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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85화 (85/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85화

어색한 위로 이후, 제네비브와 에드워드는 한적한 정원을 지나 리셉션이 진행되는 카터 저택으로 향했다.

카터 공작저의 응접실은 조문객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카터 가문이라 하더라도 응접실은 조문객을 전부 수용할 만큼 넓지 않았다.

카터 가문의 식솔들은 조문객을 더 맞이하기 위해 응접실 가림막까지 치웠지만, 역부족이었다. 관이 매장되는 걸 보러 간 친인척의 수가 상당하다는 걸 고려하면 그래도 응접실에 남은 사람은 많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응접실 안으로 사람들이 더 들어왔다. 카터 가문 공동묘지에서 돌아온 제임스의 친척들이었다.

제네비브는 물밀듯이 들어오는 사람 중 제임스를 찾아봤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블라이스 가문마저 비교적 늦게 돌아왔음에도 제임스는 여전히 안 보였다.

리셉션에 남은 사람은 이제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카터 가문으로 이득을 취하려 하거나, 아니면 그럴 의도가 없거나.

애석하게도 조문객 대부분이 전자에 속했다.

“이보쇼, 백작. 카터 공작은 어디에 있나?”

유행이 한참 지난 드레스를 입은 노파가 블라이스 백작에게 물었다. 카터 가문의 방계처럼 보였다. 그 노파를 시작으로 카터 가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사람들은 블라이스 백작에게 질문 세례를 했다.

제임스가 아직 묘지에 있다는 대답에 모두는 아쉬운 티를 지우지 못했다. 제임스가 카터 공작만 아니었다면 그를 응접실까지 끌고 올 기세였다.

“괜찮아요?”

제네비브가 욕심 많은 카터 가문의 일원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걸 본 에드워드가 물었다.

그의 질문에 제네비브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신전에서 보았던 제임스의 모습이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제네비브는 이곳에서 그나마 대화를 나누기 편한 상대를 찾았다.

블라이스 백작 뒤를 따라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오웬은 티 나지 않게끔 구석에서 뭉친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제네비브보다 오웬을 먼저 발견한 블랑카가 서 있었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붙잡고는 오웬과 블랑카를 향해 다가갔다.

“오, 에드워드—.”

블랑카는 본능을 억제하듯이 ‘전하’를 겨우 얼버무렸다. 그 바람에 반가운 인사는 웅얼거림으로 끝이 났다.

오웬과 블랑카가 제 신분을 아는 것처럼 보이자, 에드워드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굳어 가는 황자의 표정을 보며 블랑카 또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찾아내려고 혈안이었다.

작게 일어나는 소동에 응접실 구석은 잠시 조문객의 이목을 끌었다. 세 사람이 일을 더 크게 부풀리기 전에 제네비브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바로 공개될 줄 알아서 내가 말했어. 그래도 둘 다 다른 사람한테 말 안 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말할 시간도 없고, 장례식에서 말할 일도 없었으니까…….”

장례식에서 애도 대신 소문을 퍼트릴 사람들이 아니었다.

“맞아.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돼. 그럼 호칭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요.”

오웬은 어색하게 존대를 했다.

“전처럼 대해 주세요.”

에드워드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에디…… 워드.”

그래도 황족을 별명으로 부를 순 없었기에 블랑카는 조금 이상하게나마 그의 풀 네임을 입에 담았다.

“제임스는 괜찮은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어색함이 더 이어지기 전에 제네비브는 화제를 돌렸다.

“……직접 확인해 봐.”

“…….”

오웬이 제네비브의 어깨 너머를 보며 말했다.

리셉션 안을 채우던 작은 목소리들이 어느새 사라졌다. 공기는 무거워졌다. 제네비브는 고개를 돌려, 응접실 입구 부근에 서 있는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생기 넘치던 제임스였지만, 지금 그는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을 탁한 눈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손바닥을 비비며 그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려고 밑 작업을 시작하려던 친인척은 곧 인상을 쓰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제임스를 욕하는 말소리 또한 얼핏 들은 것 같았다.

“위로나 해 주자.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질리겠어.”

