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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96화 (96/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96화

제네비브가 마음이 상한 채 카르디르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에드워드는 한편으론 마음이 먼저 놓였다. 그녀가 무사히 의식을 되찾았단 반증이니까.

물론 만나지 못한 건 못내 아쉬웠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선 달링 후작부인과 대화한 뒤로 각오한 일이었다.

제네비브에 대한 걸 제외하면 에드워드와 오웬에겐 이렇다고 할 대화거리가 없었다(사실 두 사람이 생각해 내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응접실에 맴돌았다.

몇 주 전이었다면 오웬이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었겠지만, 이를 위해 특유의 가벼움을 황족 앞에서 선보일 수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따금 정적이 흘렀다.

궁금한 것만 알아내고 돌아가는 건 예의가 아니나, 이런 상황에선 돌아가는 게 예의인 것 같기도 했다.

“음, 제네비브 선배께 편지를 보내야겠네요.”

뒤이어 에드워드가 어색한 감사 인사와 함께 돌아가겠다고 하자, 오웬은 그를 형식적으로 한 번 붙잡았다.

블라이스 백작은 정문 앞까지 에드워드를 바래다주었다.

“식사는 하고 가시지요.”

그가 마차를 타려는 에드워드에게 아쉽다는 듯 말했다.

기실 저택에 있는 그 누구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황자와 시간을 더 보내는 걸 꺼렸음에도 블라이스 백작은 진심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의 형식적인 말을 금방 파악했다. 만약 정말 저와 더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다면 저택 안에서 권유했지, 떠나려는 마차 앞에서 권하진 않았을 테다.

“아뇨, 실례를 더 범할 수 없습니다. 응대해 줘서 고맙군요.”

에드워드는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을 들려줬다.

“그것참 아쉽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블라이스 영지는 겨울이 가장 아름다우니, 그때 방문하시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블라이스 백작은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 와 줘라’를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그제야 근본적인 무례를 깨닫게 된 에드워드는 민망한 티를 숨기며 말했다. 제네비브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에 ‘와야 한다’ 말고는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그리고…… 그땐 주변 사람들이 바뀌길 바랍니다.」

그때, 블라이스 백작이 의미심장하게 공용어를 꺼냈다.

「기왕이면 황자님 사람이었으면 좋겠군요.」

오랜 세월이 담긴 눈은 잠시 에드워드의 호위병에게 머물렀다. 일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에드워드는 그 시선이 악의적이었는지, 호의적이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럼, 다음 방문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다음에 뵐 땐 황태자 전하시겠군요.”

하지만 블라이스 백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인자한 미소와 함께 그를 배웅했다.

에드워드는 그날, 블라이스 백작의 의중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황실에 입성한 지 겨우 2주가 되었고, 황자라고 알려진 건 일주일도 안 됐다. 당연하고도 불가피하게 에드워드의 주변인은 전부 이반 황제의 수족이었다.

에드워드는 황태자궁 안의 사람들을 보며 가만히 궁 안을 거닐었다. 관례상 황자궁에 있어야 했지만, 책봉일까지 정해진 지금 그의 거처는 황태자궁이 되었다.

“…….”

자신의 뒤로 사람들이 졸졸 쫓아다녔다.

일이 터지고 자신의 곁을 줄곧 떨어지지 않는 호위병, 함부로 외출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가드너, 가끔 찾아와 머릿속에 지식을 욱여넣는 교사들까지…….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전부 이반 황제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일정을 전부 끝냈다 하여도 다음부터는 장거리 외출은 삼가해 주십시오. ……전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에드워드가 멈춰 서자, 황제의 말을 대신 읊어 주던 가드너는 말을 멈췄다.

“……아무 일도.”

에드워드는 어색하게 말을 낮췄다.

‘황궁에서 내 사람을 만들라는 거겠지.’

에드워드는 블라이스 백작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받아들였다.

“내일부터 다시 교사들을 만날 겁니다. 임시 수업은 다음 주 수요일까지 진행되고, 세인트 존 칼리지를 다닐지 그게 아니라면 황궁에서 수업을 받을지 정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 앞으로의 일정을 알려 주는 가드너만 보더라도 부친의 사람이 확실했다.

황제의 최측근이 황자 옆에 있다는 건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황제의 지지이고 다른 하나는 감시다. 실속을 중요시하는 부친을 짧게나마 겪어 본 결과, 에드워드는 딱 절반에 걸쳐 있다는 걸 눈치챘다.

“…….”

블라이스 백작을 몇 번이나 만나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제네비브의 친척이라 그런 걸까. 귀족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이반 황제와 다르게 에드워드는 블라이스 가문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제네비브 선배는 지금 즈음이면 도착했으려나.’

