금 오웬은 헬레네를 보러 갔을 거야.”
이어 그는 스테판이 그랬듯 오웬의 머리에 대해 짧게 불만을 토로했다.
“내 걱정 때문에 부른 거니, 오히려 고마운 건 내 쪽이지.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단다.”
“…….”
“이제 레베카도 왔으니, 카르디르로 돌아가야지.”
블라이스 백작은 말을 빙빙 돌리는 대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역시, 제네비브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블라이스 백작은 제네비브가 안전하게 카르디르로 돌아가길 바라서 달링 후작부인을 부른 것 같았다.
“저…….”
제네비브는 작게 그의 말에 끼어들었다.
“아직 못 가요.”
제네비브가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이곳에 할 일이 남았어요.”
제네비브는 진지하게 말했다.
“……크루즈 침몰로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식에 가고 싶어요.”
제네비브는 자신의 약한 부분을 살짝 드러냈다.
아본리아에서 머무는 가장 주된 이유는 에드워드가 강간당하는 일을 막는 거였지만, 설령 그 일이 없더라도 제네비브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나 지금 제네비브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제네비브, 그러면 네가 힘들 테야.”
블라이스 백작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에요.”
“……그래, 알았다.”
다행히 블라이스 백작을 설득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장례식까지만 참석하렴.”
“네. 아, 그리고…….”
“…….”
“에드워드 전하의 일정을 알고 싶어요.”
“…….”
“황실이 아직 공개하지 않은 것 같아서…… 카르디르로 돌아가기 전에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요. 알아내는 거, 숙부님은 가능하지 않으세요?”
에드워드가 황궁을 나왔을 때, 그때가 중요했다.
제네비브는 거짓과 진실을 적절하게 섞어 가며 블라이스 백작의 약속을 받아 냈다.
* * *
또 다른 황자가 존재한다는 소식은 용케 퍼지지 않았다. 후계를 걱정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이에 황실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황제는 떠나간 이들을 위한 추모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며 비극을 기회로 삼지 말라고 지적하는 것으로, 자신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깡그리 무시했다.
‘대체 왜? 크루즈 사고 이후 곧바로 에드워드가 황자로 밝혀지는 게 아니었나?’
미래를 아는 제네비브로서는 아직 후계가 밝혀지지 않은 이 상황이 낯설었다.
물론, 소설에선 에드워드가 언제 황자로 임명되었는지 정확히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후계를 공개하는 편이 황권에 안정을 가져다주고, 소설에서도 황태자로 나타나니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진작 황태자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오웬과 블랑카에게 에드워드의 정체를 밝혔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입을 놀렸다는 후회가 슬그머니 들었다(제네비브는 두 사람이 소문을 만들기 편이 아닌, 모으는 쪽에 가깝다는 것에 위안을 얻기로 했다).
에드워드의 소식은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의 소식을 기다리며 블라이스 가문과 함께 장례식을 참석했다.
사망자는 대부분 블라이스 가문과 친한 관계 같았다. 블라이스 백작 부부가 참석하는 장례식이 늘어날 때마다 두 사람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살아남은 블라이스 가문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들에게 원망을 퍼붓는 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블라이스 백작과 백작부인은 묵묵히 그들의 슬픔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힘들 거라는 블라이스 백작의 말은 사실이었다. 블라이스 가문이 자신이 받아야 마땅한 비난과 슬픔을 대신 받는 것 같았다.
제네비브는 검은색 상복을 입은 사람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다시 일었다. 알고 있음에도 막지 못했다는 것. 그럴 때마다 제네비브는 새로이 다짐했다. 에드워드를 구하리라고.
그렇게 제네비브가 황자가 공개되지 않은 아본리아 국정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이, 황궁에서도 제네비브와 비슷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에드워드 군, 대체 왜 작위를 받지 않겠다는 거죠?”
황제궁의 총괄 사용인이자 한동안 에드워드의 수발을 들게 된 가드너가 제 새로운 주인을 보며 난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국에서 가장 권력이 많은 사람이 되는 자리입니다. 전하께선 황실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저는 작위가 없습니다. 말을 낮춰 주시길.”
가드너는 답답했다. 황제가 될 자리다. 거기에 가드너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평민, 에드워드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작은 괴롭힘부터 신분에서 오는 차별까지, 구태여 평민의 삶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한숨을 참은 가드너는 에드워드를 보았다.
촌스러운 머리카락과 두꺼운 안경테 아래로 수십 년 전, 이반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충성을 다하겠노라 다짐한 이반 블렛의 모습이. 현 황제를 쏙 닮은 에드워드가 차기 황제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된다는 건가.
에드워드를 설득하라는 이반 황제의 명도 존재했지만, 가드너는 진심으로 에드워드가 황태자가 되기를 바랐다. 외모가 불러온 얄팍한 다짐은 곧 진심이 되었다.
대체 그의 발을 붙잡는 건 무엇인가?
만약 가드너가 지금 에드워드의 생각을 알았더라면 그는 물밀듯 밀려오는 실망감에 한평생 몸을 담갔던 황궁을 나가, 영원토록 돌아오지 않았을 거다.
‘선배한테 설명해야 하는데.’
에드워드가 황자가 되는 걸 꺼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제네비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변화를 싫어했다. 정확히는 에드워드, 자신의 변화를. 연회 동안 잠깐 꾸민 것으로 저와 한동안 거리를 둔 사람인데 갑자기 황자니, 황족이니 하면 제네비브가 당황할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속인 거니까.’
의도치 않은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거짓말이란 사실은 변함없었다.
황실이 자신을 찾은 뒤로 제네비브가 저를 어떻게 대했는가. 그녀는 잘 배운 귀족 여식처럼 그에게 존대하며 거리를 뒀다. 아마 자신이 황자가 되면, 그녀와의 관계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황자로서 가야 할 행사가 많습니다. 당장 카터 가문의 장례식부터 시작해서―.”
“……카터 가문이요?”
에드워드가 익숙한 성씨를 되물었다. 그러자 가드너는 설득할 거리를 잡았다는 듯, 그 장례식에 참석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했다.
가족의 애정을 받아 본 적 없는 에드워드는 가족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깊을지 가늠이 안 됐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제임스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주고 싶었다.
“…….”
그리고, 다른 장례식은 몰라도 카터 가문의 장례식만큼은 제네비브가 올 것 같았다. 제네비브에게 모든 상황을 직접 설명하고 싶었다.
“……카터 가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습니다. 그 뒤에 다시 얘기하는 건 안 되나요.”
에드워드는 가드너에게 물었다.
설득에 약간이나마 진전이 생기자, 가드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