그걸 제네비브만 들은 게 아니었는지, 블랑카가 카터 일원들을 겨냥해 말했다.

제임스는 느리지만 정확하게 제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인 응접실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네비브, 잠깐 얘기 좀 할까?”

그리고 제임스가 마침내 네 사람 앞에 도착했을 때, 그가 찾은 건 그 누구도 아닌 제네비브 달링이었다.

“나만?”

처음부터 자신을, 또 자신만을 찾을 줄 몰랐던 제네비브는 당황하며 물었다.

“어, 길진 않아.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고.”

제임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네비브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미친 짓을 벌일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에드워드 좀 잘 봐줘.”

걱정하는 일이 이곳에서 일어날 확률이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제네비브는 진지하게 당부를 해 뒀다.

부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사소한 사항을 엄숙하게 부탁하는 제네비브를 보며, 친구들은 물론이고 덩달아 보호를 받게 된 에드워드까지 의아한 눈치였다.

제네비브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응접실 밖으로 나왔다.

솔직한 심정으로 제임스의 요청을 거절하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에드워드가 황실에 돌아갈 때까지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가 험한 꼴을 보지 않도록 하고 싶었으나 그러고 싶은 만큼 제임스에겐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이 있었기에 제네비브는 못내 응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가 제네비브를 데리고 온 곳은 응접실과 많이 떨어지지 않은, 또 다른 응접실이었다.

‘대체 나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제네비브는 제임스의 벌꿀 색 머리카락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분리된 곳에서 대화하려는 걸 보면 결코 평범한 이야기는 아닐 거다.

햇빛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응접실은 삭막했다. 빨리 끝낼 거라는 말을 지키듯 제임스는 소파에 앉지 않았고, 앉으라는 권유조차 하지 않았다.

입구에서 몇 걸음 떨어진 제임스가 제네비브를 보았다.

“제임―.”

제네비브는 괜찮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의 이름을 전부 부르기도 전에 문장이 끊겼다.

“너는 사고가 날 걸 알고 있었어?”

“…….”

그 질문에 제네비브의 머릿속은 순간 백지가 되었다.

제네비브는 입을 뻐끔거렸다. 제임스가 어떻게 알았지? 그냥 찔러 본 건가? 아니면, 근거가 있나? 대체 어떻게…….

“뭐라고?”

여러 복잡한 감정과 의문이 짧은 단어 하나로 튀어나왔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두통이 생겼다. 진상을 알게 되면 제임스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배신감을 느낄까.

“……왜 내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가 잠깐 실언을…… 못 들은 걸로 해 줘.”

“…….”

하지만, 제임스는 더 추궁하지 않았다. 그는 “그래, 네가 알 리 없지.”라고 말하며 이마를 짚었다.

“만약 네가 알았더라면 나에게 알려 줬겠지.”

제임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탁했던 금색 눈동자가 약간의 생기를 되찾았다.

“실없는 소리였어. 헛소리라고 생각해 줘.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 요즘 여러모로 힘들어서…….”

“…….”

“돌아가도 돼.”

제임스는 그제야 소파에 풀썩 앉으며 말했다.

그렇게 그는 피곤한 기색으로 제네비브를 보냈다. 응접실 밖으로 나온 제네비브는 문에 기대어 잠시 멍을 때렸다.

복도를 지나가는 하인은 제네비브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를 친절하게 리셉션이 진행되는 응접실까지 안내했다.

우당탕! 쿵—!

그때, 복도 끝자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견습 하녀가 물건을 떨어트린 모양입니다.”

제네비브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인은 소란에 대신 사과했다. 너무나 사소한 것에 용서를 구하는 하인을 보며 제네비브는 손을 저었다.

제네비브가 리셉션 안으로 들어서니, 그녀가 제임스일 거라 기대한 카터 가문 사람들은 입맛을 다셨다. 몇몇은 그녀와 함께 온 하인에게 잔심부름을 시켰고, 몇 명은 제임스와 무슨 이야기를 했냐며 끈질기게 묻기도 했다.

