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97화
사실 이번 외출은 에드워드가 직접 행차할 이유가 없었다.
많고 많은 궁인 중에 한 명을 시켜 의사가 담긴 편지를 세인트 존 칼리지로 보내면 끝나는 일이었지만, 에드워드는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했다.
그동안 반항 없이 행동한 덕분일까, 이반 황제는 쉽게 외출을 허락했다.
‘총장에게 제안을 얻어 내고, 그다음에 선배의 의사를 묻는다.’
계획한 것과 다르게 순서가 뒤바뀌긴 했으나, 빽빽한 일정 탓에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칼리지로 향하는 마차를 탄 에드워드는 시시각각 바뀌는 바깥 풍경을 보며 황궁을 떠나기 전 이반 황제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어째서 세인트 존 칼리지를 결정한 거지? 교사가 별로였나?’
그는 따지는 어조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화를 억누르는 것도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순전히 궁금해서 질문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정치 생활 동안 발달한 그의 감은 에드워드의 본심을 예리하게 꿰뚫었다. 에드워드가 칼리지에서 학업을 이어 가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약간의 사심도 있지만) 그와 너무나 다른 교사들의 성향이 문제였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나마 부친을 겪어 본 결과, 에드워드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들려주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칼리지에선 인맥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역시나 실리를 추구하는 이반 황제의 마음에 꼭 드는 대답이었다.
‘……아하하! 똑똑하다더니, 맞는 말이군. 그래, 인맥은 중요하다. 더 중요한 건, 어느 사람과 인맥을 쌓느냐는 거고.’
‘누구와 인맥을 쌓을 거냐’라는 의도가 다분이 담긴 질문에 에드워드는 황제파의 주요 가문을 언급했다.
메이어, 터너, 헨더슨 등…… 찰스 콜린스를 중심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자들이 속한 가문의 이름이었다.
‘이런 점은 랜돌프보다 네가 나은 것 같구나. 그래, 과거의 일은 과거에 묻어 두는 편이 낫다. 괜히 들쑤셔서 상황을 악화할 필요 없어. 시간 낭비지.’
이미 자신에 대한 뒷조사를 전부 끝냈는지, 이반 황제는 제 괴롭힘을 아는 듯한 말을 흘렸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지만.”
에드워드는 제 대답을 들으며 좋아했던 황제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부모의 힘이 곧 자식의 힘이라는 말을 되뇌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같이 전부 자신을 괴롭혔던 작자들이 황제파인 건가.
에드워드는 주먹을 쥐었다.
황제파의 인식이 나쁠 거라고 걱정했던 걸까. 그를 가르치던 개인 교사들은 능력과 별개로 수업이 지나치게 편향적이었다. 마치 세뇌라도 해야겠다는 것처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귀족파를 욕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에드워드는 오히려 블라이스 가문이 낫다고 생각했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그때, 상념을 끊듯 빌젠가부터 마차를 끌던 마부가 도착을 알렸다.
에드워드는 익숙한 전경을 바라보았다.
학기가 끝난 이후, 그가 세인트 존 칼리지를 찾아올 일은 없었다. 여름날의 햇빛을 받은 학교는 어울리지 않게 따스했지만, 나무 그늘로 들어갈 때면 기억하던 대로 다시 서늘해졌다.
학교는 달라진 듯 전과 똑같았다. 벽을 가리는 철제를 미루어 보아, 학기 중엔 못했던 시설 공사가 다시 한번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마차는 건물 가까이 다가가자 속도를 줄였다.
“에드워드 전하, 들어오시죠.”
미리 언질을 해 둔 덕분에 데클렌 총장은 준비된 상태로 에드워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총장님.”
데클렌 총장이 직접 나올 줄 몰랐던 에드워드는 애써 익숙한 모습으로 그를 따라갔다.
“줄곧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들어오시죠.”
데클렌 총장이 정중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몸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지를 받았을 때 매우 놀랐습니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어, 많이 준비했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지요…… 허허.”
“…….”
감회가 이상했다. 언제나 근엄한 모습인 데다 학교 행사가 아니라면 얼굴 한번 보기 어렵던 데클렌 총장은 자신의 앞에서 몸을 낮추는 데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찰스 콜린스의 퇴학 조치는 바로 취했습니다. 그런 일이 다시는, 어떤 학생에게도 발생하지 않도록 학교 측에서도 힘쓰겠습니다.”
입학식 때마다 듣던 학교의 연혁을 말하던 데클렌 총장이 조심스레 말했다.
