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92화
그녀의 다짐은 오래갔다.
열차는 지정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네비브는 부모님과 떨어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제네비브는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달링 후작 부부를 지나쳐 기차 칸 앞쪽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두 사람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선 아직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제네비브는 그 감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뒤에서 느껴지는 부모님의 시선을 최대한 무시하며 들고 있던 스크랩북을 펼쳤다. 무릎 위로 묵직한 무게가 내려앉았다.
“…….”
녹색 눈이 스크랩북을 천천히 훑었다.
본래 누군가에게 보여 줄 생각이 없던 건지, 기사는 오로지 오웬만이 알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덕분에 제네비브는 겨우 시간 순서를 파악해 읽었다.
귀족 재판은 에드워드가 황자라는 사실이 공표된 것과 동시에 열렸다. 그 누구도 몰랐던 황자의 등장에 모두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는 게 활자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새 황자의 신고식>
<황자 에드워드 대 콜린스 가문…… 재판의 승자는?>
복잡하게 스크랩된 기사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 역시 에드워드를 향한 여론이었다.
아무래도 주 독자층이 서민인 신문은 평생을 평민으로 살아온 에드워드가 그들이 겪는 고충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며,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그가 보인 성과를 근거로 사망한 랜돌프 황태자의 자리를 잘 채워 줄 거라 이야기했다.
반대로 귀족 신문의 경우, 에드워드의 평민 배경을 언급하며 그의 능력에 의문을 품었다. 후자는 신분을 제외하면 그럴듯한 이유도 없었지만, 간혹 편견은 설명을 대신했고 이 경우 편견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제 제네비브는 재판을 서술하는 기사를 읽어 갔다.
찰스의 혐의였던 황족 시해죄는 미수로 판명이 났고, 그는 대신 황족 폭행죄로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잘잘못이 확실한 상태에서 황족이 피해자 신분일 때, 재판에서 오가는 대화 주제는 하나뿐이었다. 과연 가해자를 어떤 방식으로 죽여야 할까?
하지만, 콜린스 백작 부부는 아들을 살리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벌금형을 받은 건 승소한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벌금은 상당했다. 앞서 들은 것처럼 콜린스 가문은 재산을 전부 빼앗겼다. 출혈이 큰 만큼 자멸의 길에 들어설 게 분명했다.
“……이상한데.”
내용은 얼핏 보면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권선징악이었지만, 제네비브에겐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첫 번째로, ‘제네비브 달링’은 자주 언급되지 않았다.
[해당 사건에 휘말려 총을 쏜 카르디르 출신 귀족은 무혐의를 받았다. 스펜서 판사는 그가 찰스 콜린스를 노리지 않았다는 점과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발사했다는 점, 그리고 총알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런 판결을 내렸다고 전했다.]
이처럼 제네비브는 단 한 번 언급되었다.
[스펜서 판사는 에드워드 황자가 찰스 콜린스의 머리를 삽으로 가격한 것에 대해 정당방위라는 판결을 내렸다.]
두 번째로, 제네비브가 했던 일이 에드워드가 한 일이 되었다.
에드워드가 정당방위고 자신은 무혐의라는 말을 들었을 땐 의문이 있었다. 왜냐하면 마구간에서 계속 누워 있었기에 에드워드는 맞설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제네비브는 오웬이 잘못 말한 줄 알았지만, 스크랩을 보아하니 그는 자신이 들은 걸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가해자 찰스 콜린스가 공모한 집단 구타에 반대해 말리려고 했다는 귀족가 영식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스펜서 판사는 그들에게도 무혐의 판결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찰스의 강간 공모는 집단 구타로 변모했다.
어째서 그렇게 된 건지 제네비브는 알 수 없었다. 에드워드가 강간의 피해자가 될 뻔했다는 말이 돌면 이미지가 안 좋아져서 그런 걸까? 어째서 그 다른 남학생들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못한 걸까.
돌연 입안이 씁쓸해졌다. 에드워드는 이 결과에 만족할지 몰라도 제네비브는 만족하지 못했다.
[콜린스 가문이 출혈을 회복하려는 한편, 새롭게 나타난 황자 에드워드가 황태자 책봉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황자 에드워드.”
제네비브가 익숙한 두 단어를 읊조리자 이질적인 존재가 나타났다. 저 혼자 알고 있던 정체를 이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미묘해졌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에드워드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편하게 말해 달라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으나, 이젠 모두가 지켜볼 테니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기도 했다.
