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95화
개판이 되어 버린 카터 가문의 장례식에서 에드워드가 황궁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는 동안, 그의 호위병은 바뀌었다.
임무에 실패한 건 물론이오, 하나뿐인 후계자가 다친 채로 귀환하였으니 응당 받아야 하는 처우였다.
‘제네비브는 카르디르로 돌아갈 겁니다.’
그 말인즉 제네비브는 아본리아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의식을 되찾으면 카르디르로 돌아가겠지. 에드워드는 그 전에 제네비브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황자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가드너가 말했다.
명령을 따라 황제의 집무실을 찾아가자, 이반 황제는 마치 이날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일을 해치웠다.
이반 황제는 침착하게 에드워드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들었다.
에드워드가 이번 사건과 얽힌 남학생들의 하나둘 읊자, 이반 황제는 뒷덜미를 잡았다. 부친이라고 여겼던 시간이 짧아선가, 에드워드는 그 반응이 낯설었다.
“콜린스 가문 영식이 너를…… 강간하려고 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거기에 터너 가문과 헨더슨 가문의 아들도 있다는 거군…….”
그가 참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레베카의 딸.”
이어진 제네비브의 이름을 들은 이반 황제는 그녀가 누군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를 닮은 얼굴이 갑갑하다는 양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반 황제는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듯 검지로 책상 위를 두들겼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지?”
이반 황제는 위로 하나 없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게 고민할 거리가 있는 질문인가?’
에드워드는 찰스 콜린스와 그의 무리가 정당한 대가를 치르길 바랐다. 하다못해 찰스라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길 바랐다.
“재판을—.”
“재판을 열고 싶다, 같은 뻔한 말은 자제해 줬으면 좋겠군. 재판을 통해 황실이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 정확히 말해다오.”
이반 황제는 친히 제 질문의 뜻을 풀어 설명했다. 갑작스러운 실전 수업에 에드워드가 제대로 답하지 못하자, 이반 황제는 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황제는 자신의 이득이 아닌, 제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황권이 중요하다.”
이반 황제가 이어 말했다.
“그 무엇보다 지지 기반이 중요하지. 황권이 클수록 제국민을 위한 통치를 하는 게 편해진다. 귀족파는 무슨 정책을 꺼내기만 해도 발작을 해 대니까. 그 때문에 콜린스 가문이 사태의 원인인 게 아쉽군. 가문 규모는 블라이스 가문보다 작지만…… 그래도 상대가 되어 좋았는데.”
“…….”
“그런데, 하필 콜린스 가문이…….”
이반 황제가 미간을 구겼다. 그가 누구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건지, 에드워드는 감히 추측할 수 없었다.
아들을 강간하려고 한 찰스 콜린스에게 분노한 게 아닐까 싶지만, 그렇기엔 부친의 목소리에선 왠지 모르게 자신을 향한 원망이 느껴졌다.
“…….”
그리고 에드워드는 이를 기분 탓으로 넘기지 못했다.
평생 눈칫밥을 먹고 자란 이들에게 자랑스럽지 못한 특기가 있다면, 그건 자신을 향한 악의를 쉽게 파악하는 능력이었다. 부정적인 공기를 읽은 에드워드는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후, 에드워드는 조용히 부친의 말을 들었다. 일평생 권력자로 살아온 그에게 배울 부분이 있어 경청한 것도 있었지만, 진짜 목적은 이반 황제가 원하는 답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황족을 이런 식으로 대한 건 용납할 수 없지. 당최 황실을 얼마나 낮잡아 본 봤기에 그 아들까지…… 기어코 일을 저질러 버리는군.”
이반 황제는 분을 삭였다.
“이 재판을 통해, 우리는 콜린스 가문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 본보기로 두면 기강이 잡힐 테지. 하지만, 네가 말한 헨더슨이나 터너 같은 가문들마저 압수하게 되면 신임을 잃게 된다. 또한 황제파에서 가문 두 개 이상이 사라지면 황권이 크게 흔들릴 테고…….”
이반 황제는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았다.
“크리스토퍼 로버츠…… 로버츠 가문은, 그래. 로버츠 가문까진 괜찮겠군.”
그는 벌써부터 벌할 가문과 선처할 가문을 피해자인 에드워드를 대신하여 구별했다.
“어렵게 맞춘 균형이 다시 균형을 되찾게 할 순 없지.”