단 한 번도 카르디르에 가 본 적 없는 에드워드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칼리지 졸업이 제네비브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는 그간 졸업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던 그녀의 표정에서 전부 알 수 있었다. 듣고 있던 에드워드가 서운해질 정도로 제네비브의 얼굴은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찼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의지도 아닌 타인의 선택으로 졸업을 못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힘들지.

“…….”

에드워드가 황자라는, 자신과 어울리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지위를 수락한 건 오로지 제네비브 때문이었다. 사회적으로 그녀와 동등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다면 자신이 황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답은 간단히 나왔다.

‘유급 권유를 돌려주는 것.’

세인트 존 칼리지가 재시험의 기회를 준다면 무엇보다 좋겠지만, 현시점에선 유급 권유만 다시 받아도 감지덕지였다.

크루즈 사건으로 인해 미뤄졌던 아본리아 학생들의 졸업 시험은 이미 치러졌고, 오직 그녀를 위하여 시험 문제를 새로 만들 순 없는 노릇이다. 거절된 권유를 다시 한번 제안하는 것도 학교 입장에선 난처할 거다.

‘먼저 선배의 의사를 물어봐야지.’

블라이스 영지에서 간접적으로 예절 수업을 받은 에드워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했다.

먼저 계획을 세우고, 상대를 계획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게 아닌 상대의 동의를 얻는 것. 방으로 돌아간 에드워드는 종이와 펜을 꺼냈다.

[제네비브 달링 선배에게.

갑작스러운 편지로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웬 선배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식을 되찾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재판 결과를 전부 봤을지 모르겠는데,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부분이 있어 당황스럽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이야기가 길어 편지로 전부 담아낼 수는 없지만, 언젠가 설명할 날이 곧 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유급 제안이 거절된 일을 들었는데, 제가 도울 부분이 있으면 말해 주세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푹 쉬세요.

당신을 생각하며,

에드워드가.]

정갈하게 적힌 ‘당신을 생각하며’를 보며 에드워드는 편지를 다시 써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는 곧 이대로 보내기로 했다.

에드워드는 아직 온기가 남은 밀랍에 스탬프를 붙였다. 책봉을 못 받은 탓에 황태자의 인장은 이용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황실의 것이었다.

“…….”

책에서만 보던 걸 직접 사용하는 날이 올 줄이야. 5운트도 안 되는 우표를 못 구해서 전전긍긍하던 게 불과 몇 주 전 일이었다.

에드워드는 낯선 감각을 받으며 편지 뒷면에 달링 후작저의 주소를 적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이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적게는 질 좋은 종이와 만년필을 마음껏 이용해도 된다는 것부터 블라이스 백작이나 되는 거물이 제게 존대를 하는 것까지.

황실에 입성한 뒤로 에드워드의 머릿속에선 늘 부족했던 때가, 밀포드 씨 아래에서 생활했던 때가 불쑥불쑥 생각나곤 했다.

그는 익숙한 척 훌륭하게 연기를 해냈지만, 이 호화로운 삶이 어색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예전의 자신을 알고, 친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만날 때 편하게 대해 달라 부탁한 것일지도 모른다.

편지를 보내라고 일러둔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의 답장이 오면 곧바로 움직이겠다고 다짐하며 답신을 기다렸다.

하지만, 제네비브의 답장은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오지 않자, 에드워드는 편지를 몇 번 더 보냈다.

“카르디르에서 편지는 안 왔나.”

“예, 전하.”

에드워드의 얼굴에서 잠시 실망의 기색이 읽혔다. 하지만 황궁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진 만큼, 그는 이제 감정을 속여 내는 데도 제법 능숙해졌다.

“오늘 칼리지를 가는데…….”

에드워드는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음대로 블라이스 영지에 간 이후, 에드워드는 이반 황제의 눈 밖에 났는지 쉴 틈이 없었다.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며 칭찬을 하던 황실 예법 교사나 개인 교사들은 그를 들들 볶아 댔고, 황태자 책봉 이전에는 사교 활동이 없을 거라 얘기했던 것과 달리 가드너는 ‘지지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라며 억지로 황제의 손님들, 그러니까 고위 귀족들과 시간을 보내게 했다.

이반 황제의 심기를 건드린 이유가 마음대로 외출해서인지, 그게 아니라면 블라이스 영지에 간 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이유에서라도 결국 에드워드가 세인트 존 칼리지에 방문할 수 있는 기회는 칼리지를 계속 다니기로 결심했다는 소식을 전하러 가는 오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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