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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93화 (93/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93화

더 정확히는 우드빌 가문이 방문했다.

제네비브가 정신을 잃었을 때부터 그녀가 방 밖으로 나올 때까지 멈춰 있었던 저택의 시간은 서서히 활력을 되찾아 갔다.

모든 대외 활동이 중단된 상태였던 달링 가문은 점차 원래 일정을 소화하기 시작했고, 그 신호탄이 바로 우드빌 가문과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제네비브는 우드빌 가문이 녹서스에 오기 이틀 전이 돼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제네비브는 테이블 위에 한가득 쌓인 편지를 읽었다. 달링 후작저로 돌아온 뒤부터 친구들로부터 꾸준히 편지가 왔다.

[오웬 블라이스]

[블랑카 라 투르 보아르네]

대부분 오웬과 블랑카가 보낸 편지였다.

[그리고 너랑 나 사이니까 하는 얘기인데…… 총장님께 네 의사가 들어간 게 아니니까, 결정을 물러 주면 안 되냐고 물으면 안 되나? 정말 너무하다니까……. 아무튼, 진저. 많이 힘들겠지만 난 그래도 네가 뭘 해도 잘할 거라고 생각해. 나도 교칙 더 뒤져 볼 테니까, 푹 쉬어!

네 친구 블랑카가.

―추신. 제임스도 시험을 안 본 것 같더라…… 졸업자 명단에 없는 거 있지? 걔, 연락은 되니?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어서 말이야. 진저, 너만큼이나 답장이 없어.]

블랑카에게 보낼 답장을 쓴 제네비브는 이제 오웬이 보낸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모를 제네비브 달링에게.

먼저 편지하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너일 텐데. 이번 걸로 벌써 11번째 편지야.

네가 가고 얼마 안 지나서 에드워드 전하께서 찾아왔어. 네 상황을 대략 알려 주니 바로 가시더라. 편지를 보내겠다곤 하셨는데, 받았는지 모르겠다. 설마, 내 편지만 답장 안 한 건 아니겠지? 편애가 이렇게 뼈아프구나.

네 답신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오웬 블라이스.]

오웬의 편지에서 에드워드가 편지를 보낼 거라는 걸 읽은 제네비브는 쌓인 편지를 뒤적거렸다.

이웃 나라 황자가 보낸 편지가 이렇게 널브러져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제네비브는 편지 뒷면에 적힌 발신인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이름은 없었다. 제네비브는 왠지 모르게 아쉬움을 느끼며 오웬에게 쓸 답장을 마무리 지은 뒤, 집사를 불렀다.

“에밋, 폐하라도 오는 거야?”

열린 문 틈 사이로 부산스럽게 복도 청소를 하는 하녀들이 보였다.

하녀들이 이토록 열정적으로 청소하는 모습은 방 밖으로 나오고 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네비브는 분명 복도 커튼을 새롭게 다는 모습을 보았다.

“우드빌 가문이 방문할 예정입니다.”

제네비브에게 편지를 받고, 또 가정 교사 목록을 전달하던 집사 에밋이 이틀 뒤에 올 손님의 존재를 알렸다.

“……손님이라고? 근데, 왜 나는 들은 게 없지?”

“아가씨가 불편해할까 봐 후작님께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간다고 전달해 드릴까요?”

“…….”

아직 식사도 따로 갖는 상황이니만큼 후작 부부는 딸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여긴 듯싶었다.

손님을 초대하여 시간을 보내는 자리에서 가족간 불화가 있다는 걸 알리는 것만큼 불필요한 일도 없기에 그들의 배려는 꼭 필요한 조치였다.

“응. 간다고 말해 줘.”

하지만, 제네비브는 이 냉전을 끝낼 필요성을 느꼈다.

비록 멋대로 결정을 내린 부모님의 행동은 아직까지 용납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불참하여 괜히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테오도르는 몰라도 제네비브는 아직까지 우드빌 대공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에밋이 발 빠르게 이 소식을 전달하자, 달링 부부는 크게 기뻐하며 제네비브의 채비를 준비했다.

* * *

“우드빌 대공을 뵙습니다.”

아침부터 하녀들에게 시달린 제네비브는 우드빌 대공을 보며 인사했다. 우드빌 가문은 저녁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한때 해군 제독이었던 우드빌 대공은 아들과 다르게 험악한 인상이었다.

우드빌 형제들이 가장 좋은 결혼 상대가 된 것에는 타계한 우드빌 대공비의 지분이 크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우드빌 대공도 이에 동의하는 바였다.

따가운 햇살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찌푸렸던 이맛살에는 세로로 주름이 졌고, 새카맣게 탄 피부엔 군데군데 상처가 나 어린아이들을 울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제네비브는 그가 지금까지 울렸을 수많은 어린아이를 생각해 보며 우드빌 대공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못 본 사이에 숙녀가 다 되었구나! 역시, 네가 아깝다.”

우드빌 대공이 마지막에 지칭한 상대가 테오도르라는 건 금방 눈치챘다.

제네비브는 차라리 약혼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우드빌 대공의 농담에 어색하게 상대했다.

“달링 후작님과 후작부인을 뵙습니다.”

테오도르는 부친의 주책을 어렵게 수습했다. 정중하게 인사한 그는 곧 제네비브를 향해 작게 손인사를 건넸다.

