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84화 (84/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84화

에드워드의 뜬금없는 요구에 제네비브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다 그가 채근하는 눈빛을 보내고 나서야, 에드워드의 이름 뒤에 붙일 적당한 호칭을 찾았다.

“에드워드 전하.”

제네비브는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잠시 밝아졌던 그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가 온전히 이름만을 불리고 싶어 한다는 건 알았지만, 제네비브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편하게 불러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과 황족 앞에선 예법을 따라야 한다는 십여 년간의 교육이 충돌해 타협한 결과였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마음에 안 드는지,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이름만요.”

에드워드가 재차 말했다.

“……에드워드.”

황족이란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이름을 부르는 것과 알려진 뒤, 이름을 부르는 건 확실히 달랐다. 엄청난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에 제네비브는 사뭇 긴장이 됐다.

“그래서, 어떻게 보내셨나요.”

제네비브는 태연한 척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했지만, 에드워드는 존대조차 싫었는지 말을 낮춰 달라고 했다.

그를 알고 지낸 시간 동안 말을 편하게 해 온 덕분에 그 부탁은 호칭을 빼고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쉽게 느껴졌다.

“전 별일 없이 지냈어요.”

에드워드는 예전처럼 제네비브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며 존칭으로 불렀다.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제네비브는 결국, 제가 처한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여, 제대로 된 대화는 짧은 호칭 정리 뒤에나 시작이 되었다.

“황궁에서 못 봐서 걱정했어. 계속 황궁에 있었던 거야?”

대뜸 ‘누가 너를 덮치려고 하지 않았니?’라고 물을 순 없었기에 제네비브는 궁금증을 간접적으로 해소하기로 했다.

에드워드가 머물렀던 곳이 (그의 신분이 알려진) 황궁이라는 점과 지금 그의 겉모습을 봐서는 큰일이 생긴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절차가 복잡해서 외출이 어려웠어요. 이것도 겨우 나온 거거든요.”

다행히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구나.”

“네…….”

에드워드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 사이에선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마치 상대가 먼저 말하길 기다리듯, 둘은 연신 눈치를 봤다.

끝내 침묵이 주는 어색함을 견딜 수 없었던 제네비브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황태자가 되는 거야?”

제네비브는 조금 놀란 체하며 물었다. 기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 번 질문을 하니, 궁금한 게 쉴 새 없이 피어났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황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왜 황실은 지금껏 황자가 한 명 더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간에 공개하지 않고 있는 걸까.

“갑자기 일이 그렇게 흘러가서 너도 많이 당황했겠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추궁하는 대신 그를 격려하듯 팔을 가볍게 쳤다. 에드워드가 제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에드워드도 그 나름대로 이 상황이 갑작스럽게 다가왔을 거다.

“……선배는 어때요?”

에드워드가 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황족이란 거요. 어떻게 보면 선배를 속인 거니까…….”

에드워드가 제네비브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기분, 안 나쁘셨어요?”

에드워드는 마치 제네비브의 기분이 상했을 거라고 결론을 지은 것 같았다.

“네가 황족이 되는 게 기분 나쁠 일이야?”

제네비브는 여상히 두 눈을 깜빡였다.

에드워드가 황자가 된다는 건 곧 소설 내용에 따라 끔찍한 미래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신호이긴 해도 기분 나쁜 일은 결코 아니었다.

만약 황궁에 들어간 뒤, 사건이 터져 성격이 바뀌었다면 당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제네비브 앞에 있는 에드워드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엄격히 따지자면 속인 사람은 오히려 내 쪽이지.’

그가 황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모르는 척했으니까.

“네가 에드워드라는 사실은 안 바뀌었으니까. 오히려 안 까먹고 아는 척해 줘서 영광인걸.”

제네비브는 그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대답을 들은 에드워드는 안도한 듯, 경직된 몸의 긴장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제가 선배를 어떻게 잊어요.”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

다소 놀란 제네비브는 고개를 올렸다. 부드러운 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을 계속 보자니 심장이 울렁거렸다.

어떻게 대꾸할지 몰라서 망설이는 제네비브로서는 고맙게도 에드워드가 주제를 바꿔 주었다.

“먼저 찾아 줘서 고마워요. 할 얘기가 있었거든요.”

“무슨 얘기?”