이반 황제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콜린스 가문과 로버츠 가문을 제외한 가해자 가문이 낼 ‘적당히 커 보이는 금액’을 측정했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그런 부친을 보며 크게 낙심했다.
“……전부 벌하시면 안 됩니까.”
이미 속으로 결론을 내린 그에게 말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았지만, 에드워드는 마지막 희망을 품으며 말했다.
“여태 이 아비가 한 말을 뭘로 들은 게냐.”
몸이 잠시 움찔했다. 호통을 치는 어투가 어딘지 낯익었다. 에드워드가 입을 다물자, 이반 황제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른 세 가문을 콜린스 가문처럼 만든다면 황제파의 지지 기반이 약해진다는 연설을 또 한 번 늘어트렸다.
에드워드는 이반 황제가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며 적어도 찰스 콜린스가 알거지가 되었다는 것에 위안을 얻으려고 했다.
“달링 가문의 여식까지 물고 늘어질 텐데…… 카르디르에 소환 신청하는 것도 일이겠군.”
“…….”
그러던 중, 제네비브의 이름이 나와서는 안 되는 단어들과 함께 언급됐다.
“제네비브 선배가 왜 소환 신청을 받아야 하는 겁니까?”
에드워드는 이반 황제를 보며 말했다.
“제네비브 선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는 필사적으로 제네비브를 변호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선배가 아니었다면, 저는…….”
내뱉는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금 자신은 어떤 꼴이 되었을지…….
“저런,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어쨌든 달링 여식은 아본리아 귀족의 아들을 기절시켰어. 콜린스 백작가가 곧 망하게 될지언정 고소할 자격은 충분하다. 레베카의 딸은 평판이 안 좋아지겠군…….”
이반 황제가 에드워드의 말을 끊었다.
“콜린스 백작가가 고소를 못 하게 할 수는 없습니까?”
에드워드는 다급하게 물었다.
“……황실이 취할 수 있는 이득이 뭔지를 물었는데, 옆 나라 귀족 좋은 일만 해 주고 있구나.”
황제가 쌀쌀맞게 말했다.
“정말 방법이 없습니까?”
에드워드가 재차 묻자, 황제가 졌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찰스 콜린스의 집단 강간 미수를 집단 폭행으로 바꾸는 걸 조건으로 달면 좋다고 하겠지. 그쪽은 결혼으로 재기를 노릴 테니…… 콜린스 가문도 아들이 남색가라는 소문이 안 돌길 바랄 거고. 지금 콜린스 가문 영식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졌으니, 그를 기절시킨 사람이 다른 사람—.”
이반 황제가 에드워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을 찾아야 한다. 손해는 고스란히 우리 쪽에 있으니, 추천하지는 않는다만.”
다시 말해, 에드워드가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뒤집어써야 한다는 뜻이다. 제네비브를 위해서.
“…….”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이런 불상사에 엮이지 않기를 바랐다. 이런 식이라도 제네비브만큼은 이 끔찍한 일을 잊길 바랐다.
“그나마 황실 쪽 이득이라고 하면 네가 강간당할 뻔했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된다는 거지. 나머지는 입 간수를 시키면 될 테고……. 만약 내가 너였다면 그러지 않아도 강간 부분은 뺐을 게다. 같은 남자에게 그런 짓을 당할 뻔했다는 얘기는 낙인처럼 남을 게 분명하니.”
이반 황제가 잔인한 현실을 끄집어냈다.
“또 무엇보다, 이건 전부 네가 황자로 공개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
“마음은 정했는가?”
“네.”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찰스 콜린스가 의식을 되찾기 전, 이반 황제는 심부름꾼과 소환장을 보냈다.
황제는 처음부터 찰스를 처형할 생각이 없었지만, 마치 자비를 베푼 것처럼 소식을 전하게 만들었다. 하여 심부름꾼은 황자를 강간하려던 죄를 덮고, 대신 황족 폭행죄로 재판을 볼 테니 그 누구도 고소하지 말라는 황명을 전달했다.
이후, 아본리아 제국은 새로운 황자의 등장에 바빴다. 새 황자는 신고식을 치르기라도 하듯 그가 세상에 공표되자마자 귀족 재판이 열렸다.
황족이 재판에 등장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고, 피해자 신분으로 나올 리는 더더욱 없었기에 아는 사람만 관심을 갖던 귀족 재판은 이례적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자고로 귀족의 재판이란 어느 가문의 힘이 강력한가에 따라 승패가 나뉜다.