‘……애초에 다시 볼 수나 있을까?’
달링 부부는 제네비브가 아본리아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아본리아의 ‘아’ 자만 말해도 기절할 기세였다.
설령, 몰래 아본리아에 가더라도 에드워드를 만날 확률은 낮았다. 방학 동안 황태자 책봉을 받을 그는 여름 내내 바쁠 예정이니.
그렇게 반나절을 달린 열차는 어느새 정겨운 카르디르에 도착했다.
부모님과 분리되었던 기차와 다르게, 제네비브는 그와 같은 사치를 카르디르에선 누리지 못했다.
불편한 공기가 세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늘 화목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달링 가문이었기에 역에서 기다리던 하인들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제네비브는 맞은편에 부모님을 두고는 그들에게 시선을 한 번 두지 않았다. 달링 부부는 이해한다는 듯 딸아이에게 말하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아가, 녹서스구나.”
그들은 그저 영지에 도착했다는 말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제네비브는 기대었던 머리를 살짝 돌려 창밖을 보았다. 녹서스의 땅은 세인트 존 칼리지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넓게 펼쳐진 황금빛 밀밭, 끝을 알 수 없이 쭉 이어지는 푸른 숲. 지난 방문보다 넓어진 마을과 유백색의 달링 성을 눈에 담고서야 제네비브는 실로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여름 방학 동안에는 대부분 사교 시즌에 맞춰 수도 타운하우스에 머물렀으므로 세인트 존 칼리지에 입학한 뒤로는 이곳에 발 들일 일이 거의 없었다.
달라진 녹서스를 보며 제네비브는 집에 돌아온 것 같은 포근한 기분과 함께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나의 것이 될 뻔한 곳.
마지막 기회였던 유급마저 놓쳐 버린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쩌면 느낄 필요 없었을 패배감이 느껴졌다.
제네비브는 국가시험에 목매다 결국 나이만 먹고, 혼기를 훌쩍 넘겨서 결혼도 못 한 채 달링 가문이 방계 친척에게 넘어가는 상상까지 했다. 데클렌 총장이 유급을 제안했을 때 그 자리에서 승낙할 걸 그랬다.
제네비브는 입안을 씹었다.
“제네비브 아가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의식을 되찾고 이곳에 오기까지 일어난 일들을 못 들은 월터가 제네비브를 반갑게 맞이했다.
성에서 일하는 모든 하인과 하녀가 마중을 나왔고, 개중에는 제네비브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사람들도 있었다.
“…….”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추태를 부리고 싶진 않았기에 제네비브는 고개를 까닥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유학을 다녀오며 예의가 사라졌다는 뒷말이 나오기 충분한 태도였지만, 제네비브는 지금 이 착잡한 심정을 예쁘게 포장할 기력이 없었다.
번창한 녹서스와 마찬가지로 몇백 년의 역사를 담은 이 달링 성마저 결코 온전히 제 것이 못 된다. 누군지 모를 남편의 소유나 싸움에서 이긴 방계의 소유가 되겠지. 기분이 다시금 내려앉았다.
제네비브는 제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걸어 잠갔다.
부모님이 지금보다 원망스러웠던 적도 없었다. 카르디르로 돌아오는 것까지는 백번 양보해서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결정을 제 의사를 묻지도 않고 해 버렸다니.
아침부터 느낀 원망과 화는 계속해서 축적될 뿐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다.
돌아온 후로 제네비브는 방에 틀어박혀 있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삶의 의미를 빼앗긴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 허공만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제네비브의 방에 유일하게 출입할 수 있는 하녀, 헬렌은 간혹 제네비브가 눕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면 신이 나선 말했다(그만큼 제네비브는 도착한 뒤로 누워 있거나 창밖을 본 게 전부였다).
“제네비브 아가씨께서 국가시험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헬렌은 제네비브가 방에 틀어박힌 지 사흘째 되는 날에 드디어 달링 부부가 기뻐할 만한 소식을 전했다.
제네비브는 그다음 날부터 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지만,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하지만 달링 부부는 그마저도 성과라며 제네비브가 외출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했다.
그리고 테오도르 우드빌이 달링 후작저를 방문한 건 제네비브가 방 밖으로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