데클렌 총장은 불안해 보였다. 그는 에드워드가 세인트 존 칼리지를 계속 다닐지, 아니면 그만둘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전해 듣지 못했으니까. ‘힘쓰겠다’라는 약속도 결국 에드워드를 붙잡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어느 학교든 황족이나 왕족이 다니는 건 큰 영예이자 이득이었다. 황족이 교사를 두는 게 아니라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이곳 수업이 그만큼 훌륭하다는 증거이자 자부심이었다.
올라가는 수요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천문학적인 기부금. 아마 데클렌 총장의 눈엔 에드워드는 놓칠 수 없는 금덩이나 다름없을 테다.
에드워드는 데클렌 총장의 사무실 안까지 들어갔다. 데클렌 총장은 에드워드에게 흔쾌히 상석을 내주며, 미리 마련한 커피를 내놓았다.
에드워드는 떠는 손을 애써 숨기는 데클렌 총장을 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뜨거워.’
혀가 데일 것 같다는 감상과 함께 에드워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습니까?”
그러자, 데클렌 총장이 크게 놀라며 물었다.
“예, 냅킨은 넣어 두세요.”
에드워드는 그의 손에 들린 냅킨을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말리지 않았으면 데클렌 총장은 저걸로 제 입가를 문지를 기세였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드워드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동안 빙빙 돌려 말하는 귀족 화법에 익숙해진 데클렌 총장은 의자에 앉은 지 1분 만에 나오는 본론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칼리지는 졸업할 생각입니다.”
에드워드는 담백하게 말했다. 데클렌 총장의 안색은 한순간에 환해졌다.
“계속 세인트 존 칼리지를 다니기로 결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자님 같은 훌륭한 인재가 계속 다니게 된다니, 그저 기쁠 따름이죠. 덕분에…….”
마치 긴장이 풀린 사람처럼 데클렌 총장은 미소를 지으며 학교의 다짐을 전했다. 앞으로 에드워드가 받을 특별 대우를 언급하는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선 축제가 한창 열렸다.
“대신.”
그리고, 에드워드는 축제에 물을 끼얹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입니까?”
데클렌 총장이 물었다.
“제네비브 달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에드워드가 말했다.
얼굴에서 전부 드러나는 데클렌 총장의 감정 변화로 보아, 지금 아쉬운 쪽은 누가 보더라도 그였다.
“아…… 제네비브 학생에 대해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제삼자의 이름에 데클렌 총장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는 곧 자세를 바꿔 물었다.
“선배, 아니, 제네비브 달링이 유급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학부모, 아니, 이젠 학생이 아니니 달링 가문 측에서 답변이 왔다고 해야겠지요. 아쉽게도 유급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학교 입장에선 파격적인 제안이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데클렌 총장은 나이에 맞지 않은 순진한 말을 했다. 에드워드는 능구렁이 같은 그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작은 미소를 지었다.
“제네비브 달링이 재시험을 봤으면 합니다. 학교 측에서도 무슨 일로 불참한 건지 알고 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수도에서 발목이 잡힌 거니까요.”
에드워드는 데클렌 총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네비브가 유급 권유만 다시 받더라도 성공한 거였지만, 에드워드는 일부러 더 불가능한 요구를 먼저 꺼냈다.
‘재시험이 되면 좋은 거고, 그게 안 된다면 본래 목적대로 유급 제안을 꺼내야지.’
에드워드는 무심한 표정 아래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우리 학생이 그 비극에 휘말리지 않아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하지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나쁜 전례를 만들면 안 되니까요.”
“정말 어렵나요?”
에드워드는 일부러 한 번 더 물어봤다.
“어렵습니다. 아무리 황자님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지금 방학이라, 조국으로 돌아간 외국 교수들도 많아서 불러오기 힘들기도 하죠. 하지만…….”
에드워드는 가만히 데클렌 총장이 말을 이어 가길 기다렸다.
“이례적인 일이나…… 유급 제안을 다시 권할 수 있습니다.”
“…….”
드디어, 에드워드가 바라던 말이 나왔다.
바라던 말이 데클렌 총장의 입에서 나오자, 에드워드는 신난 티를 최대한 숨기려 안간힘을 썼다.
그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생각에 잠긴 척 연기했다.
“아쉽지만…… 알겠습니다. 그걸로 될 것 같습니다.”
짧은 침묵을 지키던 에드워드는 곧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학교 측에서 다시 제네비브 학생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하죠.”
데클렌 총장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들리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진 데클린 총장의 말에 에드워드는 단호하게 답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네? 그럼…….”
“제가 직접 알려 드리겠습니다.”
에드워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