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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83화 (83/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83화

날은 매정할 정도로 맑았다.

화창한 날씨와 비옥한 토지로 명성이 드높은 카터 공작령은 이 순간에도 그 모습을 뽐냈다. 싱그러운 나무와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에서 내렸을 때, 발목에선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쓸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작고 가벼운 리볼버가 오늘처럼 묵직하게 느껴질 줄 몰랐다. 제네비브는 권총집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에드워드 전하께서 오늘 오신다는 말이 있더구나.’

블라이스 백작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제네비브는 곧바로 총을 챙겼다.

에드워드가 그 사건과 엮일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최선이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에드워드가 황궁 밖으로 나온 이 순간부터 제네비브는 모든 상황을 주시해야 했다.

때마침 달링 후작부인이 블라이스 백작부인과 함께 먼저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카터 공작과 친분이 있는 것 같았다. 장례 의식 이후, 관 옮기는 걸 돕기로 한 블라이스 가문 남자들은 제임스를 보조했다.

“진저, 여기야.”

제네비브는 블랑카와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어?”

“에드워드가 온다고 들었는데, 안 보여서…….”

“이미 신전 안에 계시는 거…… 내 말은, 그러니까 먼저 들어간 거 아니야?”

블랑카는 어색하게 말을 낮췄다. 아직 그의 상황이 공개되지 않았기에 두 사람 모두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제임스는 괜찮을까?”

“이럴 때 우리가 옆에 있어 줘야지.”

제네비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간 수없이 많은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지금처럼 마음이 사무치도록 죄스러운 건 처음이었다. 그 감각에 침식되지 않기 위해, 제네비브는 안간힘을 썼다.

들어선 신전 내부는 엄숙했다. 제임스는 어느 남자의 곁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진한 금색 머리카락을 봐서는 제임스의 친척 같았다. 사제복을 입은 그는 제임스의 등을 두들기며 손님을 맞이하는 걸 돕고 있었다.

각지에서 온 여러 귀족이 제임스와 악수를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새로운 카터 공작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제네비브와 블랑카는 제임스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제임스.”

“다들 안녕.”

가까이서 본 제임스는 더욱 지쳐 보였다. 그는 굳이 웃으려고 하지 않았고, 늘 보이던 예의 바른 미소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제네비브와 블랑카는 그런 제임스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제임스는 혼이 나간 사람 같았다. 언제나 단단했던 그의 어깨는 힘없이 축 늘어졌다.

“…….”

자신이 일을 그르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대체 무슨 낯짝으로 이곳에 온 걸까. 제네비브는 바쁘게 제임스를 위로하는 블랑카의 말을 감히 동조하지도 못했다.

“와 줘서 고마워.”

긴 침묵을 지키던 제임스가 말했다. 블랑카는 제임스를 가볍게 안아 줬다.

“제네비브, 너도……. 그래, 별일 없어서 다행이야.”

“……응.”

제임스는 마치 스스로를 세뇌하듯, ‘다행이다’를 서너 번 되풀이하며 중얼거렸다.

그 어떤 말로 제임스를 위로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왜 너만 살아남았냐며 자신을 원망했더라면 심란함이 줄어들었을까.

“제임스 친구분들도 와 줘서 고마워요. 앉으시죠.”

그때, 사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제네비브와 블랑카를 자리로 안내했다.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안내 받은 곳으로 가 앉았다.

“…….”

제국에서 치러지는 마지막 장례식이었다. 오르간 연주 소리가 신전 안을 채웠다. 신전 자리가 부족해 서 있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조문객 중에는 세인트 존 칼리지 학생들도 있었다. 교복이 아닌, 검은색 정장을 입은 모습이 어색했다. 폴로 클럽 부원처럼 반가운 얼굴도 있었고, 찰스 콜린스처럼 보고 싶지 않은 조문객도 있었다.

“…….”

예고 없이 찰스 콜린스를 본 제네비브는 불쾌감을 느꼈다. 제임스와 찰스의 친분을 찾으려던 제네비브는 곧 콜린스 가문의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떠올렸다.

‘황제파 내에선 블라이스 가문 정도의 입지가 있으려나.’

쓸데없는 타국 정세를 떠올리며 제네비브는 몸을 돌렸다.

“…….”

그와 동시에,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쉽게 찾았다.

