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94화 (94/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94화

어조가 너무나 단조롭고 자연스러워, 언뜻 들으면 청혼이 아니라 ‘오늘 저녁 식사 참 즐거웠어’와 같은 인사말처럼 들렸다.

“방금, 결혼이라고…….”

거절이든 수락이든 답을 줘야 했지만, 제네비브는 안 믿긴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만큼 뜬금없는 청혼이었다.

“농담이지?”

제네비브는 테오도르가 제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한 말이길 바랐다.

“아니, 제네비브. 진심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테오도르는 진지했다.

‘……안타깝다고?’

제네비브는 그 대답을 들으며 안타까움을 느낀 데 위화감을 느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제네비브는 우드빌 대공을 대하며 테오도르와 약혼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록 조금은 비관적인 자세였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었다.

그럼 청혼을 받았으니, 당연히 좋아해야 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

하지만 제네비브는 찰나의 순간에 스쳐 간 의문을 깊게 파고들지 않으려 했다. 의구심을 흘려보낸 후, 제네비브는 입을 열었다.

“우리 가문에게 청혼서를 보냈어?”

귀족 간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의 동의만으로 진행될 수 없었다. 우드빌 가문이 청혼서를 보내고, 제네비브와 달링 후작 부부 모두가 동의해야만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될 수 있었다.

만약 달링 부부가 청혼 소식을 숨긴 채로 우드빌 가문과 결혼 공작을 한 거라면 더 실망할 것 같았다.

“……지금은 내 독단이야.”

테오도르가 대답했다.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 고백한 그는 다소 충동적으로 저지른 것 같기도 했다.

“대뜸 청혼서를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네 의사가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처음에 차분함을 유지하던 테오도르는 말이 이어질수록 더 긴장한 것 같았다.

“물론 네가 뭘 하든 잘하는 건 아는데, 보험을 만들어 두면 네 마음도 편할 거고…… 언젠가 달링 후작이 되면 내 가문이 좋은 거래 상대가 될 거야.”

테오도르는 호소하듯 자신과 결혼하면 따라올 이득을 나열했다.

무려 우드빌씩이나 되는 가문과의 약혼을 ‘보험’이라 지칭하는 그를 보며 제네비브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여기서 이렇게 갑자기 말을 꺼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잠시 걱정스러운 미소를 지은 그는 어정쩡하게 쭈그리던 무릎 중 하나를 굽혔다.

가장 전통적인 청혼 방식이었다. 완벽하게 한쪽 무릎을 꿇는 테오도르를 보며 제네비브는 벌어지려는 입을 간신히 닫았다.

“제네비브 달링, 정식으로 물어볼게. 나와 결혼해 주겠어?”

“그게…….”

제네비브의 두 눈은 이제 지진이 난 듯 방황했다.

테오도르의 제안대로 한차례 성사되지 못했던 약혼을 다시 이어 가고, 테오도르와 결혼하여 달링 가문을 물려받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포가츠 아카데미가 폐교한 이후, 성행한 일이라 오히려 평범한 축에 속했다. 열다섯의 제네비브가 한때 꿈꿨던 미래가 눈앞에 펼쳐진다.

게다가 상대는 그 누구도 아닌 테오도르 우드빌이었다. 카르디르 왕국의 일등 신랑감이 제게 청혼을 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가장 쉬운 길이 열린 것이나 다름없다.

‘수락해야 해.’

바보가 아닌 이상, 테오도르 우드빌의 청혼을 거절할 사람이 있을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사라진 유급 제안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없는 일이 된다. 인생을 망치는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승낙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계속해서 쿡쿡 찔리는 걸 느꼈다.

무시하기 힘든 낯선 죄책감이었다. 정확히 어떻다고 서술하기 어려운 양심의 가책이 점점 반복되어, 머릿속으로 테오도르와 결혼하는 의제마저 생각하지 못하게끔 변했다.

“…….”

입은 원하는 대로 쉽게 안 떼졌다. ‘좋아’, 그 한마디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니.

“지금 바로 답할 필요 없어. 생각이 정리되면 말해 줘.”

쉽게 대답을 못 하는 제네비브를 보며 테오도르가 말했다. 그녀를 똑바로 보는 그는 어딘가 다소 불안해 보였다.

“…….”

제네비브는 그가 왜 평소와 달리, 불안해 보이는지 알아챘다.

고동색 눈에는 언제부터 시작된 지 모를 호감이 묻어났고, 혹시나 자신이 거절할까 걱정하는 게 비쳤다. 미미하게 떠는 어깨나 옅은 붉은색으로 물든 뺨은 지금 이 청혼이 그에게 얼마나 큰일인지 알려 주었다.

가끔은 몸짓 하나가 백 마디 말을 대신할 때가 있다.

아무리 친절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고작 친구를 돕기 위해 청혼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테오도르 우드빌은…… 제네비브 달링을 좋아한다.

그리고 제네비브는 그런 테오도르를 보며 조금 전부터 자신을 살금살금 덮쳐 온 감각이 누구로부터 파생된 건지 알아차렸다.

‘……왜 에드워드가.’

갑자기 떠올린 그 이름이 정답처럼 다가왔다.

테오도르와 자신만이 있어야 하는 이 상황에 제삼자가 끼어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테오도르가 닮은 구석 하나 없는 에드워드와 갑자기 닮은 구석이 생겨서인지, 그게 아니라면…….

“허…….”

떠올린 생각에 제네비브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자, 테오도르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 테오…… 미안해. 널 비웃은 게 아니라…….”

뒤늦게 그 웃음이 어떻게 들릴지 자각한 제네비브는 다급하게 사과했다. 정돈되지 않은 미안한 감정이 횡설수설 튀어나왔다. 복잡한 심경은 그저 테오도르의 청혼 때문인지, 아니면 느닷없이 머릿속을 점령한 에드워드 때문인지 몰랐다.