기실 황궁에서 서명을 주고받는 걸로 간편히 끝낼 수 있는 짜고 치는 판이었지만, 그런데도 이런 쇼를 하는 건 서민들에게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려는 노력이었다.
“……이상. 콜린스 가문은 소유한 모든 항구와 광산 채굴권, 블렛 황실로부터 하사 받은 영지와 무역권을 황실에 반납한다. 더불어 존재하는 모든 현금 자산을 블라이스 가문의 차녀, 레베카 블라이스 달링에게 넘긴다.”
모든 재판관이 황실 소속인 만큼, 판사는 황제가 원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반 황제는 자신의 지지 세력 중에서 가장 충실한 가문 중 하나였던 콜린스 가문을 없애는 동시에 콜린스 가문 권력의 원천이었던 모든 걸 빼앗았다. 그렇게 콜린스 가문은 몇 시간 만에 몰락 귀족이 되었다.
하지만, 콜린스 백작 부부는 전 재산을 배상금으로 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아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서로를 얼싸안으며 축하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드워드는 처음으로 찰스 콜린스가 부러워졌다.
* * *
재판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그곳에 등장한 거의 모든 인물이 입방아에 올랐다.
감히 황자에게 폭력을 행사한 찰스 콜린스를 비난하는 여론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그래도 삽으로 찰스를 기절시킨 행동은 ‘못 배운 것 같다’며,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이 야만적이라 말하는 여론도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숨겨진 황자에게 폭군의 싹이 보인다면서 불필요한 걱정을 하는 자들과 용감한 행동이었다고 추앙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내가 한 일이 되어서 다행이야.’
그럴수록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오명을 얻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그나마 황자라는 지위 덕분에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된 거지, 만약 사실대로 알려졌다면 제네비브는 이보다 더한 말들을 들었을 거다.
에드워드는 자신을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시선에 점차 익숙해졌다. 하대하는 듯한 시선과는 달랐다. 기분이 나쁘다는 건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함부로 지적할 수 없다는 게 난감했다.
집단 폭행 하나만으로 이런 시선을 받는다. 만약 강간이란 사실이 그대로 드러났다면 더 불쌍하게 보았겠지.
그리고 흉흉한 분위기를 희소식으로 덮겠다는 듯 황실은 재빨리 황태자의 책봉일을 잡았다.
책봉일이 정해지고, 연회 준비에 휘말리듯이 지내던 에드워드는 당연히 제네비브를 만날 겨를이 없었다.
제네비브가 카르디르를 떠나면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황자로 인정받은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기에 에드워드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황궁을 뛰쳐나가 제네비브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가드너가 간간이 전하는 제네비브의 근황을 들으며 참아야 했다.
제네비브의 상태가 호전되어 블라이스 영지로 돌아갔다. 곧 의식을 되찾을 것 같다, 등등……. 시간이 지날 때마다 나아지는 제네비브의 소식을 들으며 에드워드도 점차 활력을 찾아갔다.
“에드워드 전하, 달링 양께서 의식을 되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외출을 감행했다. 일을 전부 끝낸 에드워드를 붙잡을 핑계가 없던 궁인들은 결국 그를 보내 줘야만 했다.
그렇게 마침내 황궁 밖으로 나온 에드워드는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르며 블라이스 영지에 도달했다.
“에드워드 전하를 뵙습니다.”
반(反) 황제파인 블라이스 가문은 에드워드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곳에 제네비브는 없었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블라이스 저택에는 블라이스 가문 사람들만이 지냈다.
예의를 차리며 에드워드를 상대한 오웬은(에드워드는 몇 번이고 부디 말을 놓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녀가 몇 시간 전에 아본리아를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누가 본다면 쓰러졌다는 것도 모를 겁니다. 많이 회복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
“……아, 말 편하게 하라고 했지. 미안하다. 특히 우리 집은 황족과 말 놓을 일이 없어서 자꾸 까먹네. 아무튼, 몸은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속상한 것 같았어. 뭐, 그럴 만도 하지. 말도 없이 유급 제안을 거절했으니까. 제네비브가 학교생활에 얼마나 진심인지 봤다면 알 거야.”
“……제네비브 선배가 유급 제안을 거절하셨어요?”
에드워드는 안 믿긴다는 듯 물었다.
“정확히는 제네비브가 아니라, 고모님과 고모부가.”
제네비브는 유급 제안 수락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오웬이 안타까운 어조로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