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91화
아본리아에서 카르디르로 돌아가는 건 매해 있는 일이니, 따지고 보면 돌아가자는 말 자체는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걸리는 점은 마치 당장이라도 떠나야 한다는 듯한 달링 후작부인의 조급한 어투였다.
“언제 떠나는 건데요?”
“오늘 중으로 떠날 거란다.”
달링 후작부인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불안한 직감이 옳았다는 걸 확신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일정이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제네비브는 두 사람을 설득할 생각으로 바라보았지만, 달링 후작 부부는 이미 결단을 내린 모습이었다. 무슨 말을 하건 소용없어 보였다.
“정말이지, 이곳에 더는 못 있겠어. 어서 카르디르로 돌아가고 싶구나.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달링 후작부인은 말을 머뭇거렸다.
“……나는 네가 세인트 존 칼리지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
그 말에 제네비브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달링 후작부인이 말을 이었다.
“제네비브, 여긴 너무 위험해. 그러니, 데클렌 총장이 권하신 유급은 거절―.”
“설마…… 제가 의식을 잃었던 동안 대신해서 거절하셨어요?”
몸이 떨렸다. 그러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머리는 저절로 최악의 상황을 그려 나갔다.
“미안하단다.”
하지만, 부모님을 향한 믿음에 돌아온 건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믿기 힘들었다. 제네비브는 부친이 잡고 있던 제 손을 빼내었다.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하든 지지하겠다는 달링 후작 부부는 지금 딸의 유급을 완강하게 반대하다 못해 일을 저질렀다.
유급을 할지, 아니면 졸업장을 포기할지 제네비브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이건 스스로가 결정해야 하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아니라.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어디서부터 생겨난 건지 모를 배신감이 온몸에 솟구쳤다.
침대에서 일어난 제네비브는 머리칼을 헤집었다. 금색 머리카락이 손가락과 엉켰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제네비브는 게스트 룸 안을 바쁜 걸음으로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소리 지르고 싶은 욕구를 눌러 참은 그녀는 침대 부근에 앉은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아빠! 아빠도 동의하시는 거예요?”
제네비브가 고개를 홱 돌리며 쏘아붙였다.
“이 아비도…… 네 엄마와 의견이 같구나.”
달링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어째서 그러셨어요? 이건 제가 결정할 일이라고요!”
“제네비브 달링!”
제네비브가 저지르는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무례를 본 달링 후작부인이 언성을 높였다.
“지난 몇 주 동안 네가 겪고, 겪을 뻔했던 일을 생각하렴!”
그녀는 처음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 제네비브는 몸을 살짝 떨었다.
“난 눈앞에서 너를 잃을 뻔했어! 선상 파티 하나였으면 내 딸은 아니어서 다행이구나, 하고 넘어갔겠지!”
“제가 머리를 두 번 맞을 리는 없어요!”
찰스 콜린스야말로 특이한 경우였다. 그는 원작이 시작되기 전, 에드워드에게 시련을 줘서 그의 흑화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장치였다.
그러니, 제네비브가 타인의 머리를 깨고 다니는 정신 나간 사람을 또 만나게 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에드워드를 배제했으나, 칼리지에 못 가게 된 걸로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달링 후작 부부는 제네비브가 이곳에서 한 걸음 뗄 때마다 위험에 처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논리대로라면 카르디르도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지만, 달링 후작 부부는 아본리아를 떠나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듯했다.
제네비브의 말을 들으며 애써 묻어 둔 그때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달링 후작부인은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제네비브는 달링 후작의 품에 안겨 우는 모친을 보고는 방 밖으로 나왔다.
“오, 아서……. 당신이 못 봐서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지금 같은 행운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닫히는 문 사이로 달링 후작부인이 흐느끼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을 나선 제네비브는 블라이스 저택 주인을 설득하러 나섰다.
카르디르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 아본리아에서 머무를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당연하게도 지금 그녀는 당분간 부모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복도에 있는 하녀가 잠옷 차림의 제네비브를 보고는 기겁하며 숄을 가져왔다.
“제네비브! 몸은 괜찮아? 벌써 움직여도 돼?”
제네비브가 숄을 두르던 사이, 마침 그녀를 보러 온 오웬과 마주쳤다. 그는 숨이 찬 듯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짜증 날 정도로 가벼워. 블라이스 가문 주치의 실력이 괜찮네.”
제네비브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오웬은 제네비브가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걸 보고서야 그녀의 말을 믿었다. 이어 그는 그녀에게 행선지를 물었고, 제네비브는 곧이곧대로 답했다.
아픈 그녀의 동행을 자처한 오웬이 어째서 블라이스 백작을 찾는지 의아해하자, 제네비브는 방금 방 안에서 부모님과 나눴던 대화 내용을 전부 그에게 알렸다. 제 의사를 묻지도 않고 결정을 내린 부모님의 행동을 전할 때는 목소리 끝이 떨렸다.
“근데, 정말 잠옷을 입고 가려고?”
오웬이 지나치게 편한 그녀의 옷차림을 애써 지적했다.
“이래야 더 힘들어 보이잖아. 동정심을 유발하는 게 내 계획이야.”
실은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방을 뛰쳐나와서 그런 거였지만, 입 밖으로 꺼내자니 괜찮은 계획처럼 들렸다.
“너도 참 대단하다.”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근데, 고모님과 고모부가 그러셨다니 안 믿기네…….”
“방금 한 말은 전부 한 치의 거짓도 없어. 머리가 한 번 더 깨진 기분이야.”