제네비브는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사람들을 떨쳐 냈다. 그렇게 오웬과 블랑카, 그리고 에드워드가 있는 응접실 구석에 도달했다.

“…….”

그런데, 에드워드가 없었다.

“오웬! 블랑카! 에드워드는 어디에 있어?”

제네비브는 오웬의 팔뚝을 붙잡으며 말했다.

“잠깐 나갔는데…….”

“뭐라고?”

제네비브는 따지듯 되물었다.

“나간 지는 얼마나 됐어?”

“얼마 안 됐어.”

블랑카가 5분 정도 지난 것 같다고 대답했다.

오웬과 블랑카 모두 제네비브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야, 그래도 금방 돌아올 거야. 네가 에드워드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아는데, 여기서 무슨 일이 있겠어?”

이래 봬도 여기, 카터 공작저야. 에드워드는 황자고. 오웬은 세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마지막 문장을 말했다.

하지만, 안일하게 생각해선 안 되었다. 그 안일함 때문에 크루즈 사태를 해결하지 못했고, 그 안일함 때문에 졸업도 못 했다. 이것마저 망칠 수 없었다.

제네비브는 황급하게 응접실 안 사람들을 확인했다. 사람이 지나치게 많았다. 제네비브는 엉겨 붙는 사람들을 헤치며 응접실 안을 샅샅이 관찰했다. 에드워드를 찾아야 한다.

“…….”

그리고 제네비브는 원하던 대로 에드워드를 찾아내진 못했지만, 의심스러운 장면을 봤다. 칼리지에서 왕왕 봐 왔던 세인트 존 칼리지 남학생이 누군가에게 속닥거리는 걸.

그러자 비밀스러운 담소를 나눈 두 사람을 포함한 남학생 네 명이 킥킥 웃으며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 순간, 누군가 머리를 세게 친 것처럼 그간 떠올리지 못한 생각이 스쳤다.

‘에드워드를 강간한 사람은…….’

눈앞에 두고도 몰랐다. 제네비브는 자신의 멍청함에 자책하고 싶었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단서는 언제나 있었다. 제네비브는 그저 단서를 조합해 내는 데 실패했던 거였다. 어려운 문제를 의도치 않게, 순식간에 풀어낸 기분이다.

‘에드워드가 죽인 학생들이었어.’

1년 뒤, 에드워드가 아무 이유 없이 무차별적으로 연쇄 살인을 저지른 게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을 강간한 사람을 죽였다. 더 정확히는 자신을 강간했던 ‘사람들’을.

소설 속 에드워드는 동급생 네 명을 죽였고, 동급생 한 명을 죽이는 데 실패했다. 그 말인즉 가해자는 한 명이 아니라 다섯이고, 에드워드는 이성에게 당한 게 아니라 동성에게 당한 거였다.

제네비브는 인파를 파고들며 리셉션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 발 몇 개를 밟은 것 같기도 하지만, 사과할 여유는 없었다. 몸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이고, 판단했다.

먼저 리셉션을 나온 건 남학생들이었기에, 제네비브는 멀리서 보이는 검은색 옷깃에 의지하여 그들을 뒤쫓아갔다.

이제라도 범인의 정체를 알았으니 됐지만, 문제는 그들이 제네비브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미친놈 같다는 점이었다.

주변에 사람이라도 보였다면 도움을 청했겠으나, 애석하게도 제네비브 곁을 지나가는 귀족이나 사용인조차 없었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던 제네비브는 빠르게 달렸다.

“하아, 하아…… 허억.”

숨이 가빴다. 남학생들은 어느새 본관을 나오고, 별관을 지나, 마구간까지 달려갔다.

인적이 드문 걸 생각하면 범죄를 저지를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낯선 이의 방문에 말들은 경계하는 울음소리를 냈다. 건초 밟히는 소리와 말 배설물 냄새가 마구간 안을 감돌았다.

이런 곳에서, 에드워드는 그런 일을 당하는구나. 제네비브는 혐오감을 느끼며 마구간 안쪽으로 걸어갔다.

“……찰스 콜린스.”

그리고, 제네비브는 바로 앞에 보이는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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