“저에 대해서…… 선배에게 직접 알려 주고 싶었어요.”

그 말을 시작으로 에드워드는 제 인생사를 간결하게 회고했다.

소설을 읽었기에 알다 못해 익숙한 내용이었지만, 당사자의 시점에서 직접 듣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에드워드는 불우한 인생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데 재능이 있었다. 흡사 타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메마른 어조였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황후궁 하녀와 이반 황제 사이에서 태어났고, 유년 생활을 황실에서 보내는 대신 누군가의 손안에서 자랐다고 말했다(제네비브는 그 사람이 밀포드라고 확신했다).

에드워드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갈 만한 부분들을 미리 짚어 줬다. 모친은 어렸을 때 죽어서 기억이 없다, 황제와의 교류는 2주 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등…….

“…….”

에드워드는 모든 걸 알려 주는가 싶으면서도 많은 걸 알려 주지 않았다. 이야기는 자세한 듯 모호했다. 정확히는 제 출생을 알리기 위해 필요한 것 외에는 말을 삼갔다.

그리고 제네비브는 이야기를 들으며 에드워드가 자신이 서출이란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황자가 있다는 소식이 안 알려진 건…… 제가 거부해서예요.”

“왜?”

“…….”

에드워드는 대답하는 대신, 제네비브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냥, 바뀌는 게 무서워서요.”

“…….”

“그러니까 예전처럼, 평소처럼 대해 주세요.”

에드워드가 조심스레 제네비브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손에 닿는 온기가 따스해서 좋았다.

제네비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에드워드는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선배는 어떻게 지냈어요?”

그의 질문 한마디에 잊고 있었던 근심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제네비브는 말끝을 흐렸다.

황궁에서의 시간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괜찮은 것과 거리가 멀었다. 블라이스 가문이 크루즈 침몰의 원인으로 의심을 받는 상황을 직접 보기도 했고, 입학 이후 언제나 목표로 삼았던 졸업도 허상이 되었다.

2주간 있었던 일을 나열해 보더라도 좋았던 일은 모친을 만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사건에 이어 사건이 일어났고, 앞으로 에드워드가 겪을 일을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는 동안 제네비브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졌고, 그 불안한 정신을 제네비브도 체감할 수 있었다.

“…….”

일련의 사건을 회상했으니 조금 불안해질 법도 했지만,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괜찮았다. 제네비브는 눈을 내리뜨며 에드워드가 잡은 제 손을 보았다.

“나는 괜찮아.”

짧은 고민 뒤에 제네비브는 이 모든 걸 구태여 에드워드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제로 괜찮기도 하고.’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에게 잡힌 제 손을 보며 생각했다.

“아니잖아요.”

제 반쪽짜리 거짓말에 만족하고 있던 찰나, 에드워드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제네비브는 무언가 찔린 것처럼 그를 보았다.

“저 때문인가요?”

“너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제네비브는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에드워드를 보며 그 즉시 부정했다.

에드워드가 계기는 맞더라도 사태의 원인은 아니었다. 이 모든 건, 그러니까, 미리 짜인 미래와 사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제 탓이 컸다.

“요즘 일이 많이 일어났잖아. 제임스 얼굴 보기도 미안하고…….”

“그건 제네비브 선배 잘못이 아니에요.”

에드워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황궁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거든.”

“그건…… 몰랐어요.”

에드워드는 고개를 저었다.

“칼리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시험이 끝난 뒤였어. 그거 때문에 조금 힘들긴 해. 꼭 졸업하고 싶었는데, 못하게 되었으니까 아쉽기도 하고.”

그 외로도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요소는 많았지만, 에드워드에게 말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에드워드가 황자인 지금, 그와 블라이스 가문이 어쨌고 이반 황제가 저쨌다는 정치를 함부로 논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그가 조심해야 하는 미래를 함부로 발설할 수도 없었기에, 제네비브가 에드워드와 공유할 수 있는 소식은 이처럼 졸업이 무산된 이야기뿐이었다.

“재시험은 안 되나요?”

“안 된대. 유급을 권하시긴 했는데, 여름 동안 고민해 보려고.”

제네비브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위로하듯 제네비브의 등을 토닥였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지만, 우스울 정도로 가슴에 얹힌 혼잡한 응어리가 녹아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