군중 속에서 그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을 찾아내면 끝나는 일이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에드워드였다. 제네비브는 재회의 감정을 되새기며 에드워드를 꼼꼼하게 살폈다. 다행히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

그러던 중, 에드워드와 눈이 마주친 제네비브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체했다. 황궁에서 머문 시간이 썩 괜찮았는지, 에드워드의 안색은 전보다 훨씬 밝았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그런 위험한 짓을 벌일 정신 나간 사람은 없겠지.’

잠시나마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장례 기도가 시작됐다.

* * *

방금 인사한 게 맞나?

제네비브와 눈을 마주친 에드워드는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짧은 인사를 끝으로 제네비브는 몸을 고쳐 앉아 장례 기도를 들었다.

“…….”

주체 못 할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제네비브가 전처럼 제게 인사를 해 줬다. 고작 인사 하나에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게 신기했다. 잘만 설명한다면 제네비브가 제 상황을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제프리 카터와 일라이자 카터, 그리고 빈센트 카터는……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에드워드는 기도를 경청했다. 사제는 자신이 타계한 카터 공작과 사촌 관계임을 밝히며, 고요한 목소리로 떠나간 이들의 미담을 전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한 영혼은 이시스 여신의 품으로 돌아가니까요.”

에드워드는 기도문을 들으며 첫 번째 줄에 앉은 제임스를 보았다. 그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장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멀쩡하게 앉아 있는 게 대단할 정도였다. 훌쩍이는 몇몇 조문객과 다르게, 제임스는 텅 빈 눈으로 가족이 누운 관을 보고 있었다.

이제 카터 공작이 된 제임스는 마음을 추스를 여유조차 없는 것 같았다. 필시 그에겐 이보다 더 갑작스러운 비극도 없을 테니.

긴 기도가 끝나고, 그다음 절차가 진행되었다. 잠시 비틀거리던 제임스는 블라이스 백작의 부축을 받으며 꿋꿋이 관 앞으로 갔다.

그는 카터 가문의 문장을 수놓은 천을 관에 덮었다. 진한 푸른색 깃발이 관 위로 느리게 펼쳐졌다. 저 금빛 사자 자수만이 신전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색이었다.

곧, 커다란 관 세 개가 신전 밖으로 나왔다. 관은 살아생전 카터 가문과 친분이 두터웠던 이들이 옮기는 걸 도왔다. 블라이스 백작은 제임스와 함께 선대 공작의 관을 들었고, 휴고와 오웬은 빈센트의 관을 옮기는 걸 도왔다.

“…….”

에드워드가 조금 움직이자, 그를 따라온 호위가 은연중에 조문객을 밀쳐 내 에드워드의 동선을 확보했다. 호위병 여섯을 붙여 주겠다는 걸 하나로 줄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센트의 관까지 전부 밖으로 나오자, 신전을 짓눌렀던 무거운 분위기는 옅게나마 사라졌다. 카터 가문의 친인척만이 신전 뒤편에 있는 가문의 공동묘지까지 따라갔다. 나머지 조문객은 카터 공작저로 돌아가 준비된 리셉션에 참석했다.

제임스와 대단한 친분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에드워드는 리셉션으로 향하는 인파를 따르려고 했다.

“……선배?”

“…….”

제네비브가 그를 붙잡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제네비브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지만, 조문객은 두 사람이 입구에 가만히 서서 대화를 나눌 여유 따위 주지 않았다.

둘은 신전을 빠져나오는 인파에 떠밀려 걸음을 옮겼다. 제네비브가 멀어지려고 하자,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에게 잡힌 손에 힘을 주며 제 쪽으로 당겼다.

에드워드는 호위병을 의도치 않게 따돌렸다. 다른 조문객과 섞인 두 사람은 신전 정원으로 빠져나왔다. 제네비브는 그가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자신이 황자라는 걸 자연스럽게 납득할까. 준비한 말은 수없이 존재했지만,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무슨 일 없었나요?”

“…….”

하지만, 일주일은 제네비브가 이 상황을 그녀대로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처럼 보였다. 제네비브는 그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존대를 했다.

그녀에게 존대를 들은 에드워드는 무엇보다 호칭을 정리하고 싶었다.

물론, 에드워드 개인의 문제였다. 제네비브는 선을 그은 어투로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전처럼 다정한 목소리였다.

에드워드는 그저 특별한 이유 없이 제네비브가 제게 존대하는 게 싫었다. 제네비브가 존대를 할 때마다 관계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제네비브 선배.”

“네.”

“제 이름, 불러 줘요.”

그래서, 에드워드는 유치한 투정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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