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90화
에드워드는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다시금 끔찍한 상황을 떠올리려니 입은 생각대로 쉽게 떼지지 않았다.
“어느 점에서 피해자라는 거지?”
답답해진 콜린스 백작이 에드워드의 팔을 잡자, 에드워드는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러곤 마치 더러운 게 묻었다는 양 콜린스 백작이 붙잡았던 제 팔을 쓸었다.
쓰러진 찰스를 보며 에드워드는 불과 한 시간 전에 자신이 무슨 일을 겪을 뻔했는지, 이제야 조금씩 실감을 했다.
“저를…….”
하지만, 에드워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목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말이 안 나왔다.
만일 제네비브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저 자리에 쓰러진 건 찰스가 아닌, 자신이었을 거다. 고작 이마 조금 다친 상태로 발견되었으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찰스가 자신을 순순히 놔줬을 리 없으니.
에드워드는 심호흡했다. 그는 차분함을 놓지 않으려고 하며 콜린스 백작과 시선을 맞췄다.
“……어차피 저에 대해 피차 아는 것 같으니, 말하겠습니다.”
에드워드는 말을 이어 가는 대신, 주제를 돌렸다.
“아시다시피, 저는 황제 폐하의 피를 이어받았습니다. 아직 세간에 공개된 건 아니지만…… 여기 제 호위가 리셉션에서 밝혔죠.”
에드워드는 제 뒤에 서 있던 호위병을 보았다. 제 실책을 들은 호위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에 콜린스 백작부인은 발악하듯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지만, 호위병이 몸에 지니던 황실의 증표를 보여 주자 입을 다물었다.
콜린스 백작 부부 앞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당했고, 찰스가 어떤 짓을 저지르려고 했는지 말하는 건 숫제 도박이었다.
두 사람의 끔찍한 아들 사랑으로 보아, 말하더라도 믿을 것 같지 않았다. 그 추악한 이유를 제네비브나 자신에게 찾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의 영향력이 닿는 곳에서 조사가 진행되는 게 나았다.
“그러므로, 황실이 조사하겠습니다. 이러면 모두가 괜찮겠죠.”
콜린스 백작과 백작부인은 조용했다. 황실이 직접 조사하겠다는 말에 누가 토를 달겠는가. 세 사람 모두 순순히 응했다.
“카터 공작, 수고스럽지만 부탁합니다.”
에드워드는 낯선 호칭을 붙이며 말했다. 공적인 대화를 제임스로 시작할 줄 몰랐다.
“알겠습니다.”
제임스는 자연스럽게 그를 황자로서 대했다.
그들을 따라온 카터 저택 주치의가 분위기를 살피며 찰스를 진찰했다. 그는 극성맞은 콜린스 백작부인 옆에서 잠든 찰스의 눈까지 뒤집어 확인했다. 마침내 의사는 괜찮다는 소견을 냈다.
“의사 양반, 찰스를 마차까지 데리고 가게.”
콜린스 백작은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렸지만, 의사는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콜린스 백작. 여기가 카터 저택이란 걸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제임스가 콜린스 백작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아들 또래인 제임스가 마치 아랫것을 대하듯 행동하자, 콜린스 백작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말처럼 그 말아 올린 입꼬리는 무서울 정도로 빼닮았다.
의사를 대신해 하인이 와, 찰스를 옮겼다.
“아드님이 의식을 차릴 때까지 이곳에 머무는 건 어떤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콜린스 백작은 삐딱하게 거절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는 부인을 달래며 카터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황자님께서도 의사를 보는 게 좋겠군요. 땀을 많이 흘리고 계십니다.”
제임스는 에드워드를 보며 말했다.
에드워드가 거절할 새도 없이 의사가 그를 진찰했다. 가벼운 뇌진탕이었다.
“복도에서 찰스 콜린스를 만났습니다. 말싸움을 조금 하다가…… 돌연 조각상을 휘둘러서 기절했고, 눈을 뜨니 마구간이었습니다.”
에드워드는 의사로부터 제 몸 상태를 들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알렸다.
단편적인 진술을 들은 제임스는 집사에게 찰스가 휘두른 조각상을 찾으라고 말했다(호위병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려우면 말 안 해도 괜찮습니다.”
에드워드가 마구간에 도착한 이후 벌어진 일을 말하지 않자, 제임스가 말했다. 그는 하인에게 황자를 모시라는 말을 하며 방을 나왔다.
“목욕물과 옷이 준비되었습니다.”
하인이 정중하게 말했다. 에드워드는 그제야 제 몰골이 어떤지 깨달았다. 에드워드는 몸에 묻은 피를 씻어 내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움직여도 괜찮다는 말을 들은 뒤에나 에드워드는 제네비브를 보러 갈 수 있었다.
현재 제네비브는 카터 저택의 게스트 룸에 머물렀다. 달링 후작부인은 문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꾸벅 졸고 있었다. 그녀는 딸이 괜찮을 거라는 말을 듣고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던 차였다.