“조금 당황스러워서. 워낙 갑작스럽기도 하고…… 아, 아무튼. 먼저 내게 물어봐 줘서 고마워.”

제네비브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녀는 한때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을 바라보았다.

테오도르 우드빌.

어린 사랑이 그렇듯, 쉽게 사랑에 빠지는 만큼 그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잊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테오도르가 주던 이런 크고 작은 따스함에 이끌렸던 것 같다.

그러나 어렸을 때 받은 것보다 더 큰 친절을 그의 애정과 함께 다시 받자니…… 고마움 이외의 감정은 일절 들지 않았다.

그가 언제부터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또 어째서 좋아하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제네비브는 물어보지 않았다.

깊게 심호흡한 제네비브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미안해……. 네 마음은 받아 주지 못할 것 같아.”

몇 년 전, 자신을 거절했던 테오도르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의 청혼을 받고 나중에 파혼하는 방법이 머리를 잠깐 스쳐 갔으나, 제네비브는 그럴 만큼 뻔뻔하지 않았고 테오도르에게 그런 취급을 할 자격도 없었다.

“너와 친구로 잘 지내고 싶어.”

제네비브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언젠가 이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이게 맞는 일이었다.

“……네가 그렇다면.”

잠시 제네비브를 보던 테오도르는 이내 수긍했다는 듯 말했다.

제네비브는 ‘예전처럼 지내자’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사람에게 ‘예전처럼’이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제네비브는 예의상이라도 구태여 남은 시간을 같이 보내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그건 테오도르도 마찬가지였다.

테오도르는 주운 서류를 탁자 위에 올린 뒤,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제네비브는 닫히는 응접실 문을 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째서 에드워드가 생각났을까.

테오도르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미안함보다 일순 에드워드를 떠올렸다는 당황스러움이 제네비브를 삼켰다.

제네비브는 가정 교사 서류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고, 자신이 에드워드를 떠올린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저를 좋아하는 사람을 보며 에드워드를 떠올렸다. 에드워드의 얼굴을 떠올릴 때가 아니었는데도.

‘선배.’

‘제네비브 선배!’

늘 수줍게 자신을 부르던 에드워드는 제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만큼은 가슴이 벅찰 정도의 울림을 주었다.

연갈색 눈을 맞출 때마다 에드워드가 은은하게 짓는 미소나 부드럽게 접히는 눈동자가 그려졌다. 또 자신과 대화할 때면 이따금 붉어지는 귓가나 언젠가 뻣뻣했던 말투가 생각난다.

아마 테오도르와 같은 이유에서일 거다.

“…….”

그러니까, 아무래도 에드워드는.

“……나를 좋아한다고.”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제네비브는 탁자에 휘청거리는 몸을 기댔다. 그걸 지금 눈치챈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답을 단정 짓고 생각하니, 모든 단서가 뚜렷하게 보였다. 에드워드는 입 밖으로 제 감정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왜 소설 주인공이 나를?

고마운 선배 정도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작에서 여주를 향한 에드워드의 감정을 세기의 사랑처럼 묘사하였기에 제네비브는 너무나 당연하게 에드워드의 마음을 아무도 침투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어떻게든 설정한 대로 흘러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보며 제네비브는 그게 원작의 진리라고 생각했다.

‘근데, 에드워드가…… 나를 좋아해?’

소설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나를?

자의식 과잉일 거라고 스스로 설득한 게 무색하게 가슴이 쿵쿵 뛰었다. 공기가 더워졌다. 제네비브는 얼굴을 식히며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구겼다.

‘그럼, 나는 에드워드를 어떻게 생각하지?’

제네비브는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를 열어 보려 했다. 하지만, 고민을 거듭해도 선뜻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이제 제네비브에게 있어 에드워드는 단순히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친한 후배였다. 친구이니 잘되었으면 좋겠고, 나쁜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게 당연했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원작과 다른, 그만의 행복한 결말을 찾기를 원했다. 에드워드에게 더 이상 힘든 일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이것만큼은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이성적인 호감까지 이어질까?

제네비브 달링으로 살아오며 그녀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받아 왔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이성적인 호감은 썩 익숙한 개념이 아니었다.

살면서 ‘연인 간의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낀 건 테오도르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어린 시절의 옅은 호감에 불과했다고 제네비브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테오도르를 좋아했던 때처럼 에드워드에게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하…….”

제네비브는 한숨을 쉬었다. 머리는 정리가 안 된 서류만큼이나 엉망이었다. 경고음이 들렸다. 여기서 더 깊게 파고들면 분명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어차피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오랫동안 못 본다. 적어도 일 년 동안은 아본리아를 방문하지 못한다.

에드워드가 흑화한 계기를 막아 냈고, 악몽 같은 찰스 콜린스도 칼리지에 없어졌으니, 어쩌면 이번이야말로 에드워드와 여자 주인공이 잘될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마 에드워드도 원작의 흐름을 따라 결국엔 여자 주인공을 좋아하게 되겠지. 제네비브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 에드워드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고마움을 호감으로 착각한 걸 거다. 어린 날의 자신처럼.

‘제네비브, 이상한 생각 그만하고 응원이나 해 줘.’

제네비브는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묵직한 소리가 응접실을 채웠다. 발전할 감정이 없으니, 없애는 것도 쉬울 거다.

[에드워드 전하께서 찾아왔어. 네 상황을 대략 알려 주니 바로 가시더라. 편지를 보내겠다고 하셨는데, 받았는지 모르겠다.]

왜 문득 그 내용이 생각나는지.

제네비브는 아주 조금 섭섭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