다이닝 룸에 도착하자, 우드빌 대공은 사이먼 우드빌이 대륙 여행을 떠났다는 근황을 마지막으로 잡담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애피타이저가 나오는 것과 함께 테이블은 본격적으로 사업 이야기로 흘러갔다.

발언권이 거의 없는 제네비브와 테오도르는 조용히 나이프질을 했다. 가만히 한 귀로 대화 내용을 엿듣던 제네비브는 자신이 후계자로서 저 대화에 참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허황된 망상을 했다.

“재판 소식은 들었어. 마음고생이 심했겠군.”

“…….”

하지만, 사업 이야기는 눈 깜빡하는 새에 재판으로 흘러갔다.

달링 부부가 사업에 투자할 돈의 출처가 재판에서 승소해 받은 콜린스 가문의 재산이었기에 당연히 나오는 대화의 흐름이기도 했다.

“아본리아 처남이 고생을 했다네. 많은 도움이 되었지.”

달링 후작은 짧게나마 정당한 죗값을 치르게 도와준 블라이스 백작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게 나도 도와줬으면 좋았을 텐데.’

제네비브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가문 간 거래가 성사되고, 후식까지 끝나자 제네비브는 곧바로 다이닝 룸을 떠났다.

애당초 식사가 끝나면 자식들에겐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주로 서재나 개인 응접실 같은 데로 장소를 옮겨, 시가를 피우거나 양주를 마시며 하다 못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제네비브는 평소에 앉던 창가에 자리를 잡아, 며칠 전 집사가 건넸던 가정 교사 목록을 읽어 내려갔다.

눈물이 울적한 기분을 조금 풀어 주더라도 결국 문제 해결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던 제네비브는 국가시험을 보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3년 동안 배운 게 있는데, 처음보단 쉽겠지.’

모의시험을 보기 전에 제네비브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세인트 존 칼리지와 마이언 아카데미에 원서를 넣기 전, 구비했던 기출 문제를 다시 풀었다. 하지만 국가시험은 학교생활을 적당히 즐기고, 수업에 집중하기만 해도 풀 수 있는 학교 시험과는 차원이 달랐다.

학생들 사이에서 어렵다고 정평이 난 시험 과목의 난도를 딱 열 배 곱하면 이런 시험이 탄생하지 않을까. 문제를 읽는 것마저 마음의 준비를 요구할 정도였다.

“몇 년 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나아지긴 했는데…….”

제네비브는 서류 뒤에 끼워 둔 기출 시험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온종일 붙잡고, 심지어 책 옆에 펴 두고도 문제를 하나도 못 풀었던 과거와 다르게 절반 정도 맞히긴 했으나 그럼에도 부족한 성적이었다.

국가시험은 두 시간 내에 풀어야 했지만, 제네비브는 네 시간을 투자해 겨우 끝냈다. 그러니, 실제 점수는 절반의 절반도 안 될 게 분명했다.

지금 제네비브가 필요한 건 도움이었다. 다시금 성적을 본 제네비브는 오랜만에 학업적 패배감을 곱씹으며 살롱 카탈로그를 보듯 가을부터 함께할 가정 교사를 추렸다.

교사를 고르는 것도 일이었다. 전부 고만고만한 학력에 엇비슷한 경력이었고, 다른 점이라 하면 각 가문에서 보낸 추천서일 거다.

작위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가르는 시험은 일 년에 두 번 열렸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올해에 시험을 볼 생각이 아예 없었다. 신청 기한이 끝나기도 했거니와 설령 보더라도 이 상태라면 시간 낭비에 불과할 테다.

“되도록 내년 안에 끝났으면 좋겠는데…….”

못해도 내년 겨울까지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제네비브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제네비브가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던 중, 하녀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알렸다.

“손님이라니?”

제네비브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테오도르 도련님께서 기다리십니다.”

“……테오도르가?”

제네비브는 그의 이름을 되물었다.

이 야밤에 갑작스러운 방문은 이상했지만, 그 동시에 말이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사이먼이 없는 지금, 이 저택에서 테오도르가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그건 자신뿐이니까.

“제네비브, 음…… 오랜만이야.”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테오도르가 반갑게 말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제네비브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읽고 있던 가정 교사 서류를 정리했다.

이미 졸업까지 마친 그의 앞에서 가정 교사 서류를 보인다는 것 자체가 창피했다. 급히 서류를 정리하던 손은 꼬여 버려 서류를 떨어트렸고, 결국 들고 있던 종이는 테오도르의 발끝까지 떨어졌다.

“…….”

“…….”

하필이면 고작 반을 맞은 기출 시험지가 그의 앞에서 떨어졌다.

“여기.”

“……고마워.”

제네비브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테오도르가 건넨 기출 시험지를 받았다.

다행히 테오도르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허리를 숙인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를 같이 정리해 줬다.

“여태 공부만 했던 거야?”

“……뭐, 그런 셈이지.”

제네비브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 상황을 얼추 들었는지, 테오도르는 크게 말을 얹거나 큰일이 난 것처럼 대하지 않았다.

“너라면 잘할 것 같은데.”

“잘하긴…… 저 반쪽짜리 시험지도 반나절은 걸렸는걸.”

“많이 힘들어?”

테오도르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자, 제네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

테오도르는 말을 잇지 않았다.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은 뻐끔거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무슨 얘기인데?”

제네비브는 답을 채근하듯 물었다.

“……갑작스럽겠지만.”

“응.”

“그럼, 나와 결혼할래?”

“…….”

테오도르가 담담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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