에드워드는 달링 후작부인을 지나쳐 게스트 룸 안으로 들어갔다.
언젠가 여관에서 머물렀을 때처럼 방 안은 지독한 보랏빛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다. 공기 중 떠다니는 안개 향과 농도만으로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그때와 비교할 수도 없는 최고의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침대 안쪽에는 제네비브가 있었다.
“…….”
에드워드는 제네비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마는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고, 옅은 숨을 겨우 쉬던 아까와 다르게 몸이 규칙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피투성이였던 모습은 떠오를 수도 없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제네비브가 죽는 줄 알았다. 몰려오는 안도감에 에드워드는 잠깐 휘청거렸다.
제네비브가 죽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 최악의 상황으로 제네비브가 죽었더라면 에드워드는 그 자리에서 찰스의 목을 졸랐을지도 모른다. 그가 멀쩡하게 부모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지금 제네비브가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평민 에드워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엾게도 이게 그의 현실이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제네비브는 금방 회복할 거다. 제국에서 실력이 출중한 의사들이 그녀를 돌볼 거고, 그들의 보살핌이 부족하다면 고위 사제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
그들에겐 그럴 능력이 있었다. 빌듯이 사정해서 동네 의사를 간신히 불러오는 것만 가능한 현재의 자신은 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
이제 에드워드에겐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에드워드가 사뭇 굳은 표정으로 방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일어난 달링 후작부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링 부인, 깨워서 죄송합니다.”
문 여닫는 소리에 그녀가 깼다고 생각한 에드워드는 정중히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
달링 후작부인이 그에게 쓰던 친근한 말투는 사라지고, 이젠 공적인 단어들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무엇인가요.”
“……제네비브는 카르디르로 돌아갈 겁니다.”
달링 후작부인이 단호히 말했다.
에드워드는 그 말뜻을 정확히 이해했다.
다음 날.
황자에게 또 다른 아들이 있다는 소식이 아본리아 전역에 퍼졌다. 그리고 다름이 아닌 황실이 이 사실을 밝혔다.
* * *
제네비브가 의식을 되찾은 건 나흘 뒤였다.
“…….”
제네비브는 두 눈을 느리게 떴다 감기를 반복했다.
이곳이 블라이스 저택의 게스트 룸. 그러니까, 자신이 한동안 머물렀던 공간인 걸 알게 된 제네비브는 몸을 일으켰다.
“제네비브 아가씨……!”
꽃병 물을 갈던 하녀가 작게 소리를 질렀다. 머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제네비브는 기억을 천천히 되새겼다.
분명 카터 가문의 장례식장에 참석했고, 에드워드를 구하려다 찰스와 몸싸움을 했다. 그리고 머리를 다쳐서 에드워드가 리셉션까지 저를 데리고 간 거 같은데…….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머리 뒤에서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다. 고통보단 이물감에 가까웠다. 다친 곳으로 조심스레 손을 가까이하니 실 같은 게 느껴졌다. 꿰맨 자국 같았다.
“후작님, 후작부인……! 아가씨께서 의식을 되찾으셨어요!”
하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덕분에 머리가 더 울렸다. 제네비브는 의식이 몽롱한 동시에 정신 사나울 수 있음을 새롭게 깨달으며 이마를 짚었다.
카르디르에서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달링 후작과 후작부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오, 제네비브…….”
달링 후작은 딸을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그녀의 몸상태를 생각해 손잡는 걸로 대신하며 말했다.
“황자 전하께서 네가 얼마나 용감했는지 말해 줬단다. 하지만…… 이제 이런 건 안 해도 돼.”
달링 후작부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네비브는 제 손 위를 포개는 모친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지는 어떻게 하고 오신 거예요?”
“제네비브 네가 아픈데 영지가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니. 움직일 수는 있고? 몸은 괜찮은 게냐?”
아버지의 질문에 제네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마른 것 외로는 머리가 깨졌다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괜찮았다.
“이 나흘이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콜린스인지 골린스인지, 하여간 젊었을 적과 똑같은 말종이더군. 판결이 제대로 나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내가 직접…….”
달링 후작이 중얼거리며 콜린스 가문을 욕했다.
“판결이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제네비브는 뜬금없이 나타난 단어를 물었다. 판결이라 하면 재판이 있었다는 소리였고, 필시 카터 장례식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재판일 거다.
“콜린스 가문의 재산을 거덜냈단다. 만약 카르디르였으면 작위를 박탈했을 텐데…… 쯧, 아본리아 사람이 아니라 아쉬울 뿐이야.”
“이야기는 돌아가는 마차에서 하자구나.”
달링 후작부인은 남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돌아가는 마차요?”
제네비브는 되물었다.
“그래, 카르디르로 돌아가야지.”
딸의 물음에 달링 후작부인은 친절히 목적지를 알려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