“야…….”
웃을 수 없는 농담에 웃은 사람은 당사자뿐이었다.
“너희 나라 농담은 가끔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 아무튼, 나 같아도 좀 짜증났겠어~ 두 분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성급하셨네. 네가 제안을 받아들일까 봐 미리 거절한 거 아니야?”
설득이 안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질러 버렸다는 게 오웬의 추측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달링 후작 부부를 향한 제네비브의 화를 누그러트리려고 했지만, 효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제네비브는 부모님이 저지른 일을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콜린스 가문 재산이 바닥났다는 걸 들었는데, 그건 무슨 얘기야? 아니, 그 전에 내가 쓰러지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
애꿎은 오웬에게 그 화가 미치기 전에 제네비브는 주제를 돌렸다.
“아~ 그거.”
그나마 편한 주제가 나오자, 오웬이 아는 체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가벼운 얘기부터 해 주자면~ 블랑카는 매일 방문했어. 네 침대맡에 있는 꽃들, 전부 블랑카가 선물한 거야.”
그 말을 들어 보니 침대맡에서 꽃을 본 기억이 있다. 워낙 한순간이라 제대로 살펴보진 못했지만.
“콜린스 가문 재산이 바닥난 건…… 네가 쓰러지고 나서 굵직한 일이 많이 생겼거든. 그 이튿날에 에드워드가, 아니, 에드워드 전하의 존재가 공표되고 그다음 날에 귀족 재판이 열렸어. 나는 신문으로만 접했지만— 이따 스크랩해 둔 거 보여 줄게.”
아직 신문 클럽의 습관이 남은 오웬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찰스, 정신이 단단히 나갔던데? 어떻게 황자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집단 구타를 할 계획을 세우지.”
“집단 구타?”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른 죄목에 제네비브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너도 그때 있지 않았냐? 자기 친구들 불러다 때리려고 했다는데. 그러다가 네가 나타나서 계획이 틀어지고, 전하께서 삽으로 찰스를 기절시키고.”
“…….”
삽으로 때린 사람마저 달랐다. 어째서인지 자신이 아니라 에드워드로 바뀌어 있었다.
달라진 이야기를 들은 제네비브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오웬은 자신이 말실수한 게 아닌지 걱정하는 듯 보였다.
“야, 아무튼! 에드워드 전하는 정당방위에 너도 무혐의로 잘 끝났어~ 찰스는 황족 시해죄에 살인 미수로 잡혀갔고. 교수형만 면하려고 콜린스 가문이 재산을 전부 탕진했대. 아무튼, 자식 사랑 하나는…….”
오웬이 질렸다는 듯 마지막 문장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찰스 콜린스를 또 만날 걱정은 안 해도 돼. 그쪽도 사리는 느낌이라……. 광산이랑 항구, 건물 같은 건 황실이 몰수했고 나머지는 너희 가문의 소유야. 더 정확히는 고모님의…… 국내 자산에 포함됐어. 아버지가 머리를 좀 쓰셨지.”
“재판은 며칠 만에 끝났어? 그럼, 찰스 말고 걔 패거리들은 그대로인 거야? 그리고…….”
“일어나서 활기찬 건 좋지만~ 벌써 아버지 집무실 앞이랍니다.”
오웬이 궁금한 점을 읊어 가던 제네비브의 말을 막았다.
“스크랩한 거 줄 테니까, 궁금한 건 거기서 찾아봐. 아버지 설득하는 거, 힘내라.”
“……고마워.”
제네비브는 멀어지는 오웬을 잠시 쳐다보곤 블라이스 백작의 집무실을 두들겼다. 허락이 떨어지자, 제네비브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오웬과 나눴던 대화처럼 제네비브는 블라이스 백작과 짧게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블라이스 백작이 이미 일을 아는 것 같기에 제네비브는 본론을 꺼냈다.
제네비브는 부디 자신이 아본리아에서 머물 수 있게끔 해 달라는 부탁했다.
“……제네비브, 지금 네가 부모를 보기 싫어한다는 건 이해하지만.”
‘하지만’. 그 단어의 등장에 제네비브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달링 후작부인은 그사이 제 오라비까지 포섭한 것 같았다.
“미안하구나. 이번만큼은 나도 네 부모 편이란다.”
“…….”
“그리고 나와 말하지 않았니. 장례식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기로.”
블라이스 백작은 오늘이 지나면 떠나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저택의 실질적 권한을 쥐고 있는 그가 내리는 축객령이었다.
카르디르로 돌아가기 싫었지만, 블라이스 백작의 거절을 받은 상황에서 제네비브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결국 제네비브는 그날 오후, 해가 지기 전에 아본리아를 떠나야 했다.
“……설득이 잘 안 되어서 유감이야.”
“응……. 블랑카한테도 안부 전해 줘.”
제네비브는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리고 이거, 재판 스크랩북이야. 기사들만 오려서 모아 놓은 건데, 녹서스 가는 길에 읽어 봐.”
오웬이 제법 두께가 있는 공책을 건넸다.
“조만간 녹서스에 놀러 갈게.”
“그래. 편지하고.”
제네비브는 기차역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다행히 제네비브는 달링 후작 부부와 같은 마차에 오르진 않았다.
지금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면 욱하는 감정이 다시금 치밀 것 같았기에 차라리 따로 이동하는 게 나았다. 분명 좋은 말이 나오지 못할 테니까.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제네비브는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다물겠노라 다짐했다. 지금 그녀가 행할 수 있는